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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10/270)

110화

[여…… 연화야.]

검묘의 문이 열리고 궁으로 돌아 왔을 때 무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남궁과 함께 온 그녀를 바라봤다.

[뭐야, 진짜 우리에게 누이가 있었어?]

[그러게…….]

[히힛, 나도 누이가 생긴 건가? 칙칙한 동생 말고 이렇게 귀여운 누이가 생겼다니!]

규류는 무휘가 끌어안아 들고 있는 작은 소녀를 보며 히죽 웃었다.

[얼마 차이도 안 나면서 형 노릇은…… 그리고 속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우리보다 더 높은 위계라면서. 야차 일족에게 형제란 결국 경쟁자에 불과한 거 잊었어?]

그런 그를 보며 현류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생. 세상을 그렇게 꼬아서만 보지 마라. 형제가 한 명 더 생기는데 왜 싫어해야 할 일이냐.]

하지만 오히려 규류는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형제끼리의 경쟁은 그저 작은 다툼에 불과해. 진짜 경쟁은 나머지 일족들과의 팔각전쟁이지. 너도 느꼈을 텐데. 누이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그래서 말한 거야. 조심하는 게 좋을걸. 겨우 쌓아 올린 자리를 빼앗기기 싫으면.]

[클클, 빼앗기면 또 어때. 야차가 팔각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면 말야.]

[속없긴.]

[참고로 이 몸은 거인족의 왕이기도 하니 설령 자리를 빼앗겨도 비빌 곳이 있긴 하거든. 아, 넌 어쩌지?]

[아 씨, 저 인간이…….]

[인간이 아니고 야찬데?]

현류는 유치한 놀림에 주먹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무휘와 함께 연화를 얼싸 안으며 기뻐하는 그를 보며 현류는 쥐었던 손을 풀었다.

[바보 같아도 그릇이 다르긴 다른 건가.]

어쩐지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를 보며, 현류는 연화의 등장에 경계부터 한 자신의 모습에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릇이 작기 때문만은 아니지. 너같이 생각하는 게 틀린 건 아냐. 오히려 합리적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

[언제부터 내 편을 들어주기로 한 거지?]

“딱히 네 편을 든 것도 아냐. 너 같은 자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 저 바보 같은 녀석만 잔뜩 있다면 절대로 팔각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테니까.”

[당신에게 듣는 칭찬은 묘하게 기분 나쁘다니까.]

“그렇지. 아주 좋은 반응이야.”

[……흥.]

현류는 남궁의 말에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자리를 뜨려 했다.

“이형의 왕은 되지 못해도 일족의 왕 자리는 줄 수 있는데…… 아직 욕심 있나?”

[당신은 정말로 규류가 왕좌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말이 안 나오는군. 저 녀석이 대리자 일족의 왕이 될 상이라니…….]

“물론 네 도움이 없다면 힘들겠지. 녀석의 그릇을 논하기 전에 야차 일족의 승리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는 건 어때.”

[그래 봤자 내가 얻는 건 결국 규류 녀석의 뒤나 닦는 자리겠지.]

“싫으면 말고. 꽤나 탐날 자리라고 생각해서 말해본 것뿐이지 꼭 네가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다.”

[나가 일족의 문제로군.]

남궁은 현류의 대답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말았다.

[귀찮은 일은 내게 다 시키고 당신과 규류는 알맹이만 빼먹겠다?]

“글쎄. 네게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닐걸. 나가 일족의 보구를 얻을 수 있는 기회니까.”

[내가 그런 전리품에 목숨을 걸 것 같나? 나가 여왕은 대리자 일족 중에서도 가장 껄끄러운 상대야.]

“그렇기 때문에 네게 부탁하는 거지. 설마…… 겁을 먹은 건 아니겠지.”

[겁을 먹어?]

“그렇지 않다면 다녀와라. 야차 일족 중 나가 여왕의 보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일 테니, 그녀의 보물은 네 것이 될 거다.”

[사람이 아니라 야차다.]

“…….”

[뭐 그렇다고.]

현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를 떴다.

[규류. 나가 일족은 내가 맡는다. 일족의 병사들을 좀 쓰겠어. 상관없지?]

[잉? 갑자기 왜?]

[그렇게 됐다.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테니 알아서 날뛰든지 마음대로 해라.]

현류는 그렇게 말하며 남궁을 힐끔 바라봤다.

“사람이 아니라 야차라…….”

조금 전 규류가 했던 시답잖은 농담같이 들렸지만, 남궁은 그의 뜻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과연 저 녀석도 야차는 야챠로군. 겁쟁이란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겠지.”

남궁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꽤나 그럴싸한 눈을 가졌군. 저 녀석은 아직 좀 더 성장할 여력이 보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무명의 목소리에 남궁은 속내로 대답했다.

[그나저나 남궁, 자네에게 일족이 큰 도움을 받았군…… 검묘의 봉인이 풀렸다는 건 선대의 영령들이 자유로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딸과의 재회 후 무휘는 남궁의 앞에 섰다.

[그에 합당한 보답을 해야 할 터인데…… 무엇이 필요한가.]

“딱히 없다. 좋은 검을 얻었으니까.”

남궁은 무휘에게 【계명검】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게 그 검이로군. 과연…… 연화에게 들었네. 그것이 108마리의 악귀의 힘을 녹여 만든 검이라고?]

무휘는 남궁의 검을 살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하구나. 선대인 무명께서 108마리의 악귀를 봉인 한 건 일족의 자랑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강력한 악귀의 힘을 어찌 할 수 없어 오랜 세월 검묘를 통해 그것을 지켜왔었지.]

우우우웅…….

