107화
“하아…… 하아…….”
남궁은 지친 듯 거친 숨을 토해내며 사당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주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바닥에 뿌려진 검은 가루들이 전부.
하지만 그것이 지금껏 그가 겪었던 모든 전투를 통틀어 가장 강한 적의 잔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두 번은 못 할 짓이군.”
우우우웅…….
남궁은 사령의 힘을 끌어모았다.
▶ 상위의 영력이 당신의 사령들을 짓누릅니다.
▶ 영혼 병사를 소환할 수 없습니다.
츠르르릉…….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사슬이 맥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열 명이 넘는 수장의 영혼을 상대했으니, 제아무리 인과율에서 벗어난 무구라 하더라도 한계는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위험한 상황인 건가.’
검묘를 가득 채운 영력은 남궁의 사령과는 결이 다른 힘이었다.
그들은 일족 특유의 술법으로 보호받고 있었고 자신들의 힘 이외의 것은 모두 배제했다.
덕분에 남궁은 영혼 병사를 쓸 수 없었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용아는 더더욱 소환이 불가능했다.
“흠.”
남궁은 사당의 입구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사슬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의 상태도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무구의 기억이라고 해도 역대 수장들의 힘은 강했다. 특히 무량의 무위는 압도적이었고 만약 자신이 무명의 술법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통천루에서 역대 수장들의 술법서를 본 게 다행이군. 분명…… 열다섯 명이었던가?”
멈칫-
그때였다.
남궁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
‘……열다섯?’
남궁은 자신의 발아래를 살폈다. 이미 시체가 사라져 재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죽인 수장들의 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모자랐다.
한 명이.
[크르르르……!!!]
그때였다.
남궁의 뒤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 안에서 야차가 튀어나왔다.
어둠발이라 불렸던 수장.
야차 일족 중 유일하게 살수의 능력으로 정상에 섰던 자였다.
‘……지금껏 숨어 있었나?’
남궁은 아차 싶었다.
어쩌면 사슬의 힘에 취해 가장 위험한 이곳을 쉽게 생각했던 것일지 모른다.
전생에는 넘지 못했던 야차 일족의 영혼들을 손쉽게 처리해 버렸으니까.
풍문으로만 가득했던 레전더리 등급의 무구인 【악귀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그 흥분이 너무나도 초보적인 실수였지만 그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큭!!!”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날카로운 두 자루의 단검.
힘을 잃은 사슬과 사용할 수 없는 사령의 힘. 남궁으로서는 그의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파앗-!!!
그렇다고 이런 곳에서 목숨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반성 좀 해야겠군…….”
남궁은 오히려 자신을 노리는 단검을 향해 몸을 던지듯 뛰어들었다.
“팔 하나 정도.”
남궁이 손바닥으로 어둠발의 단검을 막았다.
날카로운 검날이 그의 손바닥을 가볍게 뚫고 튀어나왔다.
[크륵……?]
단검을 내려치려 힘을 준 순간, 남궁이 어둠발의 손목에 사슬을 감았다.
비록 힘을 잃긴 했지만 사슬은 남궁이 가진 그 무엇보다 단단한 무구였다.
“목숨에 비하면 아깝지 않지.”
화악-!!!
남궁이 어둠발을 있는 힘껏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사슬의 힘에 어둠발의 중심이 무너졌고, 그는 빠르게 사슬을 위로 쳐올리며 어둠발의 목을 동시에 감았다.
[컥…… 커컥…….]
목과 팔이 포박당한 어둠발이 고통스러운 듯 기괴한 신음을 뱉어냈다.
툭-
그 순간 남궁이 그의 등 뒤에 손을 가져갔다.
무아경(無我經) - 1서(書)
그의 팔을 타고 나선으로 기류가 응집되더니 어둠발의 등과 손바닥이 닿은 부분에 강렬한 폭발이 일었다.
츠즈즈즈즈…….
[크륵…….]
어둠발이 고개를 떨궜다.
뻥 뚫린 자신의 가슴을 보던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연기가 되어 산화되었다.
“후우…….”
남궁은 단검에 꿰뚫린 왼쪽 손바닥을 소매로 쓱 닦아 내며 숨을 토해냈다.
“저건가.”
마지막 수장까지 처리하고 난 그가 사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그 안에서 각종 주술 도구들로 둘러싸여 있는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마치 거푸집처럼 바위 안에는 낡은 장검이 하나 박혀 있었다.
시커멓게 변한 검신은 녹이 슬어 사용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남궁은 그것이 온갖 악귀들을 봉인한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이었다.
“과연…… 무명의 검답군.”
남궁은 천천히 검에 손을 가져갔다.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때였다.
그의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남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둑한 분위기의 사당과 어울리지 않는 아리따운 소녀는 무휘의 딸인 연화였다.
“검의 무녀.”
남궁은 그녀를 바라봤다.
“생각했던 것보단 멀쩡한 모습인걸.”
“힘이 든다 하여 겉으로 보이는 모습까지 허투루 보이고 싶진 않으니까요. 이래 봬도 100여 년 만인걸요. 생자(生者)와 만나는 건 말이죠.”
그녀가 싱긋 웃는 순간 그녀의 피부가 마치 해파리처럼 투명하게 빛나며 그 안의 골격이 여실히 드러났다.
