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우(无)가 어째서 네놈에게 그 사슬을 준 것인지는 모르겠…… 쩝, 아니지. 그 간악한 놈이라면 네 기억을 뒤져 나와의 연을 찾은 걸지도 모르지.]
남궁은 무명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지금껏 오래되고 낡아 거무튀튀했던 사슬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새하얗게 정화되었기 때문이다.
[놈은 태초부터 존재했고 수많은 카니발을 봐온 존재다. 지금의 위상도 우(无)에 비한다면 꼬마에 불과하지.]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사슬은 카릉거리며 서로 부딪치면서 울음을 울었다.
[너도 들었을 것이다. 놈은 순리를 숭배하는 위상과 반대인 자. 그가 대리자 일족을 만든 것 역시 그 때문이지. 위상이 하는 일을 비틀기 위해 말이야.]
무명이 말했다.
[카니발의 참가자를 도와 위상들이 예상치 못하는 변곡(變曲)을 일으키는 것.]
촤르르륵……!!
사슬이 움직였다.
[지금껏 수많은 카니발이 있었지만 사슬을 가진 자는 없었다. 그가 기다린 자는 그야말로 위상의 계획에 반(反)하는 자. 카니발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을 자였을 테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황 속에 어느 누가 신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그런데 더 우스운 건…… 바로 그 우의 사슬을 가진 녀석이 위상의 계시자이기도 하다는 거지. 도대체 네 녀석은 어찌 되어먹은 놈이냐.]
남궁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나도 몰라. 위상이든 우(无)든 둘 다 나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크큭, 재수 없는 잘난 척.]
화르르륵……!!!
[하지만 네놈의 과거를 읽으니 조금은 이해되는군. 그리고 나 역시 말이야.]
사슬이 악귀를 향해 날아갔다.
퍼억……!!!!
놀랍게도 사슬이 악귀의 머리를 단박에 꿰뚫어 버렸다. 두부를 터뜨리는 것처럼 일격에 악귀의 머리가 날아갔다.
[네게 관심이 생겼다.]
“…….”
산전수전 다 겪었던 남궁이었지만 그조차도 말도 안 되는 사슬의 위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하군.”
[놀리긴 이르지. 사슬의 힘은 고작 이런 게 아니다. 이건 기껏해야 사슬을 조금 깨운 것뿐.]
“이게 고작이라고? 네가 평생을 쫓아 사냥한 악귀들이 모여 된 괴물인데.”
[내 평생? 그딴 게 대수라고. 우는 태초의 존재다. 내 일생의 몇 배를 더해도 그가 존재한 세월이 더 많을 터.]
무명은 오히려 남궁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다. 사슬은 당분간 잊는 것이 좋을 게다.]
“어째서지?”
[네 작은 그릇으로 우(无)의 힘을 감당하는 게 가당키나 하겠느냐. 내 보호가 아니었으면 네 몸뚱이는 이미 산산조각 났을걸. 봐라.]
무명의 힘이 걷히자 사슬이 감겨 있던 오른팔이 시커멓게 변했다.
[사슬을 믿지 마라. 놈은 네가 죽길 바라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너를 받드는 존재가 아니니까. 놈은 너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
[우(无)는 위상들이 받드는 규율과는 정반대의 존재다. 그런 그를 어째서 위상들이 그냥 두겠느냐.]
무명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상조차 그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지.]
“얼마나 대단한지는 관심 없다. 내가 쓸 수 없는 것이라면 허울 좋은 쓰레기에 불과해.”
[급하긴…… 정녕 네가 우(无)의 힘을 제대로 쓰고 싶다면 조각을 모으거라.]
“조각?”
[우(无)가 세상에 뿌려놓은 파편들이다. 그것들을 얻는다면 너는 한 걸음 더 가까이 그의 힘에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다.]
“재밌군. 일전에 요르에게 우(无)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다. 하나 그는 잘 모른다고 하더군.”
[신도 영원한 것은 아니니까. 그들도 죽는다. 오랜 세월 동안 새로운 위상이 태어나고 빈자리를 물려받지.]
“신도 죽는다라…… 요 근래 들은 말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로군.”
