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진짤까?”
“뭐가?”
“덴 하울이 아저씨께 누명을 씌우려고 한 거.”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니 맞겠지.”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난 뒤 ,남궁과 덴은 냉랭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빙산을 걸어갔다.
“솔직히 말이 돼? 물론 가족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걸로 아저씨를 누명 씌우겠다는 게.”
“그게 진짜가 아니지.”
“그럼?”
얼굴을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성우는 두 사람을 힐끔 보고서 경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요한 건 덴 하울이 아니라 조금 전 같이 왔던 대원들이야. 덴의 말이 맞다면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온 거잖아.”
“으음…….”
성우는 살짝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상이 덴 하울에게 내건 조건은 굳이 따진다면 그를 이번 계획에 합류시키려는 곁가지에 불과해. 진짜는 대원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내놓도록 명령을 내린 배후가 누구냐는 거지.”
“뭐…… 그거야 아까 아저씨 말대로 정부 쪽이 아니겠어? 군인은 명령에 따라야 하고,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는 결국 위밖에 없잖아.”
성우는 손가락을 펼쳐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되기는 하는데……. 지금까지 함께 마물을 잘 막아왔잖아? 그런데 갑자기 아저씨를 타깃으로 삼는다고?”
“위상이 그만큼 엄청난 보상을 걸었을 수도 있지. 아저씨가 그랬잖아. 위상이란 놈들은 결코 인간의 편이 아니라고.”
“아무리 그래도…….”
경인은 두 사람을 힐끔 보며 말을 아꼈다.
“하여간 착해 빠져서는…… 위상도 위상이지만 가장 믿지 말아야 할 건 사람이라고.”
성우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에 문이 열렸을 때, 우리 학교에 고블린들이 떨어졌거든.”
“응?”
“교실에서 가장 먼저 도망친 게 누군지 알아?”
순간 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선생이야. 그것도 맨 앞에 앉아 있던 반장의 머리채를 잡아 복도에 던져 버리고 튀더라.”
“…….”
“뭐, 그 인간을 원망할 건 아냐. 선생뿐만 아니라 교실에 있던 애들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도망쳤거든.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친구랍시고 웃고 떠들던 애들이 자기 먼저 살겠다고 남을 밀어 넣는 꼴이…….”
성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볼만했지.”
“넌 그래서 그런 능력을 얻은 거야? 다른 사람들을 지켜주려고?”
“지키긴 개뿔…… 나도 똑같았어. 친구고 뭐고 내가 먼저 살려고 발버둥 쳤지. 내가 그 순간 생각했던 게 뭔지 알아?”
그는 말했다.
“좀 더 튼튼한 방패막이가 있음 좋겠다는 거였어. 그랬더니 이런 능력이 생기더라.”
“…….”
경인은 그의 대답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난 사람을 믿지 않아. 동전 하나에도 빵 한 조각에도 바뀌는 게 사람 마음이라고.”
“그러면 왜 아저씨를 따르는 거야?”
“내가 믿는 건 힘이니까.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강하잖아. 진짜 저 아저씨면 세상을 이따위로 만든 뭣 같은 신도 죽여 버릴 수 있을 것 같거든.”
성우는 걸음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 자리에 나도 있고 싶으니까.”
그의 대답에 경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믿지 마라……. 뭐, 지금 세상에서 틀린 말은 아니네.”
“됐어. 괜히 공감하려고 하지 마. 넌 너대로인 게 나으니까. 꼬인 건 나 혼자면 된다.”
경인의 반응에 성우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멈춰.”
그때였다.
뒤에서 따라오던 창환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굳어졌다.
철컥-
찰나의 속도로 총을 뽑은 그가 성우의 어깨 위로 총구를 걸치며 스코프에 눈을 가져갔다.
▶ 칭호 : 마안 사냥꾼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 육시(六視)의 은총 중 하나를 얻습니다.
창환의 머리 위로 둥근 룰렛이 나타났다.
1,000마리 마족의 눈을 정확히 꿰뚫은 사냥꾼에게 주어지는 칭호였다.
촤르르륵……!
철컥-!
리볼버의 탄창처럼 6개의 구멍이 있는 룰렛이 빠르게 회전하다 멈추자 그 안에서 탄환이 튀어나오며 그의 손에 떨어졌다.
▶ 마탄(魔彈)을 획득하였습니다.
창환이 빠르게 은색으로 빛나는 탄환을 총의 옆면에 밀어 넣었다. 놀랍게도 총알은 따로 탄창에 넣는 것이 아니라 마치 흡수되듯 총 안으로 스며들었다.
