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들어와. 생각이 많은 얼굴이로군.”
성채의 문을 연 남궁이 알렉 트라만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누가 보면 죽으러 온 줄 알겠어.”
“시끄러.”
알렉은 굳은 얼굴로 남궁을 따라 성채의 지하로 걸어 내려왔다.
“정말…… 알렉 트라만이 형님께 검술을 가르치러 온 걸까요?”
“모르지. 하지만…… 확실히 그의 검술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긴 해.”
이미 여의도에서 붙어본 적이 있는 명훈으로서는, 우습지만 알렉 트라만의 등장에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봐. 난 너 가르칠 생각 없어. 내 검술은 피가 이어진 자만 배울 수 있는 거다. 내 가문도 아닌 놈에게 미쳤다고 검술을 알려줘?”
“…….”
명훈의 표정을 읽은 듯 알렉이 그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아오, 저 싸가지…….”
호준이 그의 말에 입을 씰룩였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기대했던 명훈은 오히려 그의 한마디에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짓더니 밀려오는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호준아, 가자. 훈련하러.”
“네? 저도요?”
눈치 없이 되묻는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창환이 그를 밀었다.
“마셔.”
탁-
그 옆으로 자리를 피하는 세 사람을 지나친 남궁이 알렉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지하 벙커를 만들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런 곳의 위치를 내게 알려준 이유가 뭐지? 장소가 노출되면 위험할 텐데.”
알렉은 남궁이 내어준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손을 대지 않은 채 물었다.
“문 앞에 토템 봤지? 웬만한 놈들은 한 방에 통구이가 될 텐데.”
“상대가 계시자라면?”
“그럼 더욱더 오지 않겠지. 토템이 있다는 건 내 영역이라는 뜻이니까.”
남궁의 대답에 알렉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가 건넨 차를 그제야 들이켰다.
“언제 봐도 오만한 인간이야. 계시자들이 당신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모르는 소리지. 만신전이 시작되자마자 에이라 미쉘이 계시자들에게 연락을 돌렸어.”
“흐음, 그래?”
“당신이 내게 시키려 했던 것. 처음엔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고 생각했는데, 그게 만신전의 제물이었다니…… 정말로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였어.”
“딱히 네게 거짓말을 할 필욘 없으니까.”
“죽으라는 소리를 잘도 쉽게 하는군…….”
알렉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 때문에 희생당했던 런던 사람들이 떠올랐는지 뒷말을 삼켰다.
5번째 문이 시작되면서 계시자들에겐 새로운 정보들이 주입되었다.
“힘을 합치자더군. 솔직히 다른 계시자들도 혹하는 모양이야. 가장 꺼려하는 상대를 처리할 수 있는 기회.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공동의 적이라…… 과연 성녀다워. 머리가 잘 돌아간다니까.”
“태평하게 할 소리야? 에이라 미쉘은 이미 진웨이와 니나가와 에리카와 접선했다. 만약 나까지 가세하게 된다면 당신은 계시자 4명을 상대해야 한다고.”
알렉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미카엘과 록산느가 우호적이라고 해도 당신을 위해 싸워줄 것 같아? 그들은 자기 나라의 일만으로도 벅찰걸.”
“그렇겠지.”
“쉽게 볼 일이 아니라고.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그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어.”
“그럼 네가 도와주면 되겠네.”
“……미친. 내가 당신과 편을 먹을 것 같아? 나보고 죽으라고 한 인간과 뭐가 좋다고.”
“못 할 건 또 뭐야. 언론에 이미 우리가 같은 편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도 냈었는데.”
“당신과 편먹을 생각 없어. 단지 경고해 주러 온 것뿐이야. 이제 곧 계시자들의 습격이 있을 거다.”
알렉은 능글맞게 자신을 대하는 남궁의 태도에 입술을 씰룩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오늘 밤 에이라 미쉘이 록산느와 접선할 거다.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두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거야.”
“참고하지.”
“……그리고 이건 다시 돌려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감당할 물건이 아냐.”
그는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환선굴에 있던 성물을 빼앗겼다. 니나가와 에리카를 따르는 가츠마타가 훔쳤다더군.”