[계시자가 할 말은 썩 아닌 것 같지만 나도 그 말이 썩 마음에 드는군.]
무명은 남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비를 죽인 나는 이름이 없다. 하나 이제 너를 통해 일족의 역사에 새로이 이름을 남길 것이다.]
“야차 일족은 강함을 숭배한다. 당신의 의지는 후대에 제대로 전해지고 있다.”
[흥, 그런 놈들이 내가 남긴 전언도 찾지 못해 엉뚱하게 인간이 배우게 만들어?]
무명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이내 곧 팔짱을 끼며 그를 바라봤다.
[아니면 네 녀석이 그놈들보다 더 절박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그의 말에 남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다음 문을 위해서 무구를 얻으러 온 건데…… 부숴 버려서 이제 어쩌지?”
[이제 와서 그게 걱정이냐. 멀쩡한 검을 제 손으로 부순 녀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도박을 해야 했거든.”
[무기야 다시 만들면 되죠.]
그때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연화가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렇게 좋은 재료를 찾았는걸요.]
그녀는 쓰러져 있던 악귀의 시체에서 뭔가를 꺼냈다. 시체 안에서 진득한 검은 기름이 흘러나오고, 그녀의 손에는 검붉은 심장이 들려 있었다.
어린 소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지만 남궁은 그것을 본 순간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넘버링 없음.
이름 : 108악귀의 검은 심장
등급 : 레전더리(최고)
▶ 야차 일족의 최강자, 무명이 평생을 바쳐 잡아들인 악귀들의 심장이 모여 만들어진 것.
▶ 108마리의 악귀의 특성이 모두 담겨 있다.
넘버링이 존재하지 않는 물건.
그 말은 위상들이 참가자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위상들의 예상을 벗어난 물건.
[그야말로 당신께 가장 어울리는 것이지 않을까요.]
연화는 그에게 말했다.
[독은 독으로. 악은 악으로 멸해야죠.]
“할 수 있겠어?”
[맡겨주세요.]
그녀는 눈을 빛냈다.
* * *
[야차 일족의 여식들이 손재주가 뛰어나긴 하지만 너 같은 꼬마가 무구를 다룰 줄 알다니 놀라운걸. 내가 없는 동안 일족도 많이 변했군.]
탕-!! 탕-!! 탕-!!!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구는 여전히 무구장이 만들지요. 다만, 저는 검묘에 오기 위해 아버님께서 특별히 통천루에 있는 술법서를 열람할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통천루?]
[역대 수장들의 술법서가 보관 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중 열네 번째 수장인 만획은 일족 중 최고의 권사이자 무구장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만병지법】을 익혔습니다.]
[호오…….]
무명은 자신보다 거대한 망치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담금질을 하는 그녀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그래. 그 만획이란 자의 무기가 내 검보다 대단했더냐.]
[네. 만획 님의 장갑뿐이겠습니까. 역대 수장들의 무구 중 어떤 걸 내어놓아도 악귀검보다 나을 겁니다.]
[…….]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연화의 말에 무명은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만큼 사용자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뜻이겠죠. 볼품없는 무구로 누구도 할 수 없는 위업을 달성 하셨으니까요.]
[흠, 뭐…… 보는 눈은 있구나.]
그의 반응에 연화는 씨익 웃으며 쥐고 있던 무구를 사당의 연못에 집어넣었다.
치이이익……!!!
시커먼 연기와 함께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완성되었습니다.]
소름 돋는 소리와 달리 그녀가 들고 나온 것은 깨끗한 은빛이 도는 검날의 검이었다.
넘버링 없음.
이름 : 계명검.
등급 : 에픽(봉인)
▶ 108마리의 죽은 악귀들을 녹여 만든 검.
▶ 지독한 사령의 힘이 담겨 있다.
▶ 평범한 자라면 검을 잡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빼앗길 수 있으므로 주의.
▶ 사령술의 효과를 증폭시킨다.
▶ 악귀왕을 사냥 시 등급의 봉인이 해제되며 새로운 효과를 획득할 수 있다.
우우우웅…….
남궁이 검을 쥐자 검날이 가볍게 떨렸다.