퉁-
묵직한 소리와 함께 창환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성우는 그의 총에서 떨림을 느끼며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힘을 믿는다는 것엔 나도 동감이다. 마족들이 인간을 유린하는 걸 보고 나도 마음이 바뀌었지.”
툴썩.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와 동시에 창환이 연속으로 몇 발을 더 쏘았다.
“이능의 힘이든 뭐든 이따위 세상을 만든 놈들에게 적어도 한 방이라도 먹이려면 강해져야 하니까.”
“하, 하하…… 맞습니다.”
성우는 어깨에서 뜨겁고 시큰거리는 열기와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창환은 대답 대신 남궁을 불렀다.
“덴.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덴이 눈을 감은 채 빠르게 감시 마법을 시전했다. 옅은 바람이 그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빙벽 위에 3마리씩 순회하고 있는 무리가 열다섯입니다.”
눈을 뜬 덴이 물었다.
“곧 녀석들이 눈치챌 겁니다. 왼쪽에 순회하고 있는 무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얼마 정도 걸리지?”
“속도로 봐서는…… 5분 안쪽. 저기까진 저격 가능합니다. 문제는 그다음 녀석들까지 거리가 가깝다는 거죠.”
“빙벽 뒤로 있는 호수 아래쪽엔 100마리가 넘는 숫자가 모여 있습니다. 으음…… 군락일까요?”
창환에 이어 덴이 대답했다.
“군락은 아닐 거야. 아이스 트롤들은 무리를 지어서 사는 놈들은 아니거든. 아마 냉기를 흡수하는 중일 가능성이 높아.”
“냉기를 흡수해요?”
“놈들의 특성 중에 피부를 얼음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거든. 아까 전에 기억나지?”
“영혼 병사들의 검을 튕겨 냈을 때 말이군요.”
“맞아.”
순간 에메랄드빛으로 변했던 트롤의 피부는 영혼 병사들의 검으로는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었다.
‘생각해 보니 영혼 병사들의 공격이 마물에게 막히는 시기가 온 모양이야. 슬슬 등급을 올려야겠어.’
남궁은 【계명검】의 효과가 사령술의 등급을 올려줄 때 병사들을 성장시켜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병사의 수도 늘리고 등급도 올리려면…… 슬슬 그자를 만날 때가 온 것일 수도 있겠군.’
그는 한 사람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영혼 병사들의 공격을 튕겨 낼 정도라면…… 잡는 게 쉽지 않겠네요.”
“녀석들의 얼음 비늘은 확실히 까다롭긴 하지만 공략하지 못할 정도는 아냐. 비늘이 발동되기엔 조건이 필요하거든.”
“그게 뭔가요?”
“위협을 느꼈을 때.”
남궁의 말에 창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서 저랑 경인이를 뽑은 이유를 알겠네요. 놈들이 알아채기 전에 죽이라는 거군요.”
“맞아.”
“그럼 저희들은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신호를 주시면 저기 세 놈부터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창환은 그렇게 말하고선 경인과 함께 지체 없이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격에 있어서 자리를 선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자.”
“네, 넵!”
처음 와본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익숙한 곳인 양 이미 주위의 구조물들을 파악하고서 몸을 숨기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빙벽 위에 있는 트롤은 그렇다 쳐도 호수 쪽에 있는 100여 마리의 트롤은 어떻게 하죠?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너희 둘은 호수로 바로 올라가. 그곳은 샬룸의 성역이야. 트롤들은 올라올 수 없을 거야.”
남궁은 산 정상에 있는 호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저씨는요?”
“트롤들을 정리하고 올라갈 거야.”
“……네?”
덴 하울은 그의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이곳엔 디버프가 걸려 있잖습니까.”
“내가 누군지 잊었어? 30만이나 되는 마족이랑도 혼자서 싸웠어. 고작 100마리 좀 넘는 트롤이 대수라고.”
“물론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던전의 난이도가 다르니까요.”
“그러니까 샬룸이나 붙잡고 있어. 밑으로 기어나오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안 그래?”
“자, 잠시만……!!”
덴 하울의 외침에도 남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빙벽을 타고 오르며 창환과 경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저희도 가죠?”
“걱정되지 않습니까? 단신으로 마물 무리 안으로 들어간다는데…….”
성우가 피식 웃었다.
“걱정이요? 걱정은 우리가 해야죠. 개미가 코끼리 걱정을 왜 합니까?”
그는 아이스 트롤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쟤네는…… 사마귀 정도 되려나.”
슉! 슈슉!!!!
