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흠…….”
남궁은 쓰러져 있는 바실리스크의 시체를 뒤졌다. 아쉽게도 보상 상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로군. 이건 나오는 모양이니.”
카니발 때처럼 보상 상자가 따로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시체를 뒤적이자 그 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갈색의 구슬은 남궁도 잘 알고 있는 【토룡의 보석】이었다.
하지만 써펀트를 잡았을 때와 다른 점은 단순히 보상 상자만이 아니었다.
“아이템 설명을 볼 수가 없네.”
신기하게도 카니발에서 얻은 아이템들에는 넘버링이 붙어 있으면서 설명이 있었는데, 지금 그가 얻은 【토룡의 보석】에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설명란이 공백인 것이 아니라 설명란 자체가 없는 것이었다.
카니발의 보상템이 아닌 일반적인 사물에는 넘버링이 달리지 않은 것처럼, 보석은 마치 현실 속의 도구와 똑같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게 더 현실감 있긴 하군.’
탑 안은 이러한 이능의 도구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현실의 도구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카니발에선 단 1마리뿐인 아룡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탈칵-
다행히 팔찌의 소켓에 보석이 딱 들어맞았고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것이 보석의 효과는 적용이 되는 듯싶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토룡(土龍)의 보석의 장착 효과가 이거였던가.’
남궁은 팔찌에 박혀 있는 보석을 슬쩍 바라보며 천천히 바닥에 손을 짚었다.
쿠그그그……!!!
그러자 팔찌에서 빛이 나더니 그의 앞에 두터운 바위벽이 튀어나왔다.
단순히 방벽처럼 보였지만 벽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더니 파편이 되어 그의 주위를 회전하며 날기 시작했다.
콰강……!!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날아다니던 바위 파편들이 미사일처럼 그곳을 향해 쏟아졌다.
콰가가강……!
폭격과 같은 요란한 폭음이 들렸다.
하지만 남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엔 늪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수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웅…… 우우웅…….
6마리의 수어들이 소환되었고 바위 파편들이 수어를 보호하기라도 하는 듯 맴돌았다.
“바위를 다루는 힘인가요? 원거리 공격도 가능하시겠어요. 제 입지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은데요.”
경인이 바위 파편들을 보며 말했다.
“네 화살과 비교할 수 없지. 게다가 공격용이라기보다는 방벽과 함께 수어들을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게 맞아. 앞으로 상대 해야 할 마물들 중 기껏 돌멩이에 맞아 죽을 놈은 없을 테니까.”
“기껏 돌멩이라고 하기엔 위력이 장난 아닌데요?”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엉망이 된 바닥을 보며 경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간이 아니라 엉뚱한 곳을 공격하던데.”
“거기도 타격을 줄 수는 있지만 바실리스크를 확실하게 잡으려면 꼬리가 연결되어 있는 항문 위에 치혈(痔穴)을 공격해야 해. 그 안에 역린에 해당하는 부속이 있거든.”
“항문 위에? 여태껏 놈을 사냥하면서 그런 약점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쿠가는 남궁의 말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오히려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남궁이었다.
“그럼 너희는 어떻게 잡았지? 바실리스크를 미간만 노려서 잡은 건가?”
“그렇지.”
“허…….”
미간의 비늘이 다른 부위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그건 바실리스크 자체가 워낙 튼튼한 놈이기 때문이었다.
가장 약한 그 부위도 단단함을 비교하면 다른 아룡의 비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쉽게 부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샐러맨더를 사냥할 때의 모습을 떠올리면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나 불가능하진 않아 보였지만, 바실리스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은 의외였다.
‘오히려 강하니까 탐색을 할 생각이 없었던 건가?’
남궁은 쿠가를 바라봤다.
“이런 약점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라테아 님께 말씀드리면 좋아하시겠군. 그래도 되겠지?”
“물론. 나야 상관없다. 그런데 오히려 카니발을 끝낸 너희가 바실리스크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게 나는 더 놀랍군.”
“아룡들 중 우리 일족과 가장 상성이 좋지 않거든. 원소 계열의 공격은 부담이 없는데 독 계열은 우리에게 치명적이야.”
“아아…… 그렇군.”
남궁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실리스크의 독은 조금만 닿아도 즉사거든. 전에 한 번 바실리스크가 마을에 침범한 적이 있었는데 상급 사냥꾼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터라 정말 끔찍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
“흐음…… 바실리스크는 상급 사냥꾼이면 쉽게 잡을 수 있나? 그때 보니까 막사 안에 상급 사냥꾼이 네 동료인 거 같던데.”
“상급이 되도 쉽지 않지. 다른 아룡들을 혼자 잡을 수 있으면 시험에 통과하는 거지만 바실리스크는 급이 달라.”
“그래?”
“응. 그날 이후 지금은 장로들이 이곳에서 바실리스크가 늪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거든. 그런데 이런 약점이 있다니…… 플론 녀석도 깜짝 놀라겠군. 킬킬.”
쿠가는 자랑할 생각에 기분이 좋은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실리스크의 시체를 넘어 수풀에 숨겨져 있는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응?”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궁이 말했다.
“상급 사냥꾼도 바실리스크를 혼자서 잡을 수 없다?”
“응? 어, 그게…….”
쿠가는 아차 싶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실력을 증명하라더니 자기들도 못하는 걸 내게 시켰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를 시험 한 게 아니라 죽이려고 했다고 보는 게 맞으려나.”
