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헉…… 헉…….”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닥에 흥건할 정도로 땀을 쏟아 낸 남궁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토해냈다.
[일어났느냐.]
“…….”
남궁은 무명의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느껴지는 듯한 이질적인 기운에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갑다…….’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공기의 결이 느껴졌다.
감각이 비약적으로 증가됐다.
남궁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표정이 볼만하군. 그래, 통천루인가 뭔가 하는 곳에 쌓여 있는 쓰레기들보다야 훨씬 더 좋은 보상이지?]
무명은 다시 한번 그에게 물었다.
[클클, 무량의 술이 아직도 남아 있을 거라고는 위상들도 모를 거다.]
“이런 걸…… 내게 줘도 되는 거야?”
그제야 남궁은 굳은 얼굴로 그에게 대답했다.
[알게 뭐야. 내가 존재했던 시절의 반도 살지 않은 애송이들을 겁낼까 봐? 그리고 지들도 몰랐던 건데. 규율이고 나발이고 걸릴 게 없지.]
걱정스럽게 묻는 그와는 달리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무명의 반응에, 남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자, 앉아봐라.]
남궁은 그의 말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자고로 술은 열기를 품지. 야차들이 술을 좋아하는 이유가 몸 안의 열을 더욱 뿜어내기 위함이다. 그 이유는 술법을 익힌 너라면 잘 알 터.]
“야차의 술법은 일종의 기의 운용이니까. 몸 안의 열이 가해지면 그만큼 몸속의 혈류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기의 순환도 강해진다.”
[옳다. 과연 내 술법을 깨우친 자답다. 그렇다면 지금 네 몸의 변화는 무엇이냐.]
꽈악-
남궁은 주먹을 쥐었다.
“강(强)이란 말답게 사령의 힘이 흐르는 전신 혈맥의 강도가 단단해진 느낌이야.”
[그래서?]
솨아아악……!!
그가 손바닥을 위로 펼치자 자줏빛의 응어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뭉쳤다.
“사령술의 시전 속도가 빨라졌어.”
[제법이군. 하지만 혈맥술의 효과는 단순히 속도에 그치지 않는다. 통로가 단단해져 속도가 빨라진다는 건 그만큼 더 많은 사령의 힘을 밀어넣을 수 있다는 것.]
“더 높은 단계의 사령술을 쓸 수 있다는 건가?”
[그래. 아직 네가 쓰는 사령술은 영혼 병사를 불러내는 것뿐이라 체감이 되지 않겠지만 앞으로 더 많은 술법을 익히게 될 테니까.]
남궁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혈맥술 - 강(强)》
몸속 혈맥에 담겨 있는 이형의 기운을 깨우쳐 더 강한 힘을 담을 수 있도록 강화된 신체술.
[너는 이제 막 혈맥술의 초급을 익혔을 뿐이다. 이걸로 만족하지 마라.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 하였다. 네가 익힌 건 이제 겨우 강함의 단계일 뿐.]
마치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무명은 남궁을 다그쳤다.
[강함은 결국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하며 부드러움은 역시 유형의 것이니 무형을 이기지 못한다.]
“더 높은 단계가 있다는 뜻이로군.”
[그래. 그러니 절대로 자만하지 말고…….]
“오히려 더 좋아.”
[흠?]
“고작 이 정도가 무량이 남긴 유산이라면 오히려 실망스러웠을걸.”
[혈맥술을 익혀본 적도 없는 녀석이 또 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자만이 아냐. 나는 이 지옥에서 25년을 살았다. 비록 혈맥술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지금 이 힘이 통용되는 건 기껏해야 10번째 문 정도겠지.”
코웃음을 치는 무명을 보며 남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더 강해질 수 있다면 그만큼 더 많은 문을 닫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데.”
[클클…… 여튼 재밌는 녀석이야. 본디 인간은 처음부터 가장 강해지길 바라는데 말이지. 내가 그릇을 잘 고르긴 했어.]
무명은 남궁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듯 말했다.
“나 역시 그러하다. 누군가에게 배운다는 것이 썩 나쁜 기분이 아니거든. 솔직히 막막했어. 앞으로 싸워야 할 적들이 너무 많으니까.”
[세상 혼자 살 것 같은 녀석이 겁은…….]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이제 지켜야 할 존재들이 너무 많아졌거든.”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라. 그러다가 내 꼴이 날 거다.]
남궁은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의지할 사람이 정 없으면 내게 조금 의지하는 건 봐주마. 세상에 다시 나오게 해준 보답은 해야지.]
“바짓가랑이는 붙잡지 않도록 노력해 보지.”
[클클, 그래. 어차피 이제부터 혈맥술을 익히는 건 너 스스로의 몫이니까.]