[계명(戒名). 죽은 자들의 이름을 뜻합니다. 하나 악귀들은 이름이 없죠. 그러니 죽음으로 다시 이 검에서 태어나, 남궁 님께서 가시는 길 한쪽에 새로운 이름을 새길 수 있길 바랍니다.]
[흥, 악귀 따위에게 이름이라니. 가당치도 않는 일이로군.]
누구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무명이었기에, 자신도 하지 못한 일을 악귀들이 한다니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봤자 그들은 계명이란 이름으로 검으로서 남을 뿐이지요. 하나, 선대께서는 이제 진짜 이름을 남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않겠느냐.]
연화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족쇄는 남궁 님께서 악귀검을 부수는 순간 끊어졌습니다. 저는 검묘를 떠나 일족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두 분의 여정을 따라갈 만큼 대단찮은 영혼이지요.]
“아쉬운걸. 내 주위에도 무구나 도구를 만드는 자들이 있다. 네 도움이 있다면 전력이 보강될 텐데.”
[일족의 계약자이시지요. 도움을 주는 것은 규류 한 명으로 족합니다. 너무 많은 걸 가지시려 하지 마십시오. 미운털이 박힐 수 있으니까요.]
남궁은 피식 웃었다.
“규류보다 눈치가 빠르군.”
[그 아이보다 조금 더 오래 살았으니까요.]
연화를 데리고 갈 수 있다면 확실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계약자라 하더라도 일족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닌 일족원을 부리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자칫 위상들에게 괜한 빌미를 주는 것일 수 있었다.
‘대리자 일족 역시 자신들만의 경합을 벌이고 있는 중이니까.’
혹여나 팔각전쟁에 위상들이 개입하게 될 경우 전쟁의 판도는 또다시 뒤집어질 수 있었다.
연화는 남궁의 한마디에 몇 수 앞의 일을 얘기한 것이었다.
“탐이 나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별수 없지.”
[걱정 마십시오. 야차계에 오신다면 언제든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조언을 구하지.”
남궁은 그녀의 말에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 계명검의 효과로 사령술 등급이 상승됩니다.
▶ 상승된 효과는 계명검의 파괴 시 사라집니다.
▶ 적용하시겠습니까?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검의 악귀들이 당신에게 흡수됩니다.
▶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 사령술(중급) → (중상급)
▶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 영혼 지대 Lv1
오랜만에 보는 알림창에 남궁은 꽤나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검으로 사령술의 등급까지 올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괜찮은걸.”
그는 새롭게 얻은 검이 마음에 드는 듯 연화에게 말했다.
[하지만 주의하세요. 검이 부서지면 지금 얻게 되는 능력들은 단숨에 사라질 겁니다.]
“반대로 악귀왕까지 잡는다면 지금보다 더 높은 효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
[위험보다는 목표를 생각하시는 분이시군요.]
“그렇지 않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어.”
화르르륵……!!
그 순간, 남궁의 발아래 검붉은 물결 같은 것이 일어나더니 원형의 영역이 펼쳐지며 연화와 무명이 서 있는 자리까지 타올랐다.
[……오?]
연화는 밀려들어 오는 힘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10번째 문이 열릴 때쯤에나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앞당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연화와 무명은 자신에게 밀려들어 오는 남궁의 힘을 느꼈다.
《영혼 지대 Lv1》
주위의 우호적인 영혼 계열의 존재들의 힘을 강화시키며 적대적 존재들을 구속한다.
이해도가 높을수록 강화와 구속의 힘이 강력해진다.
▶ 관련된 칭호가 있을 시 효과가 증가한다.
▶ 칭호 : 영령 군주를 확인하였습니다.
▶ 영혼 지대의 능력이 대폭 상승됩니다.
▶ 영혼 지대 Lv1 → Lv3
▶ 레벨 조건을 충족하여 새로운 효과가 해금됩니다.
▶ 군단 소환을 발견하였습니다.
“……!!”
남궁은 생각지 못한 알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군단 소환 Lv1》
영혼 지대 내에 시체가 있을 시 시체의 수와 동수의 스켈레톤을 소환할 수 있게 된다.
“이거라면…….”
남궁은 새로이 얻은 스킬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만신전(萬神殿)을 뒤집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