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270)

144화

“성물을 가지고 위상을 위협한다…… 과연 그게 먹힐까요?”

“내 생각이 맞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

섬에서 헤어지기 직전 전달받은 남궁의 계획에, 계시자들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위상은 신이라 불리는 존재와 같아.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이미 무수한 신이 존재하지. 그리고 사람들은 종교로서 그들을 숭상하고.”

“그렇죠.”

“신의 입장에서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게 뭘까.”

“흐음…… 글쎄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믿는 것?”

“맞아.”

남궁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위상 역시 똑같아. 만신전의 성물로 인간에게 힘을 보태주겠다고 하지만 사실 놈들이 원하는 건 인간들끼리 싸우는 걸 즐기려는 것뿐이지.”

“……속이 쓰린 얘기네요.”

“그래. 하지만 뭣 같아도 결국 승자는 성전을 소환할 수밖에 없지. 카니발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 더 강한 마물들이 쏟아질 테니까.”

인간들끼리 죽고 죽이는 지옥도를 구경하는 것은 사실 애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위상이 노리는 만신전의 진짜 목적은 그 이후니까.

“성전이 소환되고 위상이 강림하게 되면 계시자를 비롯한 추종자들은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 앞으로 몇 차례의 마물 공습은 그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겠지.”

“그건 좋은 일 아닌가?”

록산느가 그에게 물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리고 다들 위상의 힘을 숭배하게 될 거야. 그 힘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결국 사람들을 위상의 포로가 되게 만든다.”

“으음…….”

위상은 인간의 편이 아니다.

몇 번을 강조해도 과언이 아닌 그 말을, 남궁은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했다.

“위상이 강림하고 현실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놈들은 인간을 장난감 다루듯 할 거다. 먼지 같은 힘을 대가로 인간을 마음껏 다루겠지.”

“하지만…… 위상의 힘이 없다면 앞으로 있을 지옥문의 마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힘들겠지. 만신전이 끝나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마물들이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올 테니까.”

“그럼 어떻게?”

“그래서 지금 하려는 거다. 위상은 성물이 완성되지 못하면 세상에 강림할 수 없어. 그것이 놈들의 유일한 약점이지. 나는 그걸 이용할 거다.”

“……괜찮을까요?”

에리카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글쎄. 예지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흐릿한 미래라도 결론은 간단하겠지. 이기든 지든 결국 둘 중에 하나일 테니까.”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운 위상을 상대로 담담히 말하는 남궁의 모습에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그가 하려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 * *

콰아아아아앙---!!!!

하늘에서 수많은 낙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독구름이 마치 사람들을 짓누르기라도 하려는 듯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훕…….”

덴 하울은 천천히 양손을 모아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가 술식을 읊자 머리 위로 수 십 개의 마법진이 동시에 나타났다.

치직……! 치지지직……!!

마법진과 구름이 닿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가 힘을 주자 천천히 마법진들이 구름을 밀어 내기 시작했다.

“구름의 입자는 질소와 유사해. 구름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입자를 액화시키는 게 제일 좋아. 그렇게 되면 구름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어 자연적으로 분리될 거야.”

“……얼마까지 낮추면 될까요?”

“절대영도(絶對零度).”

덴 하울은 인상을 찡그렸다.

“너무 위험합니다. 극저온 상태가 되면 구름뿐만 아니라 일대 전부가 얼어붙을 텐데요. 저희야 그렇다쳐도 다른 사람들은…….”

“그걸 막는 게 저 아이의 역할이지.”

주사인은 소민을 가리켰다.

“흡수되는 마력의 양을 자칫 조절하지 못하면 구름이 내부에서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걸 막는 건 저 녀석의 몫이고.”

그다음으로 남궁을 가리킨 주사인은 덴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당신이 할 일은 하나야. 저 독구름을 녹이든, 얼어붙게 만들든, 아니면 폭발을 시키든 해서 없애버리는 것. 뒤는 저 녀석들에게 맡겨.”

주사인은 말했다.

“설마 저들을 믿지 못하겠어?”

“……아닙니다. 해보죠.”

덴 하울은 자신이 바보 같은 걱정을 했다고 생각하고는 있는 힘껏 마력을 끌어 올려, 독구름을 떠받드는 마법진의 술식을 점차 강화시켰다.

오싹-

술식이 빛을 뿜어내자 순식간에 겨울이 찾아온 것처럼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니…… 절실하지 않은 모양이지?”

독구름과 마법진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남궁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여기 있는 성물을 모두 부수겠다. 만신전의 승자가 아무도 나오지 않게 되면 과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잠깐!!!]

그때였다.

바닥에 놓여 있는 성물에 검을 꽂으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해라.]

“의외인걸. 네가 제일 먼저 나설 줄이야. 생각보다 엉덩이가 무겁지 않은 모양이지, 요르.”

[하아…… 당연히 내가 나설 수밖에. 내 계시자가 지금 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다른 녀석들이 내 등을 떠밀지 않겠냔 말이다.]

요르는 머리를 긁적이며 남궁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얼어붙은 공기가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정말로 위상이 나타났어.”

“말도 안 돼…… 이게 가능한 일인가?”

담담한 남궁과 달리 나머지 계시자들은 요르의 모습을 본 순간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위상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목소리를 들은 정도뿐.

인간이 신을 영접했을 때처럼 위상은 그저 까마득하고 두려운 존재일 뿐이었다.

[하아,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잘도 이런 짓을 꾸몄구나. 성물을 모아서 위상의 성전을 강림시키랬더니 오히려 성물을 부수겠다고 위상들을 협박해?]

