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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108/270)

108화

[무…… 무명?]

연화는 남궁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달그락…… 달그락…….

솨아아악---!!!

하지만 놀람도 잠시,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부서진 검의 잔해들이 파르르 떨리더니 새하얀 빛과 함께 하나의 영령이 나타났다.

‘과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검묘는 선대 수장들의 무구가 잠들어 있는 곳이었고, 그 무구 안에는 그들의 영혼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악귀검】은 무명의 것이었다.

당연히 검 안에 무명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수백 마리의 악귀들이 봉인 되어 있는 검을 부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미친놈이군.]

잔해 속에서 나타난 무명의 영혼이 남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령이…… 말을 하다니.]

연화는 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 역시 사자(死者)임은 마찬가지였지만 그와는 결이 달랐다.

오래된 영혼일수록 생전의 의지는 옅어진다.

무량의 아들인 무명은 일족의 수장 중 두 번째로 오래된 수장이었다.

자신과 그의 세월의 간극만 해도 아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머지 수장들의 영혼은 의지가 아닌 생전의 기억에 따른 본능적인 보호 능력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대답이 없으니 강제로라도 꺼내야지. 안 그래?”

놀라는 그녀와 달리 남궁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일단 저것들부터 정리하지. 무명, 힘을 보태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검을 부순 건 네놈이다. 알아서 죽으려는 놈을 왜 내가 살려줘야 하는지 모르겠군.]

“더 강한 놈들과 싸우고 싶지 않나?”

[……뭐?]

“만악귀 쿠노칸.”

그때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놈은 카니발의 일곱 번째 보스다. 그 말은 놈이 살아 있고, 싫어도 만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남궁이 마물의 이름을 말하자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심드렁했던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가 결국 잡지 못한 마지막 사냥감 말이다.”

야차 일족과 악귀의 싸움은 수세기를 걸친 오래된 전쟁이었다. 그리고 일족을 나선 무명은 평생을 바쳐 악귀들을 사냥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끝맺음을 하지 못했지.”

남궁은 무명을 바라봤다.

“나라면 죽어서도 찝찝할 것 같은데…… 어때? 기회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전의 네 술법까지 익힌 자가 나타났다.”

그는 다시 한번 뻗은 손을 까닥하고 흔들었다.

“이거야말로 너를 담을 완벽한 그릇 아닌가? 네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나보다 더 네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설령 야차 일족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

“내 손을 잡지 않는다면 바보지.”

[지금 네가 내게 기회를 주는 거라 말하는 거냐? 어처구니가 없군. 말은 바로 해야지. 저 악귀들에게서 네가 살아남을 수나 있을 것 같나?]

하지만 무명은 남궁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이제 보니 실력보다 혀가 더 대단한 놈이로군.]

“그래서 싫은가? 싫으면 말고.”

촤르륵…….

남궁은 손목에 감겨 있는 사슬을 풀었다.

[우(无)의 사슬? 이놈 보게. 정말 별걸 다 가지고 있군. 아서라. 인간이 감당할 물건이 아니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슬은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고, 무명은 그것을 본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아무리 초짜라도 알고 있을 텐데. 그 사슬의 힘이 모두 소진된 상태라는 걸 말이야. 그걸론 저 악귀들을 이길 수 없다.]

“알아.”

[……알아?]

“그래도 어쩌겠어. 네 말대로 저 악귀들은 내가 불러낸 것이고, 저놈들을 처리하지 않고선 검묘를 빠져나갈 수 없을 테니.”

카릉-

남궁은 사슬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싸워야지.”

[키에에에엑---!!!!!]

악귀의 영혼들이 엉켜 붙어 거대한 괴물의 형상이 되었다.

[조심하세요!!]

연화의 외침이 들리고, 남궁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손바닥을 피했다.

부우우웅……!! 콰앙!!!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악귀의 손이 사당의 기둥을 산산조각 내며 부서뜨렸다.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

100마리가 넘는 악귀들의 영혼이 모인 괴물은 거인족보다 더 거대했다.

[너, 죽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검묘에서 죽으면 영혼도 빠져나가지 못한다며? 천년만년 다 같이 이곳에 갇혀 있어보자고.”

남궁은 악귀를 향해 뛰어들었다.

[머, 멈춰……!!]

그 모습에 무명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퍼억!!!!

악귀의 주먹이 남궁을 강타했다.

[저런 미친!!!]

둔탁한 소리에 무명이 황급히 몸을 날렸다.

[……?!!]

하지만 그 순간, 튕겨 나간 줄 알았던 남궁이 사슬로 악귀의 주먹을 묶어 매달려 있었다.

화르르륵……!!!!

두르고 있던 코트가 펄럭이자 코트에서 불꽃이 일며, 움켜잡고 있는 악귀의 주먹을 타고 놈의 전신을 뒤덮었다.

[캬아아아악!!!]

악귀는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질렀다.

매달려 있는 남궁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욱더 강하게 사슬을 잡아당겼다.

[크륵…… 크륵…….]

규류가 만든 코트에서 발화한 화염에 악귀는 몸을 부르르 떨며 힘을 쓰지 못했다.

[악귀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요.]

연화는 몸부림을 치는 악귀를 보며 놀란 눈빛으로 남궁을 바라봤다.

[저건 기린의 숨결이 담긴 화염이다. 쉽게 내어줄 물건이 아닌데…… 꽤나 일족이 신경을 쓰는 놈인가 보군.]

우드득……!!!

남궁이 사슬을 감은 손에 힘을 주자 화염에 탄 악귀의 팔이 그대로 뜯겨 나갔다.

