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솨아아악……!!!
던전 안으로 들어오자 차가운 냉기가 사람들의 전신을 때렸다.
▶ 설귀산에 입장하였습니다.
▶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 일정 이상의 체온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 지속적으로 생명력이 감소됩니다.
▶ 움직임이 제한됩니다.
▶ 모든 반응 속도가 평상시의 1/2로 줄어듭니다.
▶ 마법(영창)은 제외됩니다.
“윽……?!”
“몸이 무거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눈보라와 함께, 두 다리가 굳어지는 느낌에 경인과 성우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화르륵……!!!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주위로 작은 화구(火球)들이 나타났다.
“입고 있는 방한복이 찢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냉기가 들어가는 순간 급격하게 체온이 떨어져 반응 속도뿐만 아니라 체력도 감소하니까.”
덴 하울의 불꽃이 열기를 더하자 그제야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다.
“주위에 마물들이 있습니다.”
“2인 1조로 경계. 제가 덴 님을 보좌하겠습니다.”
5명의 대원들은 미리 합을 맞춘 듯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유지했다.
“실드 전개!!”
전방에 서 있는 남자가 바닥에 손을 얹으며 소리쳤다. 그러자 연녹색의 막이 일행의 주위를 감쌌다.
‘고블린 로드의 팔찌보다 방벽 색깔이 좀 더 짙다. 4등급 정도 되는 건가.’
적색지대가 공개된 이후 확실히 사람들의 무구들도 상향된 것이 분명했다.
“어떤 마물이 나오는지 모르니 천천히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계시자라도 저희 지시를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약간의 도발이 섞인 듯한 말투.
어쩐지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마찰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형님. 저 마크 말입니다. 이제 보니 펜타콘에서 이번에 새로 창설한 전력 팀인 것 같습니다.”
창환이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그의 말처럼 5명의 대원들의 가슴엔 똑같이 생긴 독수리 마크가 있었다,
“편할 대로. 던전을 공략해야 하는 건 그쪽들이니까.”
“그럼.”
남궁의 동의가 떨어지자 실드를 전개한 남자가 손가락을 앞으로 뻗으며 전진의 제스처를 취했다.
“……잠깐!!”
그때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경인이 다급히 외쳤다.
퍽-!!!!
실드를 뚫고 날아든 화살이 선두에 서 있던 대원의 머리를 정확히 꿰뚫어 버렸다.
파즈즈즉……·!!
주위를 감싸던 실드가 단박에 부서졌다.
털썩!
잠시 멈췄던 차가운 냉기가 다시 그들을 덮치고, 머리가 꿰뚫린 대원이 주르륵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쌓여 있던 눈이 붉게 변했지만 이내 쏟아지는 눈보라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시신을 순식간에 덮어버렸다.
“저기.”
창환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까드드득-
다른 사람들이 날아온 화살의 궤도를 읽기도 전, 이미 창환의 말에 경인은 반사적으로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퓻!!!!
빠른 속도로 날아간 화살이 저 멀리 언덕 위에 있는 바위 틈 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꽂혔다.
[……켁!!]
쇳소리 같은 걸걸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한 놈 더 있어요.”
“엄호해.”
“네.”
마물의 비명 소리와 함께 창환이 쏜살같이 튀어나갔고, 경인이 활을 당겼다.
“……!!”
남은 4명의 대원들은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뿐.
슉!!!
창환의 머리 위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는 능숙하게 허리를 숙여 그것을 피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캬륵! 캬륵!!!]
괴상한 외침과 함께 바위 안쪽에서 조잡한 활을 당기는 마물의 모습이 보였다.
기형적으로 기다란 팔과 다리.
아래로 튀어나온 상아처럼 굵은 어금니와 짙은 눈썹을 가진 마물은 혹한의 추위도 느껴지지 않는 듯, 주요 부위만을 가린 나뭇가지로 엮은 옷을 두르고 있었다.
‘아이스 트롤.’
던전 안의 마물의 정체를 확인한 남궁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하필 골라도 귀찮은 놈들이 있는 곳을 골랐군.’
[캬캭! 캭!!]
남궁을 본 순간 활을 쏘던 트롤들이 황급히 뭐라 소리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쯧.
그가 트롤을 귀찮은 존재라고 여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마물답지 않게 녀석들은 영악하다.
단순히 사냥감을 향해 돌진하는 맹수가 아니라, 녀석들은 거리를 잴 줄 알았다.
“나와.”
솨아아아악……!!
남궁의 명령이 떨어지자 도망치던 트롤들의 등 뒤에서 영혼 병사들이 소환되었다.
[케에에엑!!!]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영혼 병사들이 놈들의 등에 검을 찔러 넣었다.
카강……!!
