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여기…… 괜찮을까요?”
“뭔가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명훈과 호준이 남궁의 뒤를 따르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꽈드드득-
하지만 남궁의 대답 대신 경인이 시위를 당기는 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들릴 뿐이었다.
“형님,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탑은 모두에게 기회를 준다고 했잖습니까. 탑 안에서 힘을 얻어 앞으로의 카니발을 준비하라는 게 위상들의 의도라고 했으니까요.”
“그랬지.”
“의지를 구축하는 것이 탑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했을 때…… 형님 말대로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도, 지금쯤이면 문을 연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요?”
명훈은 탑의 문을 연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일까, 말을 하면서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저희 말고도 사람들이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지금까지 한 명도 볼 수 없었을까요.”
“그야 저희는 라테아 덕분에 그 우(无)인가 뭔가 하는 고대 위상의 봉인터에 와서 그런 거 아닙니까.”
“그 말이 아냐. 여기야 당연히 쉽게 올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 쳐도, 그 전에 말이야. 형님께서 요란의 막사에 가 있는 동안에도 아무런 낌새가 없었어.”
“뭐…… 요란 일족 말고 다른 종족들도 있다면 그만큼 땅이 넓다는 말일 테니 문도 여러 곳에서 열릴 수도 있죠.”
“흐음…….”
호준의 말에 명훈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틀린 얘기가 아니었기에 반박을 하진 않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모습이었다.
“왜?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닙니다. 단지…… 감이 좀 안 좋아서요. 꼭 이 탑에 저희들만 들어오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러면 괜찮네. 원래 명훈이 형님 감은 항상 틀렸잖습니까.”
“야 씨, 아니거든?”
호준은 명훈의 걱정을 풀어주려는 듯 농담을 했지만 남궁은 그의 말을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위상이 탑을 연 것이 단순히 인류를 강화시켜 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노린 거라…….’
노리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그게 꼭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애초에 탑 자체가 자신을 시험하는 무대일 가능성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지.”
“……네?”
“명훈이 말대로 지금 만들어진 탑 자체가 위상들의 함정일 수도 있어.”
“그, 그럼 위험한 것 아닙니까?”
남궁의 대답에 명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걸 알기 위해서 온 거야.”
‘왜 거기서 요르가 나를 막았던 걸까. 정말로 내가 우(无)와 만나는 것을 막기 위해?’
남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요르 역시 위상이므로 우(无)와 자신의 만남을 꺼려 할 순 있겠지만, 만약 정말로 그것을 저지하고자 한다면 가차 없이 자신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
[일곱 뱀 중 이제 고작 하나밖에 찾지 못했다. 설령 네가 계시자를 파기한다 한들, 나머지 여섯을 모두 찾기 전까지 나와의 계약은 유효하다는 걸 명심해라.]
남궁은 어둠 속을 걸으면서 요르가 했던 말을 계속해서 되짚어봤다.
‘녀석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성격이 아냐.’
우(无)의 탑에 와서 굳이 일곱 뱀의 퀘스트를 얘기할 필요가 있었을까?
애초에 퀘스트란 것은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 위상이 직접 언급을 할 필욘 없었다.
‘퀘스트가 목적이 아냐. 그건 핑계에 불과해.’
그렇다면 그의 진짜 의중은 그 뒤의 말일 가능성이 높다.
[나와의 계약은 유효하다는 걸 명심해라.]
“계약…….”
남궁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요르는 계시자에게 계약을 비굴하게 비는 성격이 절대로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말을 떠나기 전에 남긴 걸까.
[다시 만나는군.]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낮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척-!!
일행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잡으며 경계를 했다.
[네가 이리 빨리 탑에 올 줄이야……. 이건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인데 말이지.]
“우(无).”
남궁은 눈앞에 나타난 미이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눈과 코가 있어야 할 부분은 도려낸 듯 아무것도 없이 시커먼 구멍만 있는 괴상한 미이라는 새하얀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너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어.]
차르릉…….
그의 팔과 다리를 구속하고 있던 족쇄들이 흔들렸다.
[자, 이제 사슬로 이것을 부수거라. 클클, 바보 같은 놈들…… 너를 시험하려 탑의 문을 열다니 말이야.]
우(无)는 남궁을 반기며 말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위상들이 레오릭의 딸이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겠지. 오히려 놈들의 술수가 우리에게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야.]
“…….”
[자, 나의 힘을 받아 탑을 나서면 된다. 위상들에게 복수를 할 기회다.]
하지만 남궁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이 많네.”
[……뭐?]
“다시 만났다…… 그래.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그거로군. 우리가 다시 만났다는 것.”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머릿속을 맴돌던 불편한 의심이 우(无)의 한마디에 아이러니하게도 깨끗하게 정리된 기분이었다.
“너, 우(无)가 아니로군?”
[하, 하하……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순간 미이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요르가 어째서 자신과의 계약이 유효하다고 한 것인지 알겠어. 녀석답지 않은 말이지만, 그건 내가 계시자로서 다른 자를 택하지 말라는 경고였군.”
[당연히 그는 나와의 계약을 원치 않겠지. 계시자를 잃으면 카니발을 포기해야 하니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냐. 녀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계시자를 잃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너와의 계약을 경고하는 것이지.”
[너는 나의 힘을 얻고 싶지 않은가? 카니발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와 계약을 맺는다면 저 위에 있는 놈들을 제대로 눌러줄 수 있다.]
“어. 나는 너와 계약을 맺지 않을 거다.”
