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남궁이…… 성물 회의를 개최한다고?”
“그래. 이건 생각도 못 한 일이지. 그가 직접 우리를 소집하다니 말이야.”
에이라 미쉘은 자신을 찾아온 진웨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모두 미카엘이 남기고 간 전문을 몇 번이나 곱씹어서 읽었다.
“어떻게 할 거지?”
“대놓고 오라는 건 그 자리에 없을 때 무슨 얘기를 할지 모른다고 협박하는 것과 같지. 짜증 나지만…… 가지 않을 수도 없어.”
“그런가?”
진웨이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하루 전에 ISR이 한국으로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정된 장소에 약을 설치하는 데 적어도 하루 정도는 더 소요될 테니…… 남궁을 만났을 때면 준비는 끝나겠지.”
“좋아. 보험은 있으니 그놈도 그때처럼 미친 짓은 못하겠지.”
“미친 짓?”
에이라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나중에 내가 당한 걸 그 새끼한테 똑같이 해줄 때 하나씩 말해주지. 그 작자가 어떤 짓을 했는지 말이야.”
빠득-
에이라 미쉘이 으르렁거리며 말하자 진웨이는 흥미롭게 그녀를 바라봤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성녀라는 타이틀과 함께 마족으로 피해를 입은 런던을 비롯하여 수많은 도시에 지원을 하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성녀가 아닌 마녀라고 해도 될 만큼 독이 잔뜩 올라 있었다.
“시체를 실은 화물선을 남궁이 가져갔다는 얘기 들었어. 두 번 실수는 없어야 할 거야. 남궁을 잡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니까.”
‘그렇게 필요한 일이면 자기가 직접 하면 될 것을…… 두고 봐라. 결국 성물을 완성하는 건 나니까. 너도 남궁과 별반 다를지 않을 거다.’
“걱정 마.”
진웨이는 에이라를 향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최명훈이 찾아왔죠?”
수백 개가 넘는 향이 피어오르며 뿜어내는 연기는 마치 구름처럼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환선굴에서 가져간 성물을 돌려받길 원한다고 합니다.”
베일 뒤로 들려오는 여린 목소리에 가츠마타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우웅…….
그의 주위로 크고 작은 마법진들이 허공에 만들어지더니 마치 시계태엽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와 싸우게 될 겁니다.”
“명령을 내리셨을 때부터 예상한 바입니다.”
탁- 탁- 탁-
마법진이 돌아가자 방을 채우고 있던 향 내음이 더욱 짙어지기 시작했다.
스읍…….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은 환각에 빠질 만큼 강력한 마력이 담겨 있었지만, 가츠마타는 오히려 그것을 빨아들이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예상했다라…… 재밌으시네요. 제게 그런 말을 하다니 말이죠.”
베일 뒤에서 들려오는 에리카의 목소리.
“그를 만나봤나요?”
“네. 얼마 전 환선굴에서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더욱이…….”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알렉 트라만의 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역시나 에리카는 놀라기보다는 그조차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미래를 보셨습니까.”
가츠마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예지(豫知). 그것이 저의 일이니까요.”
“그럼…….”
그는 다시 한번 향 내음을 맡으며 물었다.
“제가 죽습니까.”
“저는 미래를 예견합니다. 하지만 제 예견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틀린 적이 더 많습니다.”
에리카는 베일을 걷고서 가츠마타에게 걸어갔다.
“제가 본 미래대로라면 여의도는 쑥대밭이 되었어야 했고, 런던에서 알렉 트라만은 사망했을 거예요.”
“그건 남궁의 개입으로 인해 바뀐 미래지 않습니까. 저는 남궁이 아닙니다.”
“맞아요. 그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그만큼 그는 강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상대가 남궁은 아니죠.”
그녀가 손바닥으로 입술을 훔치자 그녀의 입 안에서 작은 구슬 하나가 떨어져 손바닥 위에 올라섰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구슬이 천천히 가츠마타에게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돌아왔을 때 바뀐 미래를 기대하죠.”
“……가실 생각이십니까?”