한데 그 순간 푸른색의 트롤의 피부가 녹색으로 바뀌었다. 마치 단단한 뱀의 비늘처럼 변한 트롤의 피부가 영혼 병사들의 검을 튕겨냈다.
[카르륵……!!!]
트롤들은 비웃듯 커다란 이빨을 씰룩거리며 흩어졌다.
아니, 흩어지려 했다.
퍼억-!!
남궁이 검을 뽑아 도망치려던 트롤의 뒤통수에 신경질적으로 꽂았다.
[케에에엑!!!]
트롤의 비명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정수리에서부터 세로로 정확히 둘로 갈라졌다.
“…….”
끈적거리는 핏물이 【계명검】에 닿는 순간 묻은 핏물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 검의 악귀들이 피를 원합니다.
▶ 검의 예기가 한층 더 날카로워집니다.
남궁에게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날뛰려는 검을 움켜잡으며 도망친 나머지 트롤을 잡으러 고개를 돌렸다.
쩌적……! 쩌저적……·!!
하지만 그때, 트롤의 발아래에서 날카로운 얼음 가시들이 솟아났다.
[……켁!!]
발목에 가시가 박힌 트롤이 괴상한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퍽! 퍽!! 퍼퍼퍽!!!
그리고 얼음 가시들이 튀어나오며 녀석의 전신을 뒤덮었다.
“빌어먹을…… 넬슨이 한순간에 당했어!”
“초입부터 이런 놈들을 만나다니.”
2마리의 트롤이 모두 죽고 난 뒤에야 대원들은 죽은 동료의 시체를 찾을 수 있었다.
“괜찮을까요. 저 사람들.”
“…….”
창환은 시체를 수습하는 그들을 보며 남궁에게 물었다. 물음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남궁은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당신들은 돌아가는 게 좋겠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건 본인들이 더 잘 알 텐데. 당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던전이 아냐.”
“조금 전은 예상치 못한 습격으로 인한 것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왜 고집을 피우지? 당신들이 저 시체보다 월등하게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군.”
남궁은 그들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딱히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은 전투에 있어서 모두 전문적인 고등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훈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여기 있는 고삐리보다 반응도 느린 놈들이 무슨. 얘 아니었으면 너희는 다 골로 갔어.”
덴이 대원들의 말을 거들자 창환은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뭐?”
“너희들 목숨을 걱정하는 게 아냐. 너희들이 발목을 잡아 겪지 않아도 될 위험에 빠지기 싫어서 그런 거지.”
“저 새끼가……!”
“그만.”
창환의 도발에 대원 중 한 명이 이를 드러내며 그를 노려보자, 선임으로 보이는 자가 대원을 막아서며 덴을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희도 곤란합니다. 덴, 당신도 정부의 도움이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
그의 말에 순간 덴의 얼굴이 굳어졌다.
“믿어보시죠. 남궁 님.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 역시 대학교 일개 강사에 불과했습니다. 여전히 사냥에 있어서 부족한 실력입니다만, 저들은 기본이 다르죠.”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네?”
“계시자가 일반인보다 못하다? 널 뽑은 위상을 바보로 만드는 소리군.”
남궁의 차가운 대답에 덴 하울은 입을 다물었다.
“저들을 부추기는 건 오히려 네가 저들을 그냥 여기서 죽으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남궁은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고는 지나쳐 가며 말했다.
“왜 억지로 저들을 데려가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자기 깜냥도 모르고 날뛰는 놈이나, 능력이 있어도 목줄에 묶인 개처럼 눈치 보는 놈이나…….”
지나치던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둘 다 꼴 보기 싫으니까. 보기 싫은 사람이 먼저 떠나야지.”
“이봐!! 아무리 계시자라도 우리는 정부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고 온…… 컥!!!”
조금 전 창환의 도발에 발끈했던 대원이 남궁을 향해 소리쳤다.
“말이 많아. 시간 아깝게.”
하지만 그 순간, 영혼 병사들이 그를 짓눌렀다.
“크윽…….”
차가운 눈밭에 파묻힌 머리는 더 이상 이렇다 할 불만을 내뱉지 못했다.
‘기억나는군. 전생에 나 대신 이곳에 있었던 자는 알렉 트라만이었지.’
설귀산 공략 이후, 알렉 트라만은 한 가지 오명을 받게 되었다.
100명의 살인자.
‘당시엔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던전 공략을 할 수도 없었어. 가장 뛰어난 최정예 능력자들로 구성된 연합팀이 설귀산을 공략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셋.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자신들을 죽음에 몰아넣은 자가 알렉 트라만이라고 증언했다.
몰론 일렉은 그것을 부정했지만 덴은 그의 주장에 대해 침묵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고…… 쉬쉬했지만 알렉의 평판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야.’