꿈틀-
그 순간 남궁을 바라보던 미이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왜냐면 너는 우(无)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내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남궁은 천천히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나도 한참 모자라군. 위상들의 이런 장난질을 전생에도 많이 봐왔는데.”
푸욱-!!!
순간 그의 몸이 움직였고, 계명검이 우(无)의 어깨에 박혔다.
키아아아악……!!
검에서 귀곡성(鬼哭聲)과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우(无)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너는 우(无)가 아니라 란(亂)이겠지.”
[크, 크큭…….]
남궁의 한마디에 미이라는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검에 찔렸지만 그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알아차렸지?]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아내며 뒤로 물러선 미이라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붕대를 풀렀다.
“……!!”
놀랍게도 붕대 뒤에 숨어 있던 얼굴은 멀쩡하다 못해 오히려 빛이 날 정도였다.
미려한 얼굴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가녀린 손은 섬섬옥수라는 말이 어울렸고 남궁을 바라보는 눈빛은 호수 같았다.
그의 모습은 아름다움이라는 말 그 자체와 같았다.
꿀꺽-
하지만 뒤에 서 있던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신을 마주한 인간의 모습.
그것은 아름다움 때문이 아닌 경외에 짓눌린 피조물의 본능이었다.
[내 연기가 제법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위상들의 한계를 알고 있거든. 너희들은 신이라 칭해지지만 그보다 더 위의 규율을 어기진 못하지.”
[그래서?]
“처음 위상들이 나를 노리고 우(无)를 만나게 했을 때 그곳의 퀘스트는 란의 둥지를 공략하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규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위상들이 만든 퀘스트라면…… 퀘스트의 장소는 진실이라는 것.”
[하, 하하.]
“그 말은 우(无)가 갇혀 있는 곳이 탑이 아니라 란의 둥지라는 말이 되겠지. 그렇다면 탑에 있는 넌?”
그 순간 란은 만족스럽다는 듯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과연이로구나! 하하, 어째서 우(无)가 네게 흥미를 가졌는지 알겠어. 눈앞의 힘만큼 유혹적인 것도 없을 텐데…… 그걸 몇 번이나 참아내다니 말이야.]
“남이 준 힘은 결국 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위상의 힘을 빌렸지만 그 힘에 기대지 않는다. 우(无)의 사슬 역시 마찬가지야. 이용할 뿐. 그걸 믿고 위상에게 덤빌 생각은 없다.”
[좋구나. 아주 좋아.]
스르릉-
남궁은 란의 어깨에서 뽑아낸 검을 쥐고서 자세를 잡았다.
“그러니 네가 내게 흥미를 가지는 건 의미 없다. 중요한 건 네가 과연 내게 필요한 존재인지, 아니면 날 잡아먹을 존재인지 알아 내는 것이겠지.”
그는 말했다.
“말해봐. 넌 뭐지?”
[네가 알고 있는 대로다. 가장 오래된 위상. 모든 것을 창조한 태초의 시작을 함께한 존재.]
자신에게 검을 드리운 그를 마치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란은 말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자이기도 하지.]
‘우(无)가 자신에 대해서 했던 말과 똑같군.’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그 둘은 서로 반대되어 있는 위치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네게 장난을 좀 쳤다. 클클, 우(无)의 사슬을 가진 자가 냄새를 풍기며 나의 영역에 들어왔으니 흥미가 동할 수밖에.]
남궁은 그를 바라봤다.
란(亂)은 웃고 있었지만 남궁은 여전히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위상들이 귀여운 짓을 했어. 너를 우에게 보낸 것처럼 내게 보내면 너를 어찌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차르릉…….
그의 말에 대답을 하는 것처럼 남궁의 손목에 감겨 있는 사슬이 떨렸다.
[하지만 바보 같은 생각이야. 나 역시 우(无)와 마찬가지로 네게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야.]
“……왜 나지?”
[너는 우리를 이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열쇠거든. 지금껏 수많은 카니발의 역사 중 회귀를 한 자는 너 하나뿐이다.]
란(亂)은 남궁을 바라봤다.
[두 개의 시간을 경험한 자는 시간의 다리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시간의 단절자가 될 수도 있거든.]
그는 자신의 족쇄들을 보였다.
[우리의 봉인을 끊어낼 수 있는 힘이 네게 있다. 너는 우(无)에게서 사슬을 받았지? 그 사슬로 내 족쇄를 끊는다면 네게 힘을 보태주겠다.]
매혹적인 목소리가 남궁의 귀를 때렸다.
[위상들이 가지지 못한 태초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카니발을 끝내는 것이 문제가 아냐.]
카르르릉……!!
족쇄가 흔들렸다.
[세계를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어둠 속에서 울렸다.
슉--!!
그때였다.
모두의 시선이 란(亂)의 족쇄에 꽂혀 있을 때, 어둠을 뚫고 날아 온 화살이 그의 미간에 꽂혔다.
“…··!!!”
화살이 박힌 란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그 모습에 모두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아저씨, 저거…… 뭐예요?”
활을 쥐고 있는 경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뭐냐니?”
그의 돌발 행동에 남궁조차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어둠 속에서, 마치 올뺴미의 눈처럼 경인의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신기한 눈을 가졌구나. 그 눈을 조금 더 믿어봐라.]
남궁은 막사를 떠나기 전 라테아가 경인을 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꽈아악-
경인은 활의 시위를 당긴 채 남궁의 뒤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란(亂)을 바라봤다.
“괴물하고 얘기를 나누고 있어요?”
순간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