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정말…… 이분이 그 유명한 다이스라고요?”
다마스커스에서 요르단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박효주는 신기한 듯 남궁과 함께 온 남자를 바라봤다.
“의뢰를 받으면 항상 주사위를 굴려서 자신보다 더 큰 숫자가 나와야 수락한다고 하던…….”
“……그런 거 안 합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네요.”
“아니면 죽이기 전에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숫자만큼 토막…….”
“풉? 너 사람들에게 그런 소문을 내고 다니냐. 못 본 사이에 이상한 짓만 골라 하고 있네.”
“아 씨, 아니거든?”
“아, 네……? 죄, 죄송합니다.”
박효주는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이상한 소문이 정착된 거야? 찾아오는 인간들마다 꼭 저 소리를 하더라. 분명 711 놈들이 퍼뜨린 게 분명해. 그 자식들을 그냥…….”
“그러게 별명을 잘 지었어야지.”
“잊었어? 그거 네가 붙인 거잖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을 때 말이야!”
“그런가?”
남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지만 주사인은 당장에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얼굴이었다.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었던 듯 박효주는 처음과 조금 다른 의미로 신기하게 두 사람을 바라봤다.
“본명은 주사인. 한국보다는 러시아 쪽에서 주로 활동하는 정보상이라고만 해두지. 뭐, 이쪽에선 유명하니 따로 설명할 필요 없을 것 같으니까.”
“주사인? 설마 그 별명…….”
“뭘 말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까 그냥 조용히 있어줄래요?”
박효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가지고 놀리긴…… 유치원생도 그딴 유치한 별명은 안 지을 거다. 차라리 주사기로 하지?”
“그건 호준이가 지었잖아.”
“머리에 근육밖에 들어 있지 않는 놈이나 네놈이나 수준이…….”
남궁은 주사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아무쪼록 영광입니다. 남궁 님 말씀대로 이쪽에서 당신을 모르면 간첩이니까요.”
“뭐, 저도 반갑습니다. 이런 난리통에 한국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주사인은 헛기침과 함께 분위기를 돌려 언제 그랬냐는 듯 진중한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이스가 한국인이란 것도 놀라운데 남궁 님과 일면식이 있다는 것은 더 놀랍네요. 도대체 발이 얼마나 넓으신 거죠?”
박효주는 남궁을 바라봤다.
“저 인간 발 별로 넓지 않습니다. 인간관계가 얼마나 좁은데. 뭐, 적이라면 수두룩하지만요.”
“이 녀석도 잠깐이지만 711 부대였다. 프로젝트 임펄스 이후 제대하고 독자 노선을 가긴 했지만.”
“711이요? 정말 정예들만 뽑힌 곳이 맞네요. 정부는 이런 분들을 어떻게 발굴한 건지…… 국정원 요원으로서 존경스럽네요.”
박효주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정부가 발굴하긴요. 저 인간을 보세요. 설마 정부가 저런 괴물을 다룰 수나 있겠어요?”
“네……?”
“711은 처음부터 711이었습니다. 정부가 오히려 711의 힘을 빌린 것뿐이지.”
부대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주사인에게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남궁의 한마디에 움직인 걸지도 몰랐다.
“뭐, 그래서 여러 곳에 미운털이 박힌 것이기도 하지만요. 711이 모이면 나라는 세울 순 없어도 나라 하나쯤은 지도에서 지울 수 있으니까.”
박효주는 그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옥문이 열리고 이능의 힘이 생겨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도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
“그거야 모르지. 김창환이 합류 했다면서? 그 녀석이 얼마나 부대에 목매달던 놈인데. 게다가 아직까지 쌍둥이 녀석들이 찾아오지 않은 게 용하다니까. 걔들까지 모이면 아주 축제겠어.”
“……골치 아픈 얘기 하지 마라. 그 녀석들은 부르지 않기로 약속했고 찾지도 않겠다고 맹세했으니까.”
“모르지. 세상이 이 모양인데.”
박효주는 두 사람이 말하는 쌍둥이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저…… 다 왔는데요.”
핸들을 잡고 있던 무스타파가 세 사람을 힐끔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6시간가량을 달려 도착한 곳은 요르단의 아카바.
“그들이 수에즈 운하를 통해서 남하했다면 아직 홍해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무스타파, 연락은 따로 없었나?”
“네…… 당초 여러분들을 키프로스로 안내하라는 명령만 받은 상태였어서…… 지금은 끊어진 상태입니다.”
아카바의 항구에 도착한 무스타파는 자신이 키만 얀에게 이용당한 것이라는 기분 나쁜 불안감이 이제야 현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구에 배를 숨겨놨다. 배의 장비로 위성 감시도 가능해서 잘하면 녀석들을 찾을 수도 있어.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뭔데?”
“녀석들을 찾아서 뭘 할 건데?”
주사인의 말에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있는 건 심증뿐이고 표면적으로는 이집트가 ISR의 위협을 받는 게 사실이니까. 키프로스로 안내한다고 해서 이상한 건 아니잖아.”
“모르지. 막상 가면 또 할 일이 생길지.”
“흠…….”
주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급히 항구에 숨겨놓은 배를 찾아 기기를 작동시켰다.