물론, 그것이 알렉의 입지를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계기를 만들어준 것만은 틀림없다.
던전 공략을 할 수 있을 정도인 능력자들의 목숨은 당시 그 어떤 것보다 귀중했으니까.
“…….”
남궁은 대원들을 바라봤다.
“덴 하울. 네가 들고 있는 지팡이가 향해야 할 곳이 어딘지 잘 생각해. 네가 하려는 것이 자의든 타의든 그 지팡이가 날 향하면,”
남궁은 일어나 누르고 있던 대원의 머리를 지그시 밟았다.
“이거랑 똑같이 될 테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저쪽.”
남궁은 거대한 빙벽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스 트롤이 있다면 여긴 샬룸의 영역일 가능성이 높다.”
“샬룸……?”
“고대 트롤이야. 아이스 트롤 중 차가운 기후 때문에 노화가 늦어 지금까지 살아남은 고대 마물이지.”
그가 가리킨 빙벽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설산 정상에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저곳에 놈이 있다. 놈을 잡으면 끝이지.”
남궁은 덴에게 말했다.
“어때? 별로 어렵지 않은 계획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생각 있으면 따라와.”
“……덴!! 속지 마십시오! 저렇게 커다란 호수를 얼리려면 당신의 마력이 모두 고갈되고 말 겁니다!!”
“예정된 계획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콰아앙-!!
그때였다.
침묵을 지키던 덴이 눈을 질끈 감으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날카로운 바람이 일며 그들의 발아래 쌓여 있던 눈들이 솟구쳐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 남궁 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던전 공략이 우선입니다.”
“당신 미쳤소?”
“지금 그게 무슨……!!”
대원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덴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쾅! 쾅! 쾅! 쾅-!!!!
그리고 얼음덩이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돌아가십시오.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엉망이 된 주위에 대원들은 할 말을 잃은 듯, 덩그러니 서서 멍한 표정으로 사라져 가는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디까지 아시는 겁니까?”
“알긴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는데.”
남궁의 뒤를 따라 나선 덴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봤다.
“그냥 짐작일 뿐이지. 던전 공략이 목적은 아니라는 것과, 적어도 네가 이번 일을 계획하지 않았다는 것.”
“어째서죠?”
“대충 이번 일은 나를 노리고 벌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날 제대로 알지 못하는 놈이겠지.”
남궁은 덴을 바라봤다.
“넌 알잖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
“그리고 저놈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대충 이번 일을 계획 한 게 누군지도 예상이 가고.”
“누군데요?”
성우가 슬쩍 물었다.
“책상에 앉아 주둥이나 터는 놈들.”
덴은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설마요. 백악관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리 주도권을 잡고 싶어도 영국이 벌인 실수도 뻔히 봤으면서 아저씨를 공격하려고 했을까요?”
경인은 그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설령 아저씨를 잡으려고 했다 해도…… 저런 허접한 인원으로요? 반대로 당하면 모를까.”
“그럼!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저 마법사가 막지 않았으면, 대위님이 나설 것도 없이 먼저 내 손에 죽었어.”
창환이 경인의 말에 동조하며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겁니다.”
“뭐?”
“그게 위상이 내린 퀘스트였습니다. 남궁 님을 잡으라는 것도, 남궁 님과 함께 던전을 공략하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말이지?”
그 순간 덴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계시자 남궁으로 인해 대원들이 모두 죽는 것.”
“뭐? 그럼 저들은 자살부대란 말이야?”
그 말에, 창환이 덴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미친……! 네 말은 지금 신이란 새끼가 형님께 살인을 저지르도록 시켰다는 말이잖아!!”
“이유는?”
“형님!”
하지만 악을 지르는 그와 달리, 덴의 말에 남궁은 웃음을 터뜨렸다.
목표만 달랐지 결국 위상의 계획은 전생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상한다면 대비할 수도 있는 일.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위상이 말하길 신호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신호탄?”
덴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남궁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위상이 먼저 선수를 쳤군. 만신전의 제물로 날 선택하려고 한 모양이군.’
성물이 출몰하고 시작되는 쟁탈전은 결국 서로를 죽고 죽이는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성물이 탐나더라도 쉽사리 움직이긴 어려웠다.
그 와중에 사람들을 쉽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건 역시 명분.
[제 발로 던전에 들어와 놓고 죽음의 책임을 몰아세운다고? 수십만 명을 구한 일은 벌써 까먹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
이야기를 듣던 무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지. 하지만 그 비상식을 놈들은 가능케 할 수 있어.’
남궁은 생각으로 무명에게 대답했다.
‘놈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는 거니까.’
빠득-
그는 이를 갈았다.
