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지금부터 너희는 너희 스스로에 대한 인질이 되는 거다. 살아야 할 이유를 얘기해봐. 합당한 이유를 낸다면 살려주지.”
“크…… 크큭.”
니나가와 에리카의 웃음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려오자, 진웨이와 에이라 미쉘은 아득했던 정신이 가까스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뭐, 뭐라고?”
“이런 미친 새끼!! 인질? 무슨 헛소리야! 내 얘기 못 들었어? 당장에라도 네 딸의 목숨…… 큭!”
진웨이가 남궁을 향해 이를 바득 갈며 소리치는 순간 엄청난 속도로 단검이 날아들었다.
캉! 카캉! 캉!!!
급소를 노리는 공격에 뒤로 물러난 진웨이가 품 안에서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 푸른 기운이 맴돌았다.
“넌 또 뭐야? 감히 계시자도 아닌 게 낄 자리도 모르고!!”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벽을 박차고 뛰어든 진웨이를 향해, 박효주가 회수한 단검들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진정해.”
그 순간 남궁이 박효주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날아오는 진웨이의 주먹은 아스가 가로막았다.
“어떻게 진정해요? 지금 저 인간이 하는 말 못 들었어요? 감히 소민이를…….”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화를 낼 필요도 없어.”
꽈악-
담담히 말했지만 자신의 어깨를 잡은 남궁의 손에서 느껴지는 힘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성물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앞에 꺼내봐.”
“미친…… 누가 자기 패를 함부로……!”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사계절의 방랑자의 것이에요. 덴 하울의 위상 말이죠.”
코웃음을 치는 진웨이를 오히려 비웃듯 미카엘이 가지고 있던 성물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
성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는 가시덩굴의 미망인, 미풍의 어머니, 그리고 화롯불을 다루는 자의 성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리고 에리카가 바통을 이어 받자 긴장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화, 화롯불을 다루는 자?!’
“저거, 저거. 눈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
미카엘이 진웨이를 놀리자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는 알다시피 일곱 뱀의 성물을 가지고 있어. 남궁, 당신 위상의 성물이지.”
록산느도 탁자 위에 성물을 내려놓았다.
남궁의 것이 나오자 순간 다시 긴장감이 맴돌았다.
“에이라 미쉘, 그리고 진웨이. 너희도 얘기할 의향이 있나?”
“……화롯불을 다루는 자와 나의 위상인 미풍의 어머니의 성물이 있어. 하지만 꼭 보여줄 의무는 없겠지.”
에이라의 말에 남궁이 피식 웃었다.
“설귀산에서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속내를 감추길 잘하네.”
“……뭐?”
“이곳에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었어? 말도 안 되는 속임수를 치려거든 차라리 하지 마.”
“…….”
“미풍의 어머니의 성물은 덴 하울이 가지고 있다. 네가 가진 성물은 해와 달의 관망자의 것일 텐데?”
에이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모두 알면서 물어보는 당신의 심보도 썩 좋은 건 아니죠.”
“신뢰의 문제니까. 진웨이, 넌?”
“알려줄 생각 없다. 에리카의 힘으로 이미 알고 있으면 더욱 얘기 할 이유가 없지.”
“마음대로. 그럼 지금 들은 얘기만 놓고 본다면 화롯불을 다루는 자의 성물은 당장 완성시킬 수 있겠네. 그렇지?”
퉁명스럽게 얘기했지만 진웨이는 남궁의 말에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마법 연구로 참석하지 못한 덴 하울의 성물을 가져온다면 미풍의 어머니도 완성할 수 있겠지.”
그의 말에 진웨이와 에이라 미쉘은 서로를 바라봤다. 아이러니하게도 동맹을 맺은 두 사람의 성물만이 지금 모두 확보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저게 진짠가? 에이라 미쉘이 내 성물을 가지고 있는 게? 내게 한마디 말도 없었는데.’
‘덴 하울은 여기에 없잖아. 진짜 그자에게 성물이 있는지 확인을 할 수도 없는데…… 거짓말이면 어쩌지?’