에리카는 그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는 부하가. 주인은 주인이. 그대가 최명훈을 상대하듯 저는 남궁과 수를 논하겠습니다.”
화르륵……!!
방 안을 채운 향의 연기들이 소용돌이처럼 일제히 휘몰아치자 순식간에 꽃잎으로 변했다.
“…….”
꽃잎들이 허공에서 멈추었을 때,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드르륵…!!
가츠마타가 거칠게 문을 밀었다.
“손님을 맞이해라.”
* * *
“이야. 아직 마물의 습격을 받지 않은 곳이 남아 있었군.”
“남들은 성물을 모으러 분주한데 혼자 여기서 휴양이나 보내고 있는 건가. 팔자가 좋은걸.”
몰려드는 사람들로 조용했던 섬의 리조트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자 남궁은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오랜만이군. 반가운 얼굴은 아니지만.”
리조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모두 여섯.
남궁을 비롯하여 진웨이, 에이라 미쉘, 니나가와 에리카, 록산느, 미카엘이 모였고, 예상대로 덴 하울과 알렉 트라만은 불참했다.
‘덴이야 【레아의 서(書)】 2번째 페이지를 열면서 내가 부탁한 마법을 연구하느라 정신없을 테니 그렇겠지만…… 알렉의 계획은 감이 오지 않는군.’
마족전 이후 남궁도 알렉의 심경에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변화에는 자신도 일조했으니까.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내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알렉.’
남궁은 이 자리에 없는 두 사람을 잠시 떠올리고는 천천히 손님들을 향해 손짓했다.
“앉지.”
긴장감이 맴돌았다.
“우아, 이거 맛있네?”
쩝쩝-
어느새 접시에 한가득 음식을 담아온 미카엘이 자리에 앉자마자 입안에 음식을 밀어 넣자, 언제 그랬냐는 듯 경계의 긴장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뭐, 여기까지 오느라 허기도 지는데. 좋네요. 저도 좀 먹을까요?”
어울리지 않게 미카엘의 뒤를 이어 에리카가 접시를 들고 홀 안을 돌아다니자 나머지 사람들도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어진 듯 하나둘 음식을 집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다만 진웨이만은 못마땅한 듯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서 신경질적으로 들이켰다.
“우리를 부른 저의가 뭐야? 만신전은 그야말로 성물을 누가 먼저 모으느냐를 두고 피터지게 싸우는 경쟁이야. 그런데 지금 탁자 앞에 앉아 수다나 떨자고?”
“피를 꼭 봐야 전쟁은 아니지.”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보다 검이 먼저 나가는 인간이.”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철컥-
남궁이 진웨이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들고 있던 검을 보란 듯이 탁자 위에 내려놓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긴장할 필요 없다. 내가 너희를 부른 이유는 진웨이의 말대로 수다나 떨자는 거니까.”
남궁은 그들을 훑었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미카엘을 제외하고 어쩐지 나머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움찔거리는 것 같았다.
“이제 절반가량의 성물이 확보 되었다. 이 안에 누군가는 성물을 완성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불필요한 피해를 줄일 수도 있어.”
“흥, 그래서? 지금 네게 우리가 가진 패가 뭔지 다 까발리라고? 너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능하지.”
탁-
남궁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빼앗길 것은 없지만 빼앗을 수 있는 건 여기 잔뜩 있으니까. 안 그래?”
“크큭……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미친놈이라니까. 결국 우리를 협박하려고 부른 것일 뿐이란 소리잖아. 빼앗길 것이 왜 없어? 오히려 너야말로 빼앗길 것투성인데.”
진웨이가 남궁을 향해 냉소를 지었다.
“…….”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이라 미쉘이 멈추라는 눈짓을 줬다.
“빼앗길 것? 화물선의 시체 같은 거?”
“……이 새끼가.”
“그만하세요. 알렉이 없으니 남궁, 당신은 이제 진웨이와 다투는 건가요?”
“에리카.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닐 텐데. 환선굴의 성물을 빼앗아 간 게 누구였더라?”