탁- 탁- 타탁-!
그가 능숙하게 기기들의 전원을 켜자 쾌속선 내부가 드러났다.
낡아 보이는 외부와 달리 내부는 알 수 없는 기계들로 빼곡하게 꾸며져 있었다.
부우우우우웅……!!!
엔진이 가동됨과 동시에 수십 개의 모니터가 일제히 켜졌고, 그가 키워드를 입력하자 레이더 상에 점들이 반짝였다.
“여기. 지금 운하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든 배들의 상태야. 중동과 아프리카 쪽의 보급선을 제외하면…….”
많았던 점들이 사라지고 레이더에는 하나의 점만이 남았다.
“어? 저게 움직이고 있다고? 언제 수리된 거지?”
“뭔데?”
“저거…… 최근 3번째 문이 열렸을 때 마물 공습을 받고 좌초되었던 화물선이야.”
남궁은 주사인의 말을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뭔가 냄새가 난다는 것을 느꼈다.
“사이즈는?”
“20만 톤이 넘는 초대형 선박.”
“만약에…… 저 안에 시체가 싣는다면 얼마나 많은 수를 실을 수 있을까?”
“어휴, 시체?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니고? 뭐……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고깃덩이 취급을 한다면 셀 수도 없겠지. 욱여넣으면 되니까.”
주사인은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남궁을 바라봤다.
딸꾹-
“아, 죄, 죄송합니다.”
박효주는 황급히 입을 가리고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이 무엇 때문인지 주사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네크로맨서…….”
무스타파는 멍한 표정으로 빛나는 점을 바라보며 말했다.
“키만 얀이 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했지?”
“어차피 황금가지의 영향력은 아프리카 전역에 닿아 있어. 이제 중동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목적은 두 곳이겠지. 하나는 유럽,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시아. 저 안에 녀석들이 타고 있다면 아덴만으로 향하는 선박이니 아시아일 가능성이 높아.”
“설마…… 다른 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말씀인가요?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이런 상황이니까 하는 거지.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고 죽은 사람을 마음대로 부려도 상관없는 세계가 되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시체를 다룬다고 해도 단독으로 이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야. 아시아엔 계시자만 3명이나 있잖아.”
주사인은 모니터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아시아 쪽에 거점을 둔 계시자라면…… 중국의 진웨이, 일본의 니나가와 에리카, 그리고…….”
박효주는 잠시 말을 삼켰다.
“그리고 아덴만을 통과하고 있는 거라면 에이라 미쉘도 포함될 수 있겠죠. 설마 또 그녀가 개입된 걸까요? 정말 지겹게도 엮이네요.”
“아직은 모르지. 그들 중에 몇 명이나 이번 일에 관여했는지. 어차피 끝까지 갈 동맹은 아니었어. 결국은 누군가는 죽어야 끝나는 일이니까.”
만신전은 그저 위상이 계시자들이 경쟁할 구실을 마련해 준 것일 뿐이었다.
“단순히 계시자들의 싸움이면 다행이지만 ISR이나 황금가지 같은 세력들이 움직인다면 우려되는 문제는 더 커.”
“어떤……?”
“세력을 넘어 국가의 개입. 저번에 설귀산에서 에이라 미쉘을 만났을 때, 그녀는 나를 포섭하고 덴 하울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어. 당시 그녀가 덴을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백악관 수뇌부들이 그녀의 조종을 받았기 때문이야.”
박효주는 그의 말에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이번 만신전에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은 일반인들이 휩쓸리게 될 거야.”
“…….”
그의 말에 박효주는 언젠가 자신이 남궁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물을 상대하는 것보다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것은 살인자가 되기 때문이니까.’
그녀는 남궁이 부디 그 마음을 간직하길 바라겠다고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 알 수 있었다.
위상은 결코 그 신념을 지킬 수 없도록, 세상을 만들어 버리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국가 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최악의 경우 유례없던 3차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지.”
“……네?”
주사인의 대답에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박효주와 무스타파는 침통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정말 위상들도 지독한 짓을 벌였군.”
“글쎄, 이걸 단순히 위상의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에이라 미쉘의 능력은 만능이 아냐. 모든 사람을 다 세뇌시킬 순 없어.”
“그 말은 누군가는 자의로 이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래. 그게 만신전의 진짜 무서운 점이지.”
부우우우웅……!!!
그들의 다급한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쾌속선이 전속력으로 파도를 가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찾았다.”
그리고, 쾌속선의 창문 밖으로 거대한 화물선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저건…….”
인위적으로 깔린 듯한 새하얀 안개 속에서 이끼가 잔뜩 낀 채 항해하고 있는 화물선은 마치 소설 속에나 나오는 유령선 같은 느낌이었다.
“이상한데. 조명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저 커다란 배를 움직이려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할 텐데.”
“확인해 보면 알겠지.”
남궁이 배의 문을 열고는 갑판 위에 올라서서 로프를 챙기기 시작했다.
“저도 돕겠습니다!”
박효주가 그 모습을 보고 반대쪽 로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 마라.”
“……네?”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짙은 사기(邪氣)를 뿜어대는 화물선을 바라보며, 남궁은 담담한 목소리로 박효주에게 말했다.
“그 전에 내 손에 죽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