“비월? 그녀는 정말로 에이라 미쉘과 손을 잡은 모양이군. 여의도에서 내게 물을 먹일 때만 해도 둘이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알렉은 코웃음을 쳤다.
“또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야?”
“그거야 너도 마찬가지잖아.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하던 사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야.”
“그냥 이걸 전해주러 온 것뿐이다.”
알렉은 할 말을 마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가지 물어도 될까. 생각해 보니 저번에 대답을 듣지 못해서 말이야.”
“……뭘?”
“인정하기 싫어도 성물의 힘과 위상의 신전은 앞으로 있을 카니발에서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렇겠지.”
“그리고 한 명만 신전을 소환하는 것보단, 제물을 바치고 나머지 신전까지 모두 여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테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 말은 한 명은 죽어야 한다는 거지. 너는 지금도 나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인가? 아니면 너도 공공의 적을 만들 생각인가.”
남궁이 그를 바라봤다.
“나는 누굴 죽일 생각은 없다.”
“그럼? 네가 제물이 되겠다는 뜻이야?”
“…….”
알렉은 남궁의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냐.”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남궁은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집만 있어서는…….”
남궁은 알렉이 남기고 간 상자를 들어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저자는 누구지? 제법 정갈한 기운이 나쁘진 않지만…… 저래서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지.]
그가 떠나자 무명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래도 강하지. 저 녀석이 해와 달의 관망자가 뽑은 계시자거든.”
[……계시자?]
그 순간 무명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남궁에게 되물었다.
“왜?”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그의 반응에 오히려 남궁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알 수 없겠지만, 나와 같은 대리자 일족의 영령들은 계시자를 판별할 수 있다. 위상에게 뽑힌 자들에게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냄새 말이다.]
솨아악……!!
무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그것을 성흔(聖痕)이라고 부른다. 낙인과도 같아서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것이거든.]
“그래? 편리한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계시자가 누군지 다 알게 되는데.”
처음 들어보는 얘기에 남궁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옷깃을 킁킁거렸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무명은 조금 전 떠난 알렉이 있던 곳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녀석에게 성흔의 향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의미지?”
[무슨 의미긴. 내가 없는 시절 동안 성흔을 감추는 능력이라도 생긴 게 아닌 이상…….]
그는 말했다.
[위상의 힘을 잃었다는 뜻이지.]
“말도 안 돼. 알렉 트라만이 더 이상 계시자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이야? 녀석은 누구보다 위상에게 충성하는 놈이라고.”
[저 녀석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위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
무명은 고개를 저었다.
[위상 중에 착한 놈이 있던가?]
“…….”
[어쩌면 저 녀석…….]
남궁은 그가 할 뒷말을 불안한 눈빛으로 기다렸다.
[위상에게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 * *
-각국이 성물로 인해 혼란스러운 지금, 영국에 설립 예정이었던 세계 연합인 네스트의 창설이 잠정적으로 중단되며 더욱더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영국 의회는 피해를 입은 런던의 복구를 우선시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케임브리지에서 성물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거센 폭동이 일어나 피해는 계속 가중 되는 상황입니다.
-혼란이 쉽게 잡히지 않을 듯싶습니다만…… 분명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는 건 확실합니다.
핏-
“보는 바와 같네. 네스트 창설의 진척은 없고 성물의 등장으로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지.”
총리는 연일 이어지는 기자회견과 청문회에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나마 이렇게 회의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3번째 문이 열렸을 때 일어난 마물 습격으로 피해를 입은 국가들 중엔, 시민들의 폭동으로 정부 자체가 무너진 곳도 있으니까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네스트 창설을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국내에 아직 찾지 못한 능력자들도 발굴해야 하고요.”
비서실장과 박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EU에서 협조 공문이 왔네.”
“협조 공문이요?”
“유럽 연합(EU)과의 관계 개선이 목적이라고 하더군. 영국에서 먼저 네스트를 창설하려고 했던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세계 연합을 대한민국에 설립, 이에 따른 필요비용 일체를 EU에서 지원하겠다고 하네.”