“진정해.”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록산느. 너 역시 마찬가지야. 일곱 뱀의 성물을 가지고 있으면 내게 먼저 얘기를 해야지 왜 에이라 미쉘을 만나?”
“아니, 나는…….”
“그리고 너.”
남궁은 에이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귀산에서 내가 한 말을 잊은 건가? 나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제물이면 제물답게 행동해.”
콰앙-!!!
그 순간 에이라 미쉘이 탁자를 내려치며 일어섰다.
“뭐? 나대지 마? 남궁!! 너야말로 지랄 마! 네가 뭔데 남의 목숨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야!! 너야말로 그런 헛소리를 할 처지가 아닐 텐데?”
“무슨 뜻이지?”
“ISR이 한국 전역에 마약 폭탄을 설치한 걸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걸까?”
“……!!!”
남궁이 그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폭탄이 터지면 한국 전역에 끔찍한 독구름이 만들어질 거다. 딸도 네 부하들도 반병신이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진웨이를 말렸던 에이라 미쉘이 오히려 자신의 입으로 비밀을 폭로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내가 친히 내 술법으로 그들을 써주지. 광견이 되는 것 보다는 낫잖아. 안 그래?”
에이라는 비릿한 웃음과 함께 남궁을 바라봤다.
“그렇다는데요?”
하지만 동시에 음식을 가득 담았던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미카엘이 포크로 그녀를 가리키며 남궁을 향해 말했다.
“의외네. 성녀가 이렇게 터프할 줄이야. 생각보다 너무 쉽게 얘기하는 것 아냐?”
“우아, 설귀산에서 호되게 당한 모양이죠. 저 눈빛 보세요.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 난 표정인데.”
록산느와 미카엘의 대화를 들은 에이라는 순간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에리카, 당신 말대로군.”
“제가 본 2가지 예지 중 하나는 그저 우리가 이 섬에서 모두 모이게 될 거라는 것뿐이었어요. 딱히 도왔다고 할 수도 없죠.”
“그래도 예지 덕분에 확신을 가지고 일을 꾸밀 수 있었으니까. 이 자리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로 저 둘이니까.”
“당신의 동료에게 고마워해야 할 거예요. 그의 분투가 없었더라면 당신에게 예지를 알리지 않았을 거니까.”
“명훈이는 잘하고 있나?”
“지네굴에 갔습니다.”
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물을 가지러 갔는데 없으면 난감하겠군.”
“아마 지금쯤이면 성물은 생각도 못 할걸요.
“그럼 반은 성공이로군.”
“네. 다만 나머지 반이 과연 어떤 식으로 채워질지 저도 궁금하네요. 가츠마타도 그를 통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을지요.”
남궁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명훈 씨가 비월을 찾아갔다고 들었는데…… 설마 환선굴에서 비월이 성물을 훔친 것도 계획된 일이었던 건가?’
방 한쪽에 서 있던 박효주는 에리카와 남궁의 대화를 들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흥, 가지가지 하는군. 다들 짜고 우리를 불렀다는 말이지?”
에이라 미쉘은 남궁을 노려봤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오히려 너희들이 남궁과 한패라면 더 좋지. 가지고 있는 성물을 모두 내놔.”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남궁이 소리치는 그녀를 향해 되물었다.
“상황 파악? 그건 너나 해! 분명 말했을 텐데! 한국에 누가 있는지 말이야!!”
퍼억-!!!
그 순간 남궁이 에이라의 뺨을 후려쳤다.
“……!!!”
일격에 수 미터를 튕겨 나간 그녀를 보며 계시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스캉-!!
동시에 날아간 검이 진웨이의 바로 옆에 박혔다.
“아니까 이러는 거야. 너희들 말대로 한국엔 내 딸과 내 동료들이 있지.”
“그들이 죽어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소리냐.”
“아니. 그 반대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거든.”
저벅- 저벅- 저벅-
남궁은 진웨이를 향해 걸어가 벽에 박혀 있는 검을 뽑아내며 말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이 인질이야.”
움찔-
창백해진 진웨이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