철푸덕!! 쿵!!!!

잘려 나간 팔목과 함께 바닥에 착지한 남궁은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아내며 악귀를 바라봤다.

[크르르르…….]

생각지 못한 일격에 놈은 당혹스러운 듯 거리를 벌리며 남궁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설마…… 그가 정말로 저 괴물을 잡는 건 아닐까요?]

연화의 목소리엔 놀라움과 함께 희미한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100년이 넘는 시간을 지냈다 하지만, 검의 봉인을 위해 희생되었던 시절 그녀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어쩌면 누구보다 검묘 밖의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그녀일지 몰랐다.

[헛소리. 기대하지 마라. 실망도 큰 법이니까. 기린의 숨결은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긴 하다만, 그 정도 힘으로 악귀를 잡을 수 있었다면 진즉에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있는 괴물은 평범한 악귀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악귀의 집합체.

무명은 그런 괴물을 고작 인간이 이길 리 없다 확신했다.

퍼억……!!!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남궁을 보호하던 코트의 숨결이 사라지자 악귀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쾅! 콰가가가각……!!!

놈의 일격에 남궁의 몸이 수 미터를 튕겨 날아갔다.

“……쿨럭!!”

바닥에 쓸려 간신히 멈춘 남궁이 걸쭉한 피를 토해냈다. 코트에 남아 있는 회복 효과가 아니었다면 그 일격만으로도 전신의 뼈가 으스러졌을 것이다.

“더럽게 아프군. 이거…… 마왕보다 더 대단한 놈일지 모르겠는데. 진짜 죽을 수도 있겠어.”

남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슬쩍 무명이 있는 쪽에 눈을 흘겼다.

[흥.]

무명은 그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선대시여. 저는 밖을 보고 싶어요.]

그때였다.

지금껏 무명의 눈치를 보던 연화가 입을 열었다.

[……뭐?]

[기대를 하지 말라 하셨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100년 만에 찾아온 기회입니다. 그의 말대로 천재일우의 기회지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선대께서는 평생을 유랑하셨다지만…… 저는 평생을 갇혀 살았습니다. 부디 저를 가여워 여기시어 그를 도와주실 순 없으십니까.]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인간의 놀음에 놀아나자는 뜻이더냐!!]

[그럼 좀 어떻습니까.]

[……뭐?]

[때로는 눈을 감고 속아 넘어가주셔도 좋지 않습니까.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살리는 일입니다.]

콰아아앙……!!!

그 순간, 요란한 폭음과 함께 남궁의 몸이 다시 한번 튕겨 올랐다.

[그리고 숙원을 끝내는 일이기도 하지요. 어째서 선대께서는 일족을 떠나셨음에도 평생을 악귀 사냥에 바치셨나이까.]

연화는 말했다.

[일족을 위해서? 글쎄요. 저는 평생 가족보다 당신을 오래 보았습니다. 적어도 선대께서 악귀를 사냥한 건…… 그런 선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쓸데없는 소리 마라.]

[캬아아악……!!!!]

악귀의 주먹이 남궁을 향해 떨어졌다.

[오랜 야차와 악귀의 전쟁을 종결하시옵소서.]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지막 악귀를 잡고 영웅이 되어 일족의 역사에 당신의 이름을 올리십시오. 이름 없는 왕이시여.]

쿵……!!

그 순간, 굉음이 들렸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놈의 일격은 너무나도 조용히 가로막혔다.

[어린것들이 쌍으로 건방지게…… 놀아나는 건 아무래도 나 혼자로군.]

까득…… 까드드득…….

악귀가 힘을 주었다.

무명에게 잡힌 팔이 부르르 떨렸다.

[…….]

우드득……!!

무명이 악귀의 팔목을 비틀었다.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뒤틀린 팔은 그대로 떨어져 나갔고, 팔이 뜯긴 어깨 주위로 검은 연기가 세어 나왔다.

[너 같은 미친놈은 평생 처음이다. 힘을 얻으려고 목숨을 내놓다니.]

“덕분에 성공했잖아. 그럼 됐지.”

[빌어먹을 놈.]

무명은 곤죽이 되는 남궁을 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퍼억!!!

“……컥!!!”

그가 쓰러져 있던 남궁의 가슴을 신경질적으로 짓밟았다.

[힘을 빌려주마.]

남궁을 내려다보던 무명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 영혼의 흡수 Lv5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무명의 영체가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 강력한 영력이 소실된 칭호의 힘을 복원합니다.

▶ 칭호 : 영령 군주

남궁은 밀려오는 강렬한 힘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600만 명이 넘는 영혼들을 흡수 했을 때 얻을 수 있었던 최상급 칭호가 무명이란 단 한 명의 야차를 통해 다시금 되살아났으니 말이다.

‘엄청나구나…….’

남궁은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25년간의 카니발에서 살아남았던 그조차 도달하지 못했던 곳.

무명의 영혼이 도대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진 것인지는 그 역시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은, 반대로 그를 얻게 된다면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 얻을 수 없었던 강함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잘 봐라. 애송아. 사슬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마. 아마 이건 지금 살아 있는 그 어떤 수장들도 알지 못할 테지.]

치직 치지지직……!!

[그 꼬마들은 기껏해야 기억의 전승으로 과거를 알 뿐이지. 본 것과 들은 것은 천지 차이. 이 몸은 우(无)의 시대를 살았노라.]

남궁의 손목에 감겨 있던 사슬에서 청색의 전격이 번뜩였다.

“……!!!”

그는 깨달았다.

고작 20년을 뛰어넘는 힘이 아니다.

천년(千年)을 뛰어넘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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