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저기 보십시오! 현재 북태평양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거대한 섬이 확인되었습니다.
촤아아악……!
헬기에 타고 있는 기자의 말대로 바다를 천천히 이동하고 있는 섬이 화면에 나타났다.
-섬의 규모는 무려 뉴질랜드와 크기와 비슷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섬이 단순히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6번째 문의 보스 몬스터라는 것입니다.
[푸우우우--!!!]
섬의 앞부분에서 물이 솟구쳐 오르더니 그 안에서 거대한 거북의 머리가 나타났다.
갑주처럼 단단한 비늘로 뒤덮여 있는 얼굴이 활대처럼 꺾이며 포효를 내뱉자 주위의 파도가 거세게 일렁였다.
-마물의 이름은 거암귀. 지금까지 나타난 마물 중 가장 거대한 크기입니다. 현재 미 해군 태평양 함대 산하 제7함대가 거리를 유지하며 그 뒤를 쫓고 있습니다.
바위 거북의 주위에 있는 이지스 순양함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였다.
-현재 마물의 이동 목적지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대로 방향을 유지하게 된다면 필리핀과 인도, 그리고 대만이 마물의 범위 안에 들어갈 것으로 전문가들이 예측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방위 병력들이 배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3번째 문과 같은 마물의 대규모 침공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현재 알렉 트라만과 함께 유니버스 클랜의 능력자들이 거암귀를 상대하기 위해 공격대를 출범 중이라고 합니다.
-과연…… 영국 영웅의 귀환일까요? 근래 알렉 트라만의 활약이 다른 계시자들에 비해 떨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데, 아마 이번이 큰 전환점이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거암귀는 걱정할 필요 없다. 저 녀석은 도시로 가지 않을 테니까. 등껍질에 붙어 있는 저 화산들이 보이지? 저것들 모두 아직 활동을 하고 있는 활화산들이야. 엄청난 열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TV에서 흘러나오는 기자의 보도를 신기한 듯 바라보던 라테아가 말했다.
[그런데 저게 아무리 단단한 등껍질을 가진 거암귀라도 고통스러운 일이거든. 녀석은 열기를 내리기 위해 본능적으로 추운 곳을 찾을 거다.]
“북극을 향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아마도. 이게 지금 너희 세상의 지형이라는 말이지? 이대로 거암귀가 위를 향해 간다면……. 병력은 오히려 이쪽에 배치하는 게 맞겠군.]
그녀는 펼쳐 놓은 지도에서 알래스카에서 이어지는 작은 섬의 무리를 가리켰다.
“프리빌로프 제도로군.”
남궁은 마치 초승달처럼 곡선으로 무리를 지어 나열되어 있는 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암귀를 유인하기도 좋고 섬들이 모여 있으니 병력의 배치도 용이할 거야.]
“역시……. 나 참, 전문가, 전문가 하는데 도대체 뭘 안다고 자기들이 전문가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여기 이렇게 진짜 전문가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미카엘은 라테아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아부는 좋다만 그렇다고 해서 튜르 일족을 소개해 줄 거라고 기대하진 마라. 그들과 친분을 맺는 건 너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니까.]
칼 같은 그녀의 대답에 미카엘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룡의 문에 있는 3개의 일족 중 하나인 튜르 일족은 빙궁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 하하. 물론이죠. 잘 알고 있습니다.”
미카엘은 라테아의 말에 멋쩍게 웃었다.
탑의 문이 열리고 도약술로 아룡의 문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그는 아직 남궁도 가보지 못한 빙궁지에 먼저 가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눈을 사로잡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말았다.
튜르 일족의 보구, 【날개바람】이었다.
[그 신발은 확실히 재밌는 물건이긴 하지만……. 공간을 도약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네가 왜 욕심을 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라테아는 미카엘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보구를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그냥 궁금해서 그런 것뿐이죠.”
지금까지 장비에 이렇다 할 욕심을 보이지 않았던 미카엘이었기에 남궁은 그 신발의 효능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물론 도약의 힘을 빌려 빙궁지로 바로 갈 수도 있었지만, 남궁은 조금 기다려 보기로 했다.
