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쿠가의 말에 의하면 너는 일곱 뱀을 다스리는 자의 계시자라고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던가?”
“아니, 맞아. 나는 요르와 계약을 맺었다. 그 덕분에 사령술의 힘을 쓸 수 있지.”
“그런데 어째서…….”
라테아는 남궁의 손목에 감겨 있는 사슬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했다.
“위상의 시험을 받은 적이 있다. 그들은 나를 믿지 않거든.”
“계시자인데 위상이 너를 시험했다? 이상한 일이로군. 계시자는 누구보다 위상의 신임을 받는 자들일 텐데.”
“내가 조금 특이한 위치에 있어서.”
남궁은 그녀를 바라봤다.
“회귀를 했다. 원래 계시자가 되어야 할 자 대신 내가 그 자리를 빼앗았지.”
“……!!”
그의 한마디에 주위에 있던 자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네가 그 퀘스트를 완수한 최초의 인물이란 말인가?”
“그 퀘스트를 성공시킨 자가 없었나? 뭐, 그렇다면 맞겠지. 그런데 의외인데. 카니발을 공략했다면 마족을 사냥하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사냥의 문제가 아니다. 그 퀘스트의 전제 조건 때문이지.”
“조건이라면…….”
“세상에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라테아의 말을 남궁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 남는 것만큼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은 없으니까. 카니발의 참가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힘을 합쳐 살아남으려 하지 않겠어?”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러는 너는 어쩌다 그 퀘스트를 성공할 수 있었지? 설마…… 네가 사람들을 죽인 건 아니겠지.”
남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진 않다. 너희에 비해 우리가 약했던 것이겠지. 그리고 눈앞의 욕심에 흔들려 서로 자멸하기도 하고 말이지.”
“흐음…… 혼자 남아 마족을 모두 사냥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로군. 쿠가가 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냐.”
“그, 그건…….”
“딱히 그 때문은 아냐. 내가 저자를 이길 수 있었던 건 그때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강하기 때문이니까.”
남궁의 대답에 쿠가는 못마땅한 듯 궁시렁거렸지만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진 못했다.
“힘들었겠군.”
“…….”
생각지도 못한 라테아의 말에 남궁은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생했다.”
어려 보이는 소녀에 가까운 이가 까치발을 들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양새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묘하게 자연스러웠다.
외모와 달리 그녀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연륜은 남궁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별일이로군.”
남궁은 신기한 듯 그녀를 바라봤다.
“우리의 대답에 따라 퀘스트를 할지 안 할지 결정하겠다고 했지?”
“맞아.”
“퀘스트를 포기한다는 건 우리의 편에 서겠다는 뜻일 텐데…… 그 말은 우리를 탑 밖으로 내보내 주겠다는 의미인가?”
“글쎄.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도전해 볼 가치는 있지. 그러기 위해선 나 역시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할 테고.”
“흐음, 무엇이지?”
“탑 안에 만신전의 성물이 잠들어 있다. 나는 그것들을 모을 생각이야.”
“만신전? 얼마 전에 탑이 크게 울리더니…… 그 때문이었던 건가? 위상이 탑에 관여한 게 얼마 만인지.”
라테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만신전이라…… 정말 카니발의 초입에 불과하구나. 그런데 탑이 열리다니. 이런 적은 모든 차원을 통틀어 처음이겠군.”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보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챤, 쿠가. 너희는 나머지 두 부족에게 연락을 취하러 다녀오거라. 급한 일이니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설마…… 빙궁지에도 직접 가야 합니까?”
“물론이다. 튜르 일족이 거기에 살고 있지 않느냐.”
“끄응, 알겠습니다.”
불 속성을 가진 요란 일족으로서는 사계절 모두 겨울뿐인 빙궁지로 가는 것이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잘 다녀와라, 쿠가. 고생깨나 할 거다.”
“닥쳐줄래?”
플론이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쿠가를 향해 입을 가리고선 웃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쿠가를 놀리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플론. 너는 악산의 뒷길로 가서 지금 당장 장로들을 모시고 오너라.”