무명은 턱을 괴며 고민을 하듯 말했다.
[다만…… 강의 단계는 말 그대로 혈맥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네 육체 자체가 강화돼야 하는데…… 이건 단순히 노력만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라 걱정되는군.]
“흐음…… 룬이라도 딱히 신체를 강화시켜 주는 건 아니라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 민첩이나 체력 같은 것이 아닌 좀 더 내부적인 문제니까. 아쉽군. 과거였다면 영약을 구하기도 쉬웠을 텐데.]
“영약?”
[만년설삼이라든지 천년버섯 같은 것 말이다. 아니면 고대 뱀의 보혈(寶血) 같은 것도 좋겠지.]
솨아아악···!!!
[크릉…….]
무명의 말에 용아가 튀어나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널 잡아먹을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
남궁은 뱀의 머리를 가볍게 툭 때리고는 웃었다.
[내가 살던 시절엔 꽤나 흔한 것이었는데…… 이곳의 탁한 공기만으로도 그런 것들이 자랄 생태계가 아닌 것 같고. 보따리엔 팔지 않겠지?]
“영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굳이 뽑자면 엘릭서가 전부일 것 같은데.”
무명은 그의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흥, 엘릭서 따위 기껏해야 연고 같은 것과 다름없지. 영약이라 불릴 수 있는 것들은 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내력을 가진 것이라…… 잘하면 누가 가져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누가?]
무명의 반문에 남궁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 봐.”
* * *
“형님,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훈련장에서 성우와 대련하던 명훈이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남궁을 불렀다.
“그래.”
지하 성채에서 올라오자 검은 세단 몇 대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덴 하울이 왔습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명훈인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했다.
“내려. 가뜩이나 좁은 골목길 복잡하게 하지 말고.”
긴장한 명훈과 달리 남궁은 차량의 창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철컥-
문이 열리고, 차 안에서 포마드로 머리를 정리하고 은테 안경을 낀 반듯한 모습의 남자가 웃으며 나타났다.
“요란하게도 왔군.”
“하하, 죄송합니다. 그래도 명색이 국빈이라…… 괜찮다고 해도 신경을 써주시네요.”
“가드가 아니라 짐짝일 텐데 잘도 데리고 왔어. 나 같았으면 당장에 버렸을 텐데.”
남궁의 말에 덴 하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감이 대단하시군요.”
“……?”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당당한 모습이 좋아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덴 하울과 함께 차량에서 내린 사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백악관 소속 담당 비서관, 밀러드 타일러라고 합니다. 현재는 덴 하울 님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이군.”
남궁은 자신의 눈빛에도 당당히 서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
“별 볼 일 없는 실력입니다. 웨스트 윙(West Wing) 구석에 의자 하나 두고 데스크를 보던 사람인걸요.”
‘웨스트 윙이라면 적어도 참모진에 발을 담고 있다는 건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지만 남궁은 그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짐작 할 수 있었다.
‘미 정부도 슬슬 움직일 모양인가 보군. 하긴, 유럽이 그런 일을 겪고 당분간 주춤할 테니…… 자신들의 차례라고 생각한 것이겠지.’
남궁은 슬쩍 밀러드를 바라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날 찾아온 이유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섭니다. 일전에 마왕의 가짜 머리를 만드는 대신 도움을 주시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생각보다 빠른걸. 너 정도 되는 인물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할 일이 뭐지?”
그 순간, 덴 하울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하기 전에 밀러드를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덴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던전 공략입니다.”
“그래.”
“……네?”
“해줄게.”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물은 것가 달리,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남궁의 모습에 덴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해준다고. 싫어?”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흔쾌히 수락을 해주실 줄은…….”
덴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자세한 건 가서 얘기하지. 하겠다고 했지 수락을 한 건 아니니까.”
“그게 무슨…….”
“비서는 너만 있는 게 아니거든. 거래엔 조율이 필요한 법이니까.”
남궁은 웃으며 덴이 타고 있던 차의 문을 열었다.
“아무나 한 명은 앞자리에 타라.”
그는 마치 자기 차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시트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청와대로.”
* * *
“던전 공략이라…….”
직무실 안은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총리께서도 아실 겁니다. 현재 4번째 문에서 소환된 마족들이 모두 섬멸된 후, 전 세계적으로 16개의 던전이 소환된 것 말입니다.”
“물론 알고 있소.”
“그 이전에도 던전들이 소환되긴 했지만 대부분은 마치 연습을 위한 것처럼 난이도가 낮은 것들뿐이었습니다.”
탈칵-
밀러드는 가방 안에서 패드를 꺼냈다.
“덕분에 사람들은 던전에서 실전 경험을 익힐 수 있었고, 이후 사상자의 수도 현격히 줄었습니다.”