입고 있는 옷 역시 실체가 아닌 듯, 피부가 투명해질 때 함께 투명해졌다.
“…….”
봉인의 여파일까.
남궁은 그녀의 몸 안에 장기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굳이 생자라는 단어를 쓴 이유도 이해되었다.
“악귀검을 가지러 왔다. 그리고 너를 무휘에게 돌려보낼 생각이고.”
[썩 내키지 않는 일이네요. 보시다시피 저는 이미 죽었고, 육신은 봉인의 제물로 소멸되어 시체도 가져갈 수 없는걸요.]
“나는 일곱 뱀의 계시자다.”
[사령술이라…… 글쎄요. 그다지 믿음직스러워 보이진 않네요. 고작 하급 영혼 병사들을 다루는 정도로…….]
얼굴을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신랄하게 대답했다.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기껏 요행으로 이곳까지 왔으면서요.]
“구해주러 온 사람에게 꽤나 친절한 태도네.”
[아직 제대로 듣지 못했으니까요. 검이 목적인지, 저를 구하는 것이 목적인지.]
“둘 다라고 했을 텐데?”
[검을 얻기 위해서 저를 소멸시켜야 한다면요?]
“……뭐?”
[저를 구하기 위해, 검을 파괴해야 한다면요.]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남궁의 모습에 연화는 예상했다는 듯 쓰게 웃었다.
[그 검은 무명이 야차 일족을 떠나 온갖 곳을 유랑하며 수많은 악귀들을 잡을 때 사용했던 검입니다. 그만큼 강하며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죠.]
탈칵-
연화는 아무렇지 않게 바위에서 검을 뽑았다.
[보세요.]
▶ 검이 더 많은 영혼을 갈구합니다.
▶ 광기에 빠집니다.
▶ 사용자가 죽기 전까지 부러지지 않습니다.
▶ 이따금 사용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검이 움직입니다.
그녀가 남궁의 손을 잡아당겨 【악귀검】 위에 살짝 내려놓자 밀물처럼 정보들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
남궁은 하마터면 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을 뻔했다.
황급히 손을 뿌리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살의(殺意)였다.
[무명이 악귀들을 봉인한 덕분에 세상은 이로워졌지만, 그는 딱히 대의를 위해 그런 걸 한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악귀들을 봉인한 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사나워지고 있으니까요.]
“그는 강함을 추구하는 자였으니까.”
[맞아요. 과연…… 초록은 동색이라. 무명의 비기를 이해한 사람답네요.]
그녀는 남궁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헛소리. 난 강함을 좇지 않아. 살아남는 방법을 좇는 거지.”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에 남궁은 차갑게 대답했다.
[글쎄요. 무명의 술법을 익혔으니 당신도 결국 물들게 될 겁니다. 이 검도 처음엔 깨끗했겠죠. 악귀를 잡는다는 위대한 여정에 기뻤을 겁니다.]
우우우웅…….
검이 떨렸다.
[그러나 보세요. 어찌 되었나요. 결국 악귀에 물들어 당장에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일 뿐이죠.]
그녀는 검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어째서 일족을 떠난 무명의 검이 다시 이곳으로 흘러들어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검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분명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것입니다.]
그러고는 남궁을 바라봤다.
[저는 목숨을 다해 검을 지켜왔습니다. 어느새 검과 저는 이어지게 되었고요. 당신이 이 검을 세상 밖으로 가져간다면 육신을 잃은 저는 소멸될 겁니다.]
“…….”
[저를 데려간다면 봉인이 풀린 검은 날뛰게 될 것이고, 결국 부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남궁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화의 눈빛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시험이었다.
오직 둘 중 하나만을 고를 수 있는 양자택일(兩者擇一)의 시험.
남궁은 망설임 없이 검을 움켜잡았다.
[…….]
연화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했을 텐데.”
그 순간 그는 말했다.
“둘 다 데려간다고.”
콰직--!!!!
남궁이 있는 힘껏 악귀검을 바닥에 내려쳤다.
[……!!!!]
놀랍게도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한 듯 검날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키에에에에엑……!!!]
그러자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악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독할 정도로 시커먼 연기와 시궁창에서나 맡을 법한 악취들이 영혼의 순도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무, 무슨 짓을…….]
“무명이 평생을 유랑하며 검 안에 잡아넣은 악귀가 몇이나 되지?”
[……108명입니다.]
연화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별거 없네.”
악귀의 영혼들이 서로 뒤엉키며 마치 검은 먹구름 같은 형상이 되었다.
남궁은 그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십만이 넘는 마족도 상대해 봤다. 고작 세 자릿수? 우습지.”
[설마…… 사령술로 악귀의 영혼을 흡수할 생각인가요?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창그랑-
남궁은 부서진 악귀검의 손잡이를 던졌다.
“난 이런 녹슨 검을 가지러 온 게 아냐. 그렇다고 저 냄새 나는 놈들을 먹어 치울 생각도 없어.”
[……?]
연화는 남궁이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사냥감이 있다. 너도 검이라면 소임을 다해라. 처자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안 그래?”
콰앙-!!
남궁이 악귀검의 손잡이를 있는 힘껏 밟았다.
“무명(武名).”
검 안에 잠든, 가장 위대한 야차 일족의 이름 없는 최강자.
“당신을 가지러 온 거지.”
산산조각 나버린 검의 잔해가 바닥에 튕겨 오르며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