그 순간 창환과 경인의 탄환과 화살이 빙벽 위에 있는 아이스 트롤의 머리에 꽂혔다.
“그래도 명색이 계시자니까…… 버프 좀 받으면 잘 싸울 수 있죠?”
“응?”
“난 죽기 싫으니까.”
성우가 덴의 등을 떠밀었다.
“……!!”
그 순간, 덴은 자신의 몸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기운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싸우라고요. 응?”
쩌적……! 쩌저저적……!!
▶ 중급 군신화의 효과를 얻었습니다.
▶ 모든 신체 능력이 강화됩니다.
▶ 자질 : 대마법사의 혈통이 군신화로 인해 효과가 증폭됩니다.
밀려들어 오는 엄청난 마력에 덴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우우우웅……!!
그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지팡이 위로 마법진이 연달아 생성되었다.
‘어린애가 이런 능력을……?’
3개가 한계였던 다중 마법진을 순식간에 5개나 성공시킨 덴은 스스로도 놀란 듯 성우를 바라봤다.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내가 위험하게 되면 전신화로 준 힘을 거둬들일 거니까. 그렇게 되면 얻은 힘만큼 도로 피해를 입으니까 좋다고 마력을 남발하다가는 골로 간다고요.”
성우는 자신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
“아저씨가 형이랑 나랑 붙여놓은 이유를 모르겠어요? 목줄을 채워 놓으라는 거지. 믿음보다 확실한 건 족쇄거든.”
“…….”
덴은 그의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네 말이 맞다. 신뢰가 없는데 주제넘는 생각을 했어. 깨진 믿음은 결과로 보여줘야겠지.”
“뭐, 둘 사이에 믿음이 원래 있었나 모르겠지만요.”
덴은 낮게 숨을 고르며 저격당한 빙벽 위의 시체들을 향해 달려오는 트롤에게로 지팡이를 겨누었다.
그의 머리 위로 생성된 다섯 발의 얼음 가시.
던전 안을 채운 냉기 때문일까.
아니면 군신화 때문일까.
덴은 자신의 얼음 가시가 평상시보다 몇 배나 더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솨아아악---!!!
눈동자 위로 황금색의 십자가가 나타났다 사라지자, 그의 얼음 가시들이 육안으로는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갔다.
“가자.”
덴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먼 거리의 있는 트롤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 성우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몸을 띄웠다.
“오옷?”
성우는 서서히 떠오르는 자신의 발을 보며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
“내가 싫어도 군신화를 끄진 말아라. 그랬다가는 떨어져서 곤죽이 될 테니까.”
덴이 쓴웃음을 지으며 호수를 향해 날아갔다.
[캭-!! 캭캭--!!!]
어느새 빙벽 위를 순찰하던 트롤들이 동료의 시체를 확인한 듯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욱-!!
그 순간, 빙벽 아래에서 튀어나온 남궁이 트롤의 뒷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흠.”
빙벽 위에 선 그는 호수로 날아가는 덴을 살피고는 품 안에서 조명탄을 꺼냈다.
치이이익……!!!
뚜껑을 제거하고서 조명탄을 바닥에 긁자 붉은 불꽃이 매섭게 일었다.
[카륵? 카르르르륵!!!]
[캬가가각!!!]
조명탄의 불꽃은 호수 아래에 있던 아이스 트롤들의 눈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놈들은 덴과 성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불꽃에 빨려들 것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슬슬 시작해볼까.”
남궁은 조명탄을 대충 바닥에 던지고서 주위를 훑었다.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샬룸을 사냥하는 것이 맞다. 놈은 아이스 트롤의 수장이자 던전의 보스니까.
하지만 남궁이 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전생에도 이랬다. 그때는 타깃이 내가 아니라 알렉 트라만이었지만……. 만신전을 계획했던 8명의 위상 중 하나가 전설급 퀘스트를 발동시켜 계시자 중 한 명을 소거(消去)하려 했었지.’
그 계획을 세운 위상은 사계절의 방랑자.
덴 하울의 위상이었다.
남궁은 덴 하울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사계절의 방랑자가 전생과 똑같은 짓을 벌이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단순히 경쟁자인 계시자를 줄이기 위해서 사계절의 방랑자가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남궁은 설귀산을 공략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 던전으로 인해 덴 하울이 얻었던 보상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아이스 트롤의 호수 뒤편에 숨겨져 있는 보물.’
얼음 심장.
고대 트롤인 샬룸에게 영생에 가까운 삶을 준 보물은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그야말로 영약 중의 영약이라 할 수 있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