“……네?”
한창 쿠가를 놀리던 그는 주어진 임무에 당혹스러운 듯 눈빛이 흔들렸다.
‘크큭, 꼴좋다. 이 녀석아.’
그런 그를 보며 쿠가는 비소를 지었다.
요란 일족의 장로들이 지내는 악산의 뒷길은 험난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문제는 괴팍한 장로들의 성격이었다.
“제가 꼭 가야 할까요? 장로들께서는 쿠가를 더 좋아하는데.”
“그건 옛날 일이잖느냐. 게다가 악산의 뒷길은 상급 사냥꾼들만 갈 수 있는데 쿠가가 어찌 가겠느냐.”
“아…….”
라테아의 옆에 서 있던 중년의 사냥꾼이 그를 나무라자 플론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악산이란 곳이 어떤 곳이길래 꺼려 하지?”
“꺼, 꺼려 하긴…… 누가.”
“뭣하면 대신 가줄 수도 있는데. 어차피 나를 보러 오는 거라면 내가 직접 가서 그들을 보면 되지 않을까.”
“그곳은 상급 사냥꾼들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자격이 없는 자는 들어갈 수 없다.”
남궁은 쿠가를 가리켰다.
“저 녀석을 이겼는데 그럼 상급 정도 되는 건가?”
“그럴 리가. 쿠가는 하급 사냥꾼이다. 게다가 그를 이긴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투사가 아니라 사냥꾼이니까.”
‘샐러맨더를 사냥할 정도인데 하급이라…… 확실히 카니발을 공략한 자들답군.’
남궁은 점점 더 이들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궁긍하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면 된다. 악산에 오르기 전에 있는 토룡의 늪에서 사냥에 성공한다면 충분히 상급이라 칭해줄 수 있겠지.”
“하오나 저자는 이방인입니다. 출신도 모르는 자를 어찌…….”
“요란이 언제 태생을 따졌던가? 웨일, 자네 역시 초원에 오기 전엔 왕국의 기사였지 않은가.”
“그렇지만…….”
라테아의 옆에 서 있던 웨일이란 사내는 그녀의 대답에 머뭇거렸다.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밖에서 샐러맨더를 사냥하던 걸 봤다. 그렇다면 혹시 토룡이라는 게 바실리스크를 말하는 건가?”
“잘 아는군. 맞아.”
“아무래도 이곳에 나머지 아룡들도 모두 있는 모양이던데…….”
“그래. 우리 요란이 있는 곳엔 샐러맨더와 바실리스크가 서식하고, 나머지 두 부족의 영토에 각각 드레이크와 와이번이 서식하지. 써펀트는 중앙에 있는 대호수에 있고. 그런데 왜?”
“카니발이 달라도 적용이 되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흠?”
남궁은 팔찌를 보여줬다.
“아아…… 그렇군. 【어룡의 보석】이라…… 써펀트를 사냥한 모양이로군. 아마 나머지 아룡들을 잡아서 보석을 조합할 수 있었지?”
“맞아. 만약 이곳에서 잡은 아룡들이 조합에 적용된다면 좋은 기회지.”
“틀린 말은 아니야. 한데 요르의 계시자이자 우(无)의 사슬을 가진 자가 꽤나 사소한 보구를 신경 쓰는구나.”
“이걸 완성시키려면 우리 세계에선 꽤 시간이 걸리거든. 15개의 문이 끝나야 완성할 수 있는데 그걸 지금 만들 수 있는 기회라니. 놓치기 아깝잖아?”
“클클, 돌아가지 못할 경우는 생각도 안 하는 모양이로구나. 의외로 순진한걸. 위상에게 속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으니 속을 것도 없지. 놈들이 편의를 봐주려고 탑을 소환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여긴 패배자들의 감옥이다. 처리하기 껄끄러운 자들을 가둬 놓은 무간지옥이란 말이지. 그리고 이 안에 들어온 너 역시 마찬가지야.”