“줏대 없이 붙더니 손절도 빠르군요. EU를 탈퇴한 영국이 네스트 설립 관련 기자회견을 할 때만 하더라도 함께 엮이려고 굽실거리더니 말입니다.”
남궁은 총리의 말에 냉소를 지었다.
“그들이야말로 쓸데없는 불화만 만드는 것 같은데…… 관계 개선? 웃긴 소리죠. 우리가 목숨 걸고 싸울 때 뭘 했는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세계가 혼란스러워도 정치는 해야 하니까. 그들이 경계하는 건 마물의 공습이 아닐걸세. 싫든 좋든 알렉 트라만이 있으니까.”
“우리가 유럽이 아닌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다른 계시자들이 있는 나라와 협약을 맺는 게 두려운 거겠죠.”
“맞네. 속 편한 소리지. 세상이 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아직도 내 편, 네 편을 나누고 있으니…….”
총리는 남궁의 눈빛을 읽은 듯 날 선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도 알 텐데요. 저희가 네스트를 건립한다고 해도 자신들이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걸요.”
그는 말했다.
“조건이 뭡니까?”
“성물의 위치일세. EU에서 일곱 뱀의 성물의 위치를 제공하겠다고 하더군.”
“그들이요?”
남궁은 눈을 흘겼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함정이었다.
‘다른 성물도 아닌 일곱 뱀의 성물을 계시자도 아닌 자들이 알고 있다…… 웃기는 소리지.’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에, 순간 직무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어디라고 합니까?”
함정이라면 이제 해야 할 일은 하나. 누가 이런 함정을 판 것이냐다.
“남궁 님께서 자리를 비운 동안 EU에서 핫라인을 통해 비공식으로 보내온 정보입니다.”
비서실장이 서류 하나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시리아?”
남궁이 서류에 동봉된 지도를 보더니 물었다.
“여기는 지금 무정부상태이지 않습니까. EU가 어떻게 확인을 한 겁니까?”
“자네 말대로 전 세계 침공이 있었던 3번째 문이 열렸을 때, 시리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의 인접 국가들이 모두 큰 피해를 입었지.”
총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혼란 상태의 중동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세력이 있네. 아마도 자네도 알 거야.”
“설마…… ISR을 말하는 겁니까.”
“맞네.”
남궁은 총리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잊을 리가 없었다.
과거 남궁이 711부대에 있었던 시절, 마지막으로 수행했던 임무가 바로 그들과 연관된 작전이었으니까.
이슬람 부흥 단체(Islamic State Revival).
중동에서 활약했던 극진무장세력.
“과거 IS의 명맥을 잇는 자들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건 핑계일 뿐.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에 열광한 미치광이들일 뿐이죠.”
남궁은 떠올리기 싫다는 듯 바득- 이를 갈았다.
“놈들이라면 분명 섬멸됐을 텐데요.”
과거 711부대의 마지막 작전이자 유례없는 대규모 합동 작전, ‘프로젝트 임펄스(Imperse)’.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결과적으로는 ISR의 수장이었던 압델 시야프를 사살할 수 있었다.
“세력은 언제든 부활하는 법이니까. 특히나 무정부상태인 중동의 상황 때문에 중동의 재건이라는 명분까지 들고 일어섰으니 말일세.”
“중동의 재건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오히려 시민들이 반대하고 난리일 텐데요. 놈들 때문에 죽은 희생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시잖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런데 그때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서 말일세.”
“……다른 양상이요?”
총리는 남궁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는 모양이야.”
남궁은 어이가 없었다.
과거 자신들이 힘겹게 해냈던 일이 마치 수포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일 겁니다. 마물의 습격, 그리고 그것을 막지 못해 무너진 정부. 시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힘이 필요하니까요.”
“EU의 얘기로는 일곱 뱀의 성물을 ISR이 입수한 상태라고 합니다.”
남궁은 박효주의 말에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 미치광이들이 설마 내 추종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마도……?”
“그런데도 성물을 가지고 있다면 답은 하나겠지.”
박효주는 어쩐지 대답을 하면서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불안한 기운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뒈지고 싶으면 뭔들 못하겠어.”
남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