검이 그의 말에 반응하듯 떨렸다.

[일족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자네가 하다니. 내 목숨과 더불어 일족의 족쇄마저 끊어줬으니 보상을 받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거절하는 남궁을 말린 건 오히려 무휘였다.

[맞습니다. 원하시면 통천루를 한 번 더 개방할 수도 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버님.]

[물론. 이건 계약자로서가 아닌 입은 은혜에 대한 보상이니까. 규율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며 합당한 일이야. 그래, 통천루의 술법이라도 가져가겠나?]

[됐다고 해라. 내 비기를 익힌 녀석이 무슨…… 나머지 허접한 것들을 익혀봤자 손만 더러워지지.]

그 순간 무명이 남궁에게 말했다.

“…….”

남궁은 무휘를 바라봤다.

그에게는 선명하게 무명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무휘를 보니 나머지 일족들에겐 그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괜찮다. 술법은 이미 충분히 익혔으니까. 딱히 더 배울 것은 없어.”

[그렇다면 무구는? 방어구와 검은 있으니…… 장신구 같은 건 어때.]

“야차 일족의 장신구를 어디다 쓰라고. 괜찮으니 마음만 받지. 나중에 필요하면 연화의 손이나 좀 빌리겠어. 다른 건 몰라도 그녀가 만들어준 검이 썩 마음에 들거든.”

[흐음……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

무휘는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돌아가는 건가?]

“그래야지. 무기도 얻었고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다음 문이 열리기 전까지 준비할 것도 있고.”

[무운을 빌지. 야차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게. 자네는 더 이상 계약자가 아닌 은인이니까.]

“그 말이면 충분하군.”

남궁은 자신을 향해 내민 무휘의 손을 잡고서 대답했다.

[잠깐.]

그때였다.

“……?”

[보상이 필요 없다면…… 내가 하나 가져가도 될까?]

야차계를 떠나기 직전, 무명이 그를 불렀다.

* * *

“이게 뭔데?”

[모주(母酒)다. 이게 아직도 남아 있다니. 낄낄, 후대 녀석들 중에 제대로 된 녀석이 없구만.]

“…….”

무명의 부탁으로 야차계에서 가져온 낡은 술병을 내려놓고서, 남궁은 침대에 앉아 그에게 물었다.

무휘조차 알지 못하는 낡은 터에 묻혀 있던 병을 남궁이 꺼내자 오히려 야차들이 놀라고 말았다.

[아버지께서 즐겨 드셨던 것이지. 어린 시절 창고에서 아버지 몰래 훔쳐 와 숨겨뒀었거든.]

무명의 존재를 알고 있는 연화만이 묘한 미소를 지었지만, 검묘를 떠나기 전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리지 말아달라는 무명의 언질에 그녀는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볼 뿐이었다.

[결국 마시지 못하고 떠나와 버렸으니…… 항상 기억에 남았거든. 보아하니 이제 이 술을 담글 수 있는 사람도 없는 모양이던데. 귀한 거다.]

“뭐, 그건 그렇다 쳐도…… 이거 마실 수 있는 건가?”

술병 안을 살핀 남궁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아직 남아 있잖냐.]

오랜 세월의 여파 때문이지 술 병 안의 술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와 함께 병 안에 들어 있는 액체는 진액처럼 검었다.

“으음…… 마시라는 거지?”

남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크크…… 기가 막힐 거다.]

무명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뭐, 죽기야 할까.”

남궁은 눈을 질끈 감으며 술병 안의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욱…….”

목을 타고 넘어가는 씁쓸한 느낌과 함께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운 식도에, 남궁은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켜잡았다.

[토하지 마라.]

그 순간, 무명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꿀꺽-

[크크, 맛이 어떠냐.]

그의 목젖이 움직이자 무명은 히죽 웃으며 즐겁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헉, 헉…… 이거 뭐야? 술이 아니고 독 아냐? 날 죽일 셈이지?”

하지만 남궁은 원망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시끄럽고,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운기나 해라. 내가 도와주마. 그래, 네게는 사령술이겠구나.]

그런 그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무명은 남궁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야차만큼 술을 좋아하는 일족도 없지. 하지만 그저 술독에 빠져 살아서 하는 소리가 아냐.]

그의 힘에 눌려 자리에 앉은 남궁이 가부좌를 틀고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뭐라 한마디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배 속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뜨거움이 그를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배 속에서 끌어오르는 힘이 천천히 남궁의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다.

“……!!”

그 순간, 남궁의 시야가 칠흑처럼 까맣게 변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던 것이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건…….”

펼친 손바닥에 살점과 근육들을 뚫고 혈관들 하나하나가 투시되어 보였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검은 기운이 선명하게 보였다.

▶ 오래된 술이 당신의 신체에 흡수됩니다.

▶ 술의 영향으로 영혼의 눈의 효과가 일순간 대폭 증가합니다.

▶ 혈맥(血脈)을 발견하였습니다.

▶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어떠냐.]

남궁의 반응에 무명은 기쁜 듯 웃었다.

[클클…… 자고로 술은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고 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의 신체 일부가 영구적으로 변화합니다.

▶ 혈맥술 - 강(强)을 습득하였습니다.

꾸득…… 꾸드득…….

그리고 남궁의 뼈마디가 마치 새로이 맞춰지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컥…….”

[그중에서도 야차가 담은 술은 최고지.]

무명은 바닥에 떨어진 술병을 잡았다.

[하지만 그 술 중에서도 나의 아버지, 무량의 술은 으뜸이라…….]

영체인 그가 술을 마실 수 있을 리 없지만 그는 술병을 들어 올리며 신이 난 듯 말했다.

[엘릭서보다 더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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