“위상들이야 그렇다 쳐도…… 덴, 당신은 어째서 이 무모한 짓에 동참한 거죠?”
“아무리 정부가 시킨 일이라도 당신 같은 사람이 부당한 일을 하려 하다니…….”
“저 같은 사람이 뭡니까? 저도 남궁 님께 누명을 씌우려는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죠.”
경인과 성우의 말에 덴은 쓴웃음을 지었다.
“꿍꿍이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다. 하지만 던전 공략에 도움이 되는 전력이니까 따라오라고 한 것뿐.”
짐짓 냉랭해질 수 있었던 분위기에서 남궁이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그건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어쨌든 전생에도 설귀산을 공략했던 사람은 덴 하울이었으니까.
자신을 노린 계획을 들었음에도, 남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
덴은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 걸었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할머니께서.”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침묵 속에서 길을 걷던 덴이 고백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엘릭서로도 치매는 고칠 수 없답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잠깐…… 아저씨.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 목숨을, 당신 할머니의 치매를 치료하려고 사지로 내몰았단 말이에요?”
“이거 미친 거 아냐?”
그를 향해 세 사람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미쳤습니다. 그냥…… 남궁 님이라면 설령 그런 오명을 입어도 충분히 헤쳐 나가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강인한 분이시니까.”
“강인? 웃기는 소리군. 미국 정부는 자살 부대를 보내서 누명을 씌우려고 한 거라고.”
“그것도 모자라 퀘스트는 당신이 차지하려 했고 말이야.”
“당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어.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묵인한 것이니까.”
“……맞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보다 그의 멱살을 잡은 창환의 팔이 더욱 분노로 떨렸다.
“당신은 강하니까…… 제 욕심에 스스로를 속인 겁니다.”
“이……!!!!”
“됐어.”
하지만 치를 떠는 그들과 달리 남궁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엘릭서의 개수가 줄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 궁금했었다. 그걸 이 시점에서 누가 샀을지.”
“…….”
“다른 계시자들은 문을 클리어 할 때마다 얻은 헤드로 자신을 강화시키기 바빴는데, 묘하게 넌 발전이 없었던 이유를 알겠군.”
남궁은 덴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누가 그러더라. 엘릭서는 대단한 묘약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만능은 아니라고.”
남궁은 덴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엘릭서로 치료를 해도 이미 흘러간 육체의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가려진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 수도 없지.”
꽈악-
“……큭.”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덴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네 마음은 이해한다. 유일한 혈육인 조모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충분히 흔들릴 수 있어. 병을 치유하는 건 위상들에게 쉬운 일이겠지. 하지만.”
그보다 놈들이 더 잘하는 건 따로 있었다.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
계시자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낱 유흥거리로 써도 그들은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는 있는데…….”
남궁은 말했다.
“설령 정신이 돌아온다 한들 지금 네 모습을 보고 기뻐하실지는 모르겠군.”
“……저는 일개 대학 강사였습니다. 당신처럼 훈련을 받은 군인이 아니라고요!! 정부의 개? 되면 어떻습니까! 가족을…… 유일한 혈육을 지킬 수 있는데.”
덴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럼 해.”
“네?”
“하라고. 위상이 내린 퀘스트를 클리어해서 조모의 정신을 맑게 만드는 것이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해. 그런데 왜 고자질 하는 어린애처럼 내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얘기하는 거지?”
“그, 그건…….”
당혹스러워하는 덴의 얼굴을 남궁이 바라봤다.
“너도 잘못됐다는 걸 아니까.”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어깨를 잡은 손을 놓았다.
“그래도 위로 같은 건 없다. 훈련을 받아서, 군인이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게 아냐. 그렇지 않아도 가족을 지키는 마음이 더 강한 사람을 아니까.”
남궁은 자신의 아내를 떠올렸다.
“당신은…… 딸이 건강하니까 모르는 겁니다. 게다가 천재적인 자질까지 갖췄지 않습니까! 계시자로 뽑혀 마력을 가진 저보다 더 대단한 딸이 있으니…… 걱정이 없겠죠!”
그의 외침에 남궁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내가 모른다?”
움찔-
덴은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의 눈빛에 본능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똑바로 세상을 봐.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고 살던 집과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어. 그런데 네 삶이 불합리하다고?”
남궁은 벼려진 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웃기지 마. 애초에 고칠 수 없는 병이었어. 그걸 이제 고칠 수 있게 되었으니 욕심을 부리는 거지.”
“그, 그건…….”
“그렇게 억울하면 내게 지껄이지 말고 빌어먹을 위상에게 가서 따져.”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인간이 신에게 대항하다니요.”
“왜 못해?”
그의 목소리가 불어오는 눈보라 속에서 울렸다.
“난 그러려고 돌아온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