‘뭔데 저 녀석이 저리도 안달이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달 난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제법 재밌으니까.’
튜르 일족과 함께 아룡의 문에 있는 나머지 일족인 천둥 일가가 모두 모이게 되면 남궁은 일단 나머지 아룡들을 사냥할 계획이었다.
‘거암귀를 상대하려면 보석을 모두 모아 팔찌를 완성시키는 것이 좋겠지.’
넘버링 748089
이름 : 원시 아룡의 팔찌
등급 : 레어(최고)
▶ 어룡의 보석이 고대 바실리스크의 심장과 조합되어 한 단계 승급된 팔찌.
▶ 시간을 초월한 아룡의 힘이 스며들어 있어 좀 더 높은 수준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
▶ 남은 보석의 등급에 따라 팔찌의 성질이 변화될 수 있다.
기존 【어룡(魚龍)의 보석】이었던 팔찌의 이름은 바실리스크를 사냥함으로써 변화되었다.
무엇보다 남궁은 팔찌의 이름 앞에 붙은 원시라는 수식어에 주목했다.
‘단순히 카니발에 소환된 아룡들을 사냥해서는 아마 얻을 수 없는 것이겠지.’
남궁은 탑의 나머지 아룡들을 사냥하게 되면 과연 팔찌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물론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한다면 거암귀를 잡는 데 꼭 팔찌를 완성시킬 필요는 없어.’
전생엔 팔찌를 완성하지 못했음에도 최명훈이 마물을 사냥했었으니까.
하지만 남궁이 노리는 것은 단순히 거암귀를 사냥하는 것이 아니었다.
‘놈의 등껍질에 있는 3개의 활화산.’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아티팩트를 얻기 위함이었다.
‘활화산 안에 있는 용암 호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물이나 얼음으론 부족하다.’
얼음은 순식간에 녹아 버릴 것이고 물은 닿기도 전에 증발해 버릴 테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뭘까.
‘뜨거운 열기에도 녹아내리지 않을 만큼 단단한 바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와이번을 사냥하고 얻을 수 있는 【석화의 보석】이었다.
물론, 그 보석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전신을 바위로 감싼다 하더라도 그것을 뚫고 들어오는 열기의 고통은 그대로일 테니까.
그렇기에 그는 나머지 아룡들까지 모두 사냥할 필요가 있었다.
“그나저나 성물은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기껏 모았는데……. 성전을 소환하지 않는 것도 아쉽지 않을까요?”
박효주가 물었다.
“위상들이 탑을 개방한 이유는 나를 이용해서 탑을 부수거나 혹은 일족을 이용해서 나를 죽이거나. 둘 중에 하나를 노렸던 거야.”
둘 모두 그들에게 있어서는 골칫거리였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남궁은 란(亂)과의 거래를 통해 탑의 문을 개방하게 되었다.
두 개의 차원이 연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당혹스러운 쪽은 위상들일 터.
‘단순히 우리가 강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야.’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카니발의 공략법이었기 때문이다.
회귀자인 남궁의 존재만으로도 불편한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마물의 공략을 알고 있는 자들이 수두룩해졌으니 말이다.
‘물론 요란 일족은 20번째 문까지밖에 경험하지 못했으니 내 기억이 더 많은 지옥문을 공략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20번째 문이 열릴 때까지 더 이상 혼자 고군분투할 필요 없다는 것은 남궁을 심리적으로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위상들은 어떻게든 이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 강림하려 할 거야. 그리고 그 유일한 수단인 성물이 우리에게 있는 이상…….”
남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은 또 다른 보상을 가지고 거래를 하려 하겠지. 우리는 놈들이 내건 보상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기만 하면 돼.”
박효주는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명훈이가 거암귀를 사냥하기 전에 용암 호수를 공략해야 하니 서둘러 남은 아룡들을 잡아야겠어.”
“도와드릴까요?”
“아룡 사냥? 됐어.”
남궁은 그녀의 물음에 피식 웃었다.
“하루면 충분해.”
* * *
“형님.”
늦은 밤, 탑을 나서는 남궁의 손목엔 지금껏 없었던 은색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차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몸을 돌리자 그곳엔 그를 기다리고 있던 명훈이 있었다.