두 사람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서로 그렇게 노려볼 필요 없어. 어차피 지금 너희들 수중엔 성물이 없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하지. 아니면 빼앗든지 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딱히. 너희 둘이서 상의하란 거야. 그래서 결정이 되면 한 사람의 성물을 먼저 소환시켜 주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둘 중에서 만신전의 우승자를 결정하자고요?”
“형님, 그건 좀…….”
에리카를 비롯한 다른 계시자들이 그의 말에 반발했지만, 남궁은 손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만신전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또다시 마물과 싸워야 한다. 성물과 소환되는 성전을 잘 활용하면 앞으로 있을 전투에 도움이 되지만, 자칫 욕심을 부린다면 전력만 깎아먹게 될 거야.”
남궁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나는 너희들이 싫지만 그것보다 위상의 뜻대로 흘러가는 게 더 싫다. 놈들은 성물이란 달콤한 사탕에 몰려드는 개미떼들을 구경하고 싶어 하니까.”
“잘난 척은…….”
“그래서 결정은?”
“생각지 못한 일이긴 하지만…… 둘 중에 고르자면 당연히 제 성물이어야 합니다.”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던 게 언제냐는 듯 에이라 미쉘의 말투가 바뀌었다.
“이유는?”
▶ 1쌍의 성물을 완성시켜 위상의 신전을 구축하게 되었을 시, 완성한 계시자는 2명에게 성물을 하사하여 ‘추종자’로 임명할 수 있다.
▶ 계시자의 선택을 받은 추종자는 위상의 힘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에이라가 만신전이 시작될 때 나타났던 알림을 다시 불러냈다.
“추종자는 계시자와 별개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말은 뛰어난 힐러를 2명 더 얻을 수 있다는 것이죠. 아시죠? 힐러를 찾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렇게 따지면 연금술도 마찬가지야.”
“아뇨. 다르죠. 연금술의 결과는 물품이니까. 그리고 물품은 대량 생산이 가능하죠. 지금 당신이 한국에 깔아놓은 폭약처럼. 하지만 힐러는 직접 전선에 서야 합니다.”
“야……!!”
“물론, 저 역시 인류가 존속하길 바라고 희생을 할 마음가짐도 되어 있습니다. 원한다면 퀘스트의 보상을 모두 내어 드리죠.”
“성녀다운 발언이군.”
“과, 과찬이십니다.”
“그럼 성녀답게 성전을 불러내고 나면 스스로 제물이 되는 것은 어때?”
남궁은 가증스러운 에이라 미쉘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 아쉽게도…… 성물을 완성한 자가 제물을 바쳐 의식을 진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러고 싶지만 가장 먼저 성물을 완성하게 되면…….”
에이라 미쉘은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진웨이를 바라봤다.
“대신 합당한 제물을 구해보도록 하죠. 최대한 공정한 방법으로 말이죠.”
“이 미친……!!!”
콰아아아앙---!!!
진웨이의 반지가 빛나자 요란한 굉음과 함께 에이라 미쉘이 앉아 있던 자리가 폭발했다.
츠즈즈즈…….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죠? 진웨이.”
충격과 함께 사방으로 먼지 구름이 솟구쳤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어느 하나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오색반지의 힘이 더 커진 것 같은데…….’
‘에이라 미쉘도 만만치 않군. 진웨이의 공격을 막아내다니.’
그저 상대방의 힘을 관찰하듯 두 사람을 주시할 뿐.
“당신을 지목한 것도 아닌데 무례하군요.”
“닥쳐, 여우 같은 게…! 어디서 수작질이야!! 네가 돌아다니면서 남궁을 잡기 위해 계시자들을 모으고 다녔던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
에이라는 팔찌에서 생성된 방패로 그의 주먹을 밀어내며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
“한국에 마약 폭탄을 설치해서 죄 없는 사람들을 인질로 삼는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건……!!”
“둘 다 그만둬. 너희야말로 괜한 일에 힘 빼지 말고. 너희 두 사람이 손을 잡았다는 거야말로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세삼 아닌 척하는 것도 우습지 않아?”
남궁은 그런 둘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 알아서 정하라는 거다. 하루 주지. 결정이 되면 내게 얘기해.”