턱-
남궁은 쿠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니, 그게…….”
꽈악-
“아, 아악!!”
손가락에 힘을 주자 쿠가는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능력으로 따진다면 쿠가 역시 남궁에게 지지 않을 힘을 가졌을 것이다.
하급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그도 샐러맨더를 사냥할 정도의 능력을 가졌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가는 남궁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바실리스크를 압도해 버린 모습이 머릿속에 박혀서 남궁이 상급 사냥꾼과 동급으로 여겨져 몸이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쿠가를 용서해 주는 게 어떤가. 그는 그저 명령에 따른 것뿐이니까.”
그때였다.
남궁은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라테아가 짓궂은 행동을 했지만 그건 아마 자네가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한 것일 게야.”
“자, 장로님……!”
세 명의 노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겉모습은 왜소해 보였지만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저들이로군.’
[재밌군. 저 노인네들에게서 혈맥술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것도 상위의 단계 말이다.]
장로들을 본 순간 무명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저들이 야차의 술법을 익혔다는 건가?’
[그렇진 않을 거다. 하지만 혈맥을 다루는 방법은 꼭 야차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니까. 저 정도의 성취를 가졌다는 건 쉽게 볼 자들은 아니라는 뜻이지.]
남궁은 무명의 말에 장로들을 바라봤다.
“그 아이가 자네를 죽이고자 했으면 정면에서 승부를 걸었겠지.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걸세.”
“그럼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면서까지 저를 믿은 이유는 뭡니까.”
“자네의 회귀를 믿은 것일 테지.”
“……회귀?”
“자네의 경험 말이야.”
“그렇게 말해도 썩 기분이 좋진 않군요. 오히려 제 회귀를 의심해서 확인해 보려고 한 것 같은데요. 제가 정말로 경험이 있는지 말입니다.”
툭-
그때였다.
세 노인 중 한 명이 남궁의 앞에 뭔가를 꺼내 놓았다.
“거기에 대한 사과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이거면 조금은 믿음이 갈지 모르겠군.”
그들이 꺼낸 건 놀랍게도 성물이었다.
“형님, 저건……!”
그것도 일곱 뱀의 성물 말이다.
“이걸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남궁조차도 이렇게나 빨리 성물을 찾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우리뿐만 아니라 일족의 장로들이라면 성물을 가지고 있을 걸세. 탑이 우리와 자네들을 싸우게 만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일 테지.”
“저야 이곳에 있는 일족을 죽이라는 탑의 퀘스트를 받았지만 당신들에게 성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장로는 남궁의 물음에 몰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아무래도 라테아가 자네에게 말을 하지 않은 모양이군.”
“무슨 뜻입니까?”
“자네가 탑의 퀘스트를 받은 것 처럼 우리는 성물의 퀘스트를 받았네.”
남궁은 그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본능적으로 그들이 받은 퀘스트가 좋은 것이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 퀘스트가 뭡니까? 딱봐도 위상들의 장난질이라 생각되는데.”
“자네와 똑같네. 자네에게 우리를 죽이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탑의 침입자를 죽이라는 퀘스트지.”
“그래서 얻는 것이 뭡니까?”
“자유.”
“…….”
남궁은 그들의 대답에 잠시 말을 아꼈다.
“자네가 탑에 왔을 때 탑이 요동치더군.”
“그리고 성물이 나타났을 때 알았지. 뭔가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야.”
그들은 남궁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이 고작 만신전을 진행 중인 참가자를 죽이라는 것 일지는 몰랐지.”
“이곳에 있는 자들은 그래도 카니발을 모두 끝낸 자들인데 말이야. 그래서 라테아는 자네에게 흥미가 생긴 게 분명해.”
“카니발을 끝내지도 않은 자가 위상에게 반기를 드는 것도 모자라 이곳까지 들어왔으니.”
장로들은 남궁에게 말했다.
“솔직히 우리는 지금도 그녀의 결정에 불만이 많다네. 똑같은 자유를 얻는다면 차라리 자네들을 죽여 버리는 게 더 쉬울 테니까.”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이지. 정말로 자네가 이 탑을 부술 만큼의 능력을 가졌는지 말일세.”
“만약 우리에게 그것을 증명한다면…….”
장로들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남궁을 향해 말했다.
“우리 일족은 자네에게 힘을 보태도록 하지.”
꿀꺽-
쿠가는 그들의 말에 긴장한 듯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목젖이 떨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확실히 카니발을 끝낸 자들이라는 얘기에 흥미가 있긴 했지. 그런데…….”
“……그런데?”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남궁은 오히려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보니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
“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린가! 카니발의 끝도 가보지 못한 자가 감히…….”
“그러니까. 카니발의 끝에 가본 자들이 어째서 끝에 가보지 못한 나를 믿으려 하는 거지?”
“……뭐?”
“우(无)가 그랬다. 내가 경험한 카니발은 기껏해야 절반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따지면 너희의 경험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것일 텐데.”
남궁은 장로들을 바라봤다.
“나를 죽이는 게 훨씬 더 쉬운 길일 텐데 어째서 당신들은 나를 믿으려고 하지? 내 실력을 시험하고 내 강함을 살펴서 하고자 하는 의도가 궁금하군. 아니.”
저벅-
그는 그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애초에 카니발을…….”
남궁은 말했다.
“끝내긴 한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