툭-

그는 바닥에 세워져 있는 자신의 성물을 들어 공처럼 던졌다 받았다 하며 남궁에게 말했다.

[위상의 힘은 강력하다. 성물을 완성하는 것만으로도 승자는 위상의 힘을 얻을 수 있어. 그뿐이야? 한 명의 희생자로 일곱의 힘을 모두 얻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더냐.]

“…….”

[그런 위상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협박해 거래를 하다니…… 너같이 안하무인은 지금껏 만난 계시자들 중에서도 처음일 게다.]

“안하무인? 멋대로 지옥문을 열어버린 놈들이 이제 와 힘을 빌려줄 테니 서로 죽고 죽이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 그게 규율이니까. 잘 생각해라. 성전이 완성되면 처음에는 2명의 추종자에 불과하지만 그 밑에 또 다른 신도를 둘 수 있다.]

요르는 최선을 다해 남궁을 구슬리려 했다.

[신도가 많아질수록 위상의 힘은 강해지고 그 비호 아래 있는 자들이 마물을 상대하는 것도 수월해지겠지. 절대로 너희에게 손해 보는 짓이 아닐걸.]

하지만 구구절절 애원하듯 말하는 요르의 모습에 오히려 남궁은 이상함을 느꼈다.

[위상의 힘을 얻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어서 선택해. 네가 원한다면 저 다에시란 놈의 사령을 불러내서 물어봐 줄 수도 있다.]

“됐어.”

[……정말 포기했다는 뜻인가?]

자신을 향한 요르의 물음에 남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진심으로 성물을 부술 생각이냐? 네 결정으로 인해 다른 계시자들도 위상의 힘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게 싫다면 내려와. 서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해야지.”

[하아, 이런 미친 계시자 녀석.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하지 않을 수 없지.]

요르는 남궁을 향해 웃었다.

[솔직히 저 위에 녀석들은 아직 반신반의하고 있다. 네가 성물을 가지고 협박을 하고 있지만 설마 정말로 부수겠냐고 말이야.]

그는 자신의 성물을 남궁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너라면 부수고 남을 놈이지.]

퐈슥---!!!

그때였다.

요르가 들고 있던 자신의 성물을 부숴 버렸다.

[나도 네 말에 동의한다. 인간을 도와? 도와주기는 개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구름에 인간들이 변이되자 가장 기뻐한 게 누군지 알아?]

요르는 어쩐지 신이 난 듯 말했다.

[미풍의 어머니다. 그는 누구보다 인간의 죽음에 환희하는 미치광이지.]

“…….”

그의 말에 에이라 미쉘은 창백해진 얼굴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곱 뱀의 성물이 파괴되었으니 나, 요르는 만신전을 기권한다. 이제 모두 기어 나와라. 아직 승리에 욕심이 남은 자든, 아니면 굽실거려서라도 강림할 기회를 얻고 싶은 놈이든 말이야.]

파스슥……!!

부서진 성물의 가루를 즈려 밟으며 요르가 소리쳤다.

[그렇지 않다면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의 성물을 모조리 부숴 버릴 테다.]

그때였다.

[……이런 미친 놈!!]

[제정신이야? 중재를 하러 보냈더니 오히려 사달을 내고 있군!!]

[널 믿은 게 바보짓이지!!]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요란한 목소리에 사람들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훑었다.

“조용.”

[이봐……! 만신전은 앞으로 있을 전투를 위해 위상이 준비한 안배다. 그런데 그걸 멋대로 망쳐?]

[너야말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일렁이는 빛들이 남궁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군.”

남궁은 자신의 주위를 거칠게 날아다니는 구체를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르, 가장 먼저 말한 위상이 누구지?”

그의 물음에 요르가 귓속말을 했다.

콰앙-!!!

그 순간 남궁은 세워져 있던 성물들을 발로 걷어찼다. 사방으로 날아가는 성물에 위상들의 빛무리가 당황한 듯 일렁였다.

[자, 잠깐……!! 이게 무슨 짓이야!!]

[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냐고!!]

[……저 미친 놈!!!]

파직---!!

남궁은 부서진 성물의 잔해를 발로 비볐다.

그제야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위상들의 목소리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누, 누구의 것이지?]

[설마 내 건 아니겠지…….]

[미치겠군.]

성물의 주인은 해와 달의 관망자였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나는 너희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성물이 산산조각 난 걸 본 그가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을 위해? 네가 한 게 뭐가 있는데?”

[……뭐?]

“검 한 자루 던져주고는 영웅 놀이 하라고 부추긴 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게 네가 인류를 위해 하는 일인가? 알렉 트라만의 성흔이 어째서 사라졌지?”

[…….]

남궁의 말에 빛 무리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성물을 완성시키고 성전을 소환해야 하니 계시자는 존재할 터.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인간계에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면 알렉 트라만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것이다.”

[넌 그자와 경쟁하지 않았던가? 그가 없는 편이 네게 이득일 텐데.]

“경쟁? 경쟁은 급이 맞아야 하는 거지. 그런 애송이가 싸움이 될 것 같아?”

[정말 안하무인이로군. 계시자들이 급이 맞지 않는다면 너와 급이 맞는 경쟁자는 누구지?]

“누구긴.”

남궁은 검을 들어 올려 자신의 앞에 일렁이는 빛 무리를 향해 말했다.

“너희들이지.”

[지금…… 우리와 싸우겠다는 뜻이냐.]

해와 달의 관망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럼. 그래야 만신전답지.”

오히려 그 분노를, 남궁은 기다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