“그건 두고 봐야겠지. 탑에 갇혀 있다면 패배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탑을 나선다면 패배가 아닌 공략자가 되는 거다.”
“……자신 있나?”
“글쎄. 해봐야 알겠지. 하지만 당신들도 그게 궁금해서 나를 계속 두는 거 아닌가?”
“재밌군.”
라테아는 남궁의 대답에 흥미가 동한 듯 웨일에게 말했다.
“그를 토룡의 늪으로 안내해 줘라.”
“장로들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겁니다.”
“그것까지 감내하는 것이 저자의 몫이다.”
“……알겠습니다.”
“쿠가, 네가 그와 함께 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봐주거라.”
“제, 제가요?”
라테아가 되묻는 거냐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쿠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봐, 그런데 설마 둘이서 아룡들을 잡을 생각은 아니겠지?”
“동료들이 있다.”
“바실리스크는 샐러맨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독한 놈이야. 요란 부족의 사냥꾼도 최소 30명이 모여야 가능하단 말이야. 부디 당신만큼 강하길 바라야겠군.”
“걱정 마라.”
남궁은 쿠가의 물음에 답했다.
* * *
“설마…… 이게 다는 아니지?”
쿠가는 남궁의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다야.”
“……장난해? 저 덩치는 좀 쓸 만해 보이긴 하지만 나머지 둘은 뭐야? 흐리멍덩하게 생긴 녀석하고 꼬마가 끝? 저 녀석들로 뭘 하라고!”
“흐, 흐리멍덩?”
“꼬마요?”
명훈과 경인은 쿠가의 반응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뭘 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보면 알아. 길이나 안내해.”
“망했군.”
쿠가는 악산을 향하면서도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요란 일족의 장로들이 악산에 머무는 이유가 바로 산 중턱에 있는 토룡의 늪 때문이었다.
이따금 먹이를 찾기 위해 늪에서 빠져나오는 바실리스크들이 마을의 큰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뛰어난 사냥꾼인 그들도 사냥을 꺼릴 정도로, 바실리스크는 5마리의 아룡들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놈이었다.
쿠가는 딱 한 번 마을로 내려온 바실리스크를 사냥해 본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상급 사냥꾼들이 자리를 비운 터라 마을에 사냥꾼들이 적었던 문제도 있었지만, 그날 입었던 피해는 그것 이상으로 끔찍했다.
‘바실리스크는 아룡들 중에 가장 마지막에 출현하는 놈이니까. 그의 반응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지만…….’
저들은 카니발을 모두 끝낸 자들이었다.
15번째 문에서 소환되는 바실리스크가 강하긴 해도 그 이후엔 더 강한 마물들을 많이 상대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쿠가의 반응은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
“……저기다.”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어느새 늪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크르르르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시커먼 늪에서 튀어나온 악어 같은 바실리스크가 두 눈을 껌뻑이며 일행을 가로막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쿠가는 압도적인 위압감을 가진 바실리스크의 등장에 남궁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저릿저릿한 기분이었다.
저런 걸 고작 4명이서 사냥하겠다니 정말 자살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모두 대기.”
하지만 쿠가의 예상을 비웃듯 남궁이 바실리스크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설마 혼자서?”
쿠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파앗―!!
“미, 미친……!! 뭘 하려고? 제길!! 바실리스크의 약점은 미간이다! 미간을 노려!!!”
남궁이 바실리스크를 향해 뛰어 들자 경악스러운 얼굴로 쿠가가 소리쳤다.
“야!! 미간이라고 했잖아!!”
하지만 조언과 달리 남궁이 바실리스크의 꼬리 쪽으로 방향을 틀자 그는 기겁을 했다.
“……어?”
그러나 외침도 잠시. 쿠가는 사냥 결과에 소리치던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 뭐야?’
쿠웅……!!
거대한 바실리스크의 몸뚱이가 처박히면서 늪의 진흙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왜…… 죽어?”
쿠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