그 말을 끝으로 남궁이 방문을 나서려 했다.
“웃기지 마……!!!”
그 순간, 진웨이가 탁자에 놓인 화롯불의 성물을 낚아채며 황급히 에이라 미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상의?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머, 멈춰!!!”
솨아아아악……!!!
미카엘이 황급히 진웨이를 향해 몸을 날렸지만 오색반지가 빛나면서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부웅-!!
그의 손이 허공을 그으며 그대로 바닥에 굴렀다.
“……어휴, 비전투원이라 그런가 엄청 느리네. 타이밍 맞춰주느라 힘들었네요.”
두 사람이 사라지자 미카엘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옷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네가 너무 빠른 거야. 진웨이의 전투력은 여기 계시자들 중에서도 상위권이다.”
“그런데 연금술로 공간도 도약할 수도 있는 건가요? 제 유일한 능력인데. 왠지 빼앗긴 기분이네요.”
“도약자의 힘과 비교할 순 없지. 굳이 따지면 그는 대부분의 힘을 쓸 수 있는 올라운더지만, 그렇기 때문에 특출한 부분이 없어.”
미카엘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오색반지를 모두 완성하면 또 달라지겠지. 그리고 공간 이동을 쓰는 걸 보니 벌써 4번째 반지를 제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조심할 필요성은 있어.”
남궁은 생각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진웨이의 연금술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악인이라도 능력은 있군. 전생보다 몰라볼 정도로 빠르게 크고 있으니까.’
자신으로 인해 바뀐 미래는 분명 모두에게 똑같은 성장의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니다.
전생보다 강해지는 자가 있다면 한편으로는 더 약한 상태인 자도 있었다.
‘마물의 침공이 짧아진 만큼 안정적으로 연금술을 연구할 시간이 확보된 것이겠지.’
반대로 록산느의 경우는 만신전이 시작되던 시기를 생각하면 전생보다 약화되었다.
전생의 그녀는 5번째 문이 열리는 시기에 소환수뿐만 아니라 문을 통해 나타난 마물들까지 테이밍할 수 있는 영역에 도달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계획이 먹힌 것 같네요. 에이라 미쉘이 오히려 거짓말을 한 덕분에 진웨이가 확신을 가진 것 같으니 말이죠.”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도중 들린 박효주의 목소리에 남궁이 고개를 들었다.
“에리카가 예지를 한 덕분이지. 그녀가 자신의 성물을 거짓으로 말할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예지는 단편적인 거라 미풍의 어머니의 성물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알아도 화롯불을 다루는 자의 성물도 거짓말인지는 모릅니다.”
“상관없어. 그게 진짜든 아니든 중요한 건 그녀가 자신의 성물을 가지고 있다고 진웨이가 믿는 것이니까.”
“진웨이가 과연 에이라 미쉘에게서 성물을 빼앗으려고 할지 궁금하네요.”
“이 참에 둘이 자멸하면 좋겠는데 말이죠.”
박효주와 미카엘의 말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중요한 건 국내에 침입한 ISR들이겠네요. 서둘러 정부에 보고를 먼저 하겠습니다. 그들을 생포해서 전국에 설치된 마약 폭탄의 위치를 확보하는 게 우선일 것 같아요.”
“그렇게 해.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욘 없을 거야. 곧 덴 하울의 연구가 끝날 테니까. 만약 그게 성공한다면 단순히 진웨이와 에이라 미쉘을 잡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럼……?”
“만신전은 원래 성물을 얻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쟁탈전이지. 하지만 그 대상이 꼭 인간이어야만 하는 법은 없잖아?”
알렉 트라만에게 제물이 되라 말했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제물의 대상은 계속 바뀌었지만, 남궁의 머릿속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즉 만신전의 제물이 꼭 인간이란 법도 없지.”
“……·?!!”
“아까 말했잖아. 너희들은 모두 인질이라고.”
알렉 트라만과 만났을 때부터.
그의 목표는 하나였다.
“나는 위상을 만신전의 무대에 세울 것이다.”
놈들이 서로 물어뜯으며 버둥거리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