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어디로 갈까요? 차로 이집트까지 가는 건 힘들 것 같은데요.”
“다마스커스. 일단 수도로 가지. 거기서 이동책을 찾을 거야.”
“괜찮을까요? 이미 도시 대부분을 ISR이 점령하고 있을 텐데…… 진입도 진입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박효주의 얼굴에 공포는 전혀 없었다.
남궁의 말처럼 수만이 넘는 마족들과의 전쟁을 경험한 그녀에게 테러범이라든지 범죄자 같은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너무 평범한 문제였다.
“다이스(Dice)라고 들어봤어?”
“알다마다요. 전설적인 정보상을 아닙니까.”
“맞아.”
“정보원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인물이죠. 국정원에서도 몇 번 접촉을 하려고 했었는데 실패했거든요.”
박효주는 놀란 얼굴로 남궁을 바라봤다.
“설마…… 아시는 겁니까?”
“그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만들어놓은 둥지 중 하나가 거기에 있거든. 거기에 가면 연락을 취할 수 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핸들을 꽉 움켜잡았다.
“자…… 잠깐!!!!”
그때였다.
가옥에 있던 무스타파가 두 사람을 향해 황급히 달려왔다.
철컥- 철컥-
차량의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이미 잠겨 있어 열리지 않자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남궁을 바라봤다.
“저도 같이 데려가 주십시오!! 여긴 너무 위험하다고요!! 언제 ISR이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볼일은 끝난 것 같은데? 죽은 아비를 들먹이면서 접근한 이유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는 녀석을 뭘 믿고 차에 태우지?”
“그, 그건…….”
하지만 남궁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급하면 순간 이동이라도 하든가. 한국에서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왔는데 혼자서 돌아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겠지.”
무스타파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못합니다.”
“뭐?”
“못한다고요. 제 능력은 아까 보셨겠지만 거미를 부리는 겁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죠.”
그의 말에 남궁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우릴 여기로 이동시킨 건?”
“두루마리를 쓴 겁니다. 카니발의 물품 중 하나죠. 능력이 뛰어날수록 당신들을 속이기 쉬울 거라고 그랬거든요. 아버지는 저 같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주술사였으니까요.”
“키만 얀이 시켰나?”
“…….”
무스타파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쓸데없는 헤드만 낭비했군. 고작 그런 눈속임으로 환심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그딴 걸 몇 개나 쓴다 해도 너는 바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알고 있습니다.”
탈칵-
그리고 차의 문이 열렸다.
“내가 말하는 건 주술의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네?”
“진실함의 문제지. 바겐은 ISR을 처단하기 위해 우리에게 정보를 주었다.”
“그 덕분에 황금가지에서 직위를 박탈당하셨죠. 아버지께서 당신들을 돕고 얻은 것이라곤 배신자란 불명예뿐입니다.”
“그래서?”
“그, 그래서라뇨.”
오히려 당당하게 되묻는 남궁의 물음에 무스타파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그런 불명예까지 얻으면서 아버지가 우리를 도운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나?”
“…….”
“분명 말했을 텐데. 진실함에 있어서라고.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아버지의 불명예를 벗기기 위함이 아니라 황금가지에 붙어 있고 싶어서 이런 짓을 한 거라고.”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모른다.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남궁은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황금가지가 어떤 놈들인지는 보여줄 수 있겠지.”
그는 열린 차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타.”
* * *
“……뭐? 남궁이 당신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알겠어. 거기서 보도록 하지.”
전화를 끊은 알렉 트라만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그 인간은 무슨 생각인 거지? 내가 굳이 거기까지 가서 힌트를 줬는데도…….”
에이라 미쉘과 접선을 하던 순간, 그는 당연히 남궁의 개입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 사람의 거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그 이후 남궁이 지금까지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오히려 조급해지는 건 그였다.
“왜 그를 걱정하지? 남궁이 강하긴 해도 7명의 계시자를 모두 당해 내는 건 불가능해.”
걱정하는 알렉을 보며 한슨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의 편에 서기로 한 거냐.”
“그런 거 아냐. 한슨, 너는 내가 누구 밑에 들어갈 사람으로 보이나?”
“그게 아니라면? 왜 그를 도우려는 거지?”
“마지막으로 진짜 영웅 행세라도 해볼까 싶어서.”
“……뭐?”
알렉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개의 성물이 완성되면 위상의 힘을 받을 수 있는 성전을 소환할 수 있다. 그것이 계시자들에게 내려진 임무야.”
“흐음…… 그래서 모두가 성물을 완성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거잖아.”
“하지만 계시자들에겐 그것 이외에 또 하나의 임무가 있어. 바로 성물이 완성되었을 때 계시자 중 한 명을 제물로 바치면 나머지 6개의 성전을 모두 소환시킬 수 있다는 거야.”
“…….”
한슨은 그의 말에 대답을 아꼈다.
“에이라 미쉘이 어째서 계시자들을 돌아가며 만나려고 하는 것인지 이제야 알겠군. 그녀는…… 남궁을 제물로 삼으려고 하는 거지?”
“맞아.”
“흐음…… 솔직히 말해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잖아. 그는 과할 정도로 너무 강해.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 이참에…….”
“한슨. 네가 계시자라면 남궁을 제거하는 것과 계시자들 6명의 성전을 소환하는 것 중 뭐가 더 낫다고 생각해?”
“당연히 후자지. 남궁은 그야말로 규격외의 존재다. 그를 제외하고 나머지 계시자들이야 설령 모두가 성전을 소환하더라도 결국은 비등한 수준이니까.”
“그럼, 그 후자와 남궁이 살아남은 채로 6개의 성전을 소환할 수 있게 되는 것 중 인류에게 더 득이 되는 것은?”