“여, 연합장. 방송 잘 봤다. 화면발이 제법 괜찮던데?”
“……놀리지 마십시오. 단상 앞에서 어버버하는 모습이 제가 봐도 꼴사납던데요. 호준이 녀석이 어찌나 놀려대던지.”
명훈은 남궁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다 형님께서 억지로 시키셔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지만……. 계시자들이 버젓이 있는데 과연 저 같은 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남궁이 아룡들을 사냥하는 동안 명훈은 준비했던 대로 네스트 창설에 관한 기자회견을 발표했다.
그에게 네스트의 연합장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명훈은 당연히 한 번 거절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회견을 시작한 순간, 명훈에 대한 기자들의 여론은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기자 회견장에 에리카의 등장함으로써 논란이 순식간에 뒤집혔기 때문이다.
공식 석상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 그녀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이슈가 되기 충분했다.
아마도 그녀를 움직이게 만든 이유는 명훈의 실력을 직접 본 가츠마타의 영향이 컸을 터.
“넌 잘 해낼 거다. 너는 아직 스스로의 가치를 모르고 있을 뿐이니까.”
“……그럴까요?”
남궁은 명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스스로가 가치를 알지 못하면 남들도 너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법이야.”
그는 말했다.
“거암귀. 네가 잡아라.”
“네?”
“6번째의 문의 주인공이 되라는 말이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심어주도록 해. 네가 얼마나 단단한 놈인지 말이야.”
툭-
남궁은 어깨를 두들기던 손을 말아 그의 가슴을 한 대 쳤다.
“별해검도 부러뜨린 마당에 제가 무슨 수로 놈을 잡겠습니까. 사실 알렉 트라만을 볼 면목도 없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연합장의 자리도 그의 것이었으니까요.”
가벼운 부딪침이었지만 명훈은 오히려 그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알렉의 검과 자리를 네가 빼앗은 것 같아?”
남궁은 명훈에게 물었다.
“들었어? 알렉. 명훈이가 네 것을 빼앗은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데.”
“미안할 필요 없다. 검이 부러진 이유는 더 이상 그 검이 위상의 은총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니까.”
“……!!”
명훈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말은 위상의 은총을 받는 새로운 검이 나타났다는 뜻이지. 검이 있다면 당연히 새로운 검의 주인도 있겠지?”
“알렉……?”
넌지시 웃는 그를 보며 명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암귀를 사냥하기 위해 공격대를 조직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에리카의 연락이 있었다. 이대로 공격대를 꾸려 거암귀를 공략했다간 클랜원들을 모두 잃을 거라고.”
명훈은 충격적인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꼴사납게 되었지. 그녀의 예지 능력이 모두 맞는 건 아니지만……. 런던 이후 아무래도 겁쟁이가 되어버린 모양이야.”
“겁쟁이가 아니라 목숨의 무게를 알게 된 거겠지.”
남궁의 대답에 알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클랜원들을 네스트에 합류시킬 생각이야. 공식 발표는 아마 내일 올라올 거다.”
“……그게 정말입니까?”
“잘 키워봐. 그래도 공을 들여서 고르고 고른 자들이거든.”
아쉬울 수도 있을 텐데 그의 표정은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들었지? 최명훈. 넌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야. 알렉은 너보다 강해. 적어도 남을 걱정하려면 우선 더 위에 올라가야 하지 않겠어?”
“명심하겠습니다.”
결국 알렉의 홀가분한 표정만큼 명훈도 남궁의 질책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나저나 쓸 만한 검이 없는데……. 일단 대리자 일족에게서라도 사야 하나?”
알렉이 명훈을 바라봤다.
“행여나 전에 쓰던 그 야차 일족의 무기를 꺼낼 생각은 하지 마라. 간신히 바로잡아 놨는데 맞지도 않는 무기로 자세를 흐트러뜨리는 건 절대 안 돼.”
그의 경고에 명훈은 두말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이야 구하면 되지.”
그 순간 남궁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검은 만들어주지 못해도, 가장 튼튼한 검은 만들어 줄 수 있지.”
거암귀(巨巖龜) 공략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