지이이잉…….
그가 화면을 터치하자 지구본 모양의 홀로그램이 나타나며 각 지역에 붉은 표시가 나타났다.
“그래서 펜타곤에서는 시민들의 생존율을 위해 새로이 생성된 던전들을 공략하여 경험을 쌓도록 했습니다. 한데…….”
“실패했군요.”
총리의 말에 그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 맞습니다. 현재 미국 내 생성된 던전은 두 곳입니다. 그중에 하나인 오리건주의 던전을 저희가 공략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패드의 액정을 넘겼다.
그러자 화면에 알 수 없는 목록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구성 인원은 모두 50명. 그중엔 노움 일족의 계약자도 있었습니다”
“있었습니다……? 죽었다는 겁니까.”
그 순간 밀러드는 어두운 표정으로 끄덕였다.
“네. 생존자는 전무(全無). 노움 일족의 계약자인 리암 님도 사망했습니다.”
“허…….”
“50명 모두가요?”
“지금까지 던전은 연습용에 가까웠는데…… 던전에서 사망자가 생기다니.”
박효주는 그의 말에 놀란 듯 중얼거렸다.
“원래 연습 같은 건 없어. 초창기의 던전들도 계시자들이 먼저 클리어해서 몰랐을 뿐이지.”
남궁은 말했다.
“앞으로 더 위험하고 어려운 던전들이 계속해서 나올 거야.”
“더 많은 사상자들이 나올 거라는 얘기로군.”
총리를 비롯한 비서실장과 박효주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16개…….’
남궁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50명의 결사대로 공략할 수 있는 던전이 아닐 테지. 그곳은 앞으로 있을 만신전의 성물이 보관된 던전이니까.’
16개의 던전은 5번째 문을 열기 위한 열쇠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난이도였고.
‘전생에도 계시자들이 여러 번 공략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었다.’
그런 던전을 기껏 계약자로 구성된 공격대가 공략할 리 없었다.
하지만,
“흐음.”
그 던전을 가장 먼저 공략한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계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지 않아 경계받지 않았지만, 5번째 문을 기점으로 모두의 주목을 받았지.’
바로, 덴 하울이었다.
“그래서 미 정부는 남궁 님의 협조를 요청드리러 왔습니다. 덴 하울 님과 함께 던전 공략에 도움을 주실 수 없으실까요.”
“내가 왜?”
“……네?”
“던전에서 사람들이 죽은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던전이 아니더라도 요즘 같은 세상엔 어디든 죽어나가고 있지. 놀랄 일도 아냐.”
“그, 그건…….”
남궁은 덴 하울을 바라봤다.
“생존율을 위해서 던전을 공략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덴 하울. 나는 욕심이 많은 자는 용서해도 거짓을 말하는 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
그 순간 직무실을 가득 채우는 무거운 사령의 기운에, 안에 있던 사람들은 짓눌리는 듯한 압박을 느꼈다.
‘전보다…… 더 강해진 건가?’
‘그 짧은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숨 쉬어. 죽이지 않으니까.”
“…….”
남궁의 기세가 사라지자 덴 하울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봤다.
“덴 하울. 나는 네가 싫지 않다. 일전에 도움을 주었으니 너를 돕는 것이 상도겠지. 하지만 거래를 하려면 서로 제대로 터놓고 해야지 않겠어?”
“……퀘스트가 있습니다.”
“자, 잠시만!”
밀러드는 덴의 말에 당혹스러운 듯 소리쳤지만, 그의 표정을 본 순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기밀이고 뭐고 애초에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는 회귀자니까요.”
“회귀요? 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또…….”
“그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죠.”
덴은 의심 가득한 밀러드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었다.
“말해봐.”
“던전을 공략하라는 퀘스트입니다. 위상께서 직접 내리셨습니다.”
“위상이 내린 퀘스트라…….”
남궁은 살짝 눈을 흘겼다.
‘전설급 퀘스트.’
그러고는 ‘역시나’라는 생각을 했다.
절대로 공략할 수 없는 16개의 던전을 공략하면서 만신전의 포문을 열었던 덴 하울.
‘전생엔 알렉 트라만과 함께 던전을 공략했었지.’
미래가 바뀐 만큼, 그가 이번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었다.
‘아무래도 덴을 선택한 사계절의 방랑자의 생각은 그때와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군.’
그가 바로 덴 하울이었다.
‘잘됐어. 그렇다면 나야 좋지.’
“솔직하게 말해주니 좋잖아. 그래, 도와주마. 퀘스트에 필요하다면 던전 보스의 보상도 양보하지.”
“……정말입니까?”
“물론.”
덴은 기다렸다는 듯 남궁의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다른 걸 가져갈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