“그, 그거야…….”
한슨은 알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록산느가 가지고 있는 일곱 뱀의 성물이 에이라에게 넘어간다면 남궁은 절대로 성전을 완성시키지 못할 거다. 그녀는 지금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지만…….”
알렉은 그런 그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남궁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 역시 계시자야. 위상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겠지.”
“그래서…… 지금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부디 내가 생각하는 말이 아니길 바라지.”
“만신전에서 우리의 몫은 록산느에게서 일곱 뱀의 성물을 손에 넣는 것이겠지.”
“제길…….”
한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쾅-!
그 순간 방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헛소리하지 마. 네가 말한 영웅 행세가 남궁에게 성물을 주고 스스로 제물이 되는 거야?”
알렉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들어오는 요한나를 바라봤다.
“아무런 말도 없이 어딜 갔다 왔나 했더니……. 혼자서 남궁을 만나러 가질 않나, 이제는 뭐? 제물이 되겠다고? 알렉. 넌 영웅이 될 그릇이 아냐. 주제에 맞게 살아.”
“내가 남궁의 편에 서길 원했던 거 아냐?”
“그랬지. 죽다 살아나니 알겠더라고. 뭐가 중요한지 말이야. 너나 다른 계시자들처럼 욕심을 채우려는 게 아니라 그는 적어도 살기 위해 싸우니까.”
요한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뭐, 나 역시 마찬가지긴 했지. 계시자 옆에 붙어 권력을 맛보려 했으니까.”
“그래서 이번엔 네 뜻을 따르려고 하는 거잖아.”
콰앙--!!!!
요한나가 그가 앉아 있던 책상을 내리쳤다.
“내 뜻? 네가 죽는 게 내 뜻이라는 말이야? 나는 남궁을 도우라고 했지 내가 가려는 미래에 당신이 없어도 된다고 한 적은 없어!”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신경질적으로 방을 나섰다.
“…….”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알렉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가 나간 방문을 바라봤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알렉, 너도 알고 있잖아. 오래전부터 요한나가 널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
반토막이 나버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며 한슨은 웃고 말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네 말도 안 되는 계획에 동참하지도 않았을 거야.”
“……영웅이 되는 것도 쉽지 않군.”
알렉은 그의 말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쉽지 않지. 그러니 쉬운 길을 가라. 그런 명언도 있잖냐.”
한슨은 전자동 휠체어를 움직이며 그에게 말했다.
“포기하면 쉽다…… 라.”
알렉은 그의 말을 씁쓸하게 곱씹었다.
* * *
“과연…… 포기할까요?”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박효주는 남궁에게서 알렉이 그를 찾아왔다는 얘기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 시점에서 인천공항은 폐쇄되어 있고 나머지 공항들도 모두 부대 배치가 끝난 상황인데……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하지만 이내 뒤에 앉아 잠들어 있는 무스타파를 보며 그런 의문은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포기? 안 할걸.”
“흐음…… 그럼 정말로 알렉 트라만이 일곱 뱀의 성물을 가지고 올 거란 말씀이신가요.”
“그렇지도 않아.”
“……네?”
박효주는 이도저도 아닌 남궁의 대답에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봤다.
“록산느에게서 성물을 빼앗아 올 수는 있겠지. 하지만 녀석은 절대로 제물이 되진 못할 거야. 알렉 트라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남궁은 피식 웃었다.
“위상이 카니발을 포기하는 것이 더 빠를지도.”
“그런데 왜 그에게 그런 말을 하신 겁니까? 괴롭히고 싶으신 거예요?”
“응.”
“…….”
조금 전 대답 때보다 더 일그러진 표정이 돈 박효주가 할 말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알렉 트라만은 몸만 큰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야. 순수하다 할 수도 있지만, 그 순수함에 비해 너무 큰 힘을 가지고 말았어.”
남궁은 시트에 몸을 좀 더 기대며 말했다.
“그 순수함이 자칫 삐뚤어진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되지.”
“그래서…… 그를 시험한 거란 말씀이신가요.”
“멋지게 죽는 결말이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영웅의 모습일 텐데 녀석의 작은 그릇으론 죽지도 못할 테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 아이가 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
“글쎄요?”
“어른에게 결정해 달라고 하지.”
남궁이 담담히 말했다.
“녀석은 내게 찾아올 거야. 일곱뱀의 성물을 내 앞에 가져와서 묻겠지. 이제 자신의 목숨을 결정해 달라고 말이야.”
“에이…… 아무리 그래도 자기 목숨을 남에게 맡긴다고요?”
“두고 보면 알겠지. 중간쯤 도착하면 깨워줘. 교대해 줄 테니까.”
“으음, 알겠습니다.”
팔짱을 끼며 눈을 감는 남궁을 보며 박효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알렉 트라만이 그의 말대로 성물을 가져온다면 우리 쪽에서는 절대로 손해 볼 일이 아냐.’
아니, 오히려 손해가 아니라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남궁을 제외한 나머지 계시자 중엔 솔직히 그가 가장 강했으니까.
“아니지.”
그 순간 박효주의 머릿속에 일전 남궁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알렉 트라만은 위상에게 버림받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었잖아. 그렇다면 계시자의 힘을 잃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약해진 그가 계시자들에게서 성물을 빼앗을 수 있기나 할까?’
“……어?”
그때였다.
“만약 그가 계시자의 힘을 잃었다면…… 계시자가 아니라는 소리잖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제물이 될 자격도 없어지는 건가?”
움찔-
‘설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든 오싹한 생각에 몸을 가볍게 떨었다.
부우우우웅-!!
언제 포탄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는 전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잠에 빠진 남궁을 바라보며, 그녀는 차의 속도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