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좋았어!!”
불기린이 끈적한 침에 버둥거리는 것을 본 제렌이 주먹을 꽉 움켜 지며 소리쳤다.
“…….”
하지만 덩달아 침 폭탄을 맞은 남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30분마다 한 번씩 거암귀가 마치 고래가 숨을 쉬듯이 침을 뱉어내더라고요.”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렌은 신이 난 듯 남궁에게 말했다.
“꼭 몇 방울씩 이 근방에 떨어지는데 불기린의 발을 잡아둘 수가 있어야 말이죠. 저희들로는 1분은커녕 30초도 막기가 어려웠거든요.”
[크륵…… 크륵…….]
“덕분에 성공했습니다. 히힛. 마무리는 남궁 씨가 가져가세요. 보스 몬스터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지막 일격 보상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양심은 있군.”
“물론이죠.”
남궁은 씨익 웃는 제렌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성서를 바라봤다.
‘미풍의 어머니의 보구로군. 저건 아마도 에픽 아이템일 텐데…….’
10번째 지옥문을 기점으로, 위상들은 살아남은 계시자들에게 한 번 더 보상을 내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알렉 트라만이 받았던 【별해검】이라든지 진웨이의 【오색반지】와 같이 위상에게 받은 초기 보상품은 레어 등급이었고, 이후에 주어지는 보상은 모두 에픽 등급이었다.
남궁 역시 그 순간이 오면 계시자의 시험에서 보았던 삼독문(三毒門)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었다.
금, 은, 동 3개의 등급으로 되어 있는 뱀의 보고 중 그가 간 곳은 최하위인 동의 문뿐.
하지만 그곳에서 레전더리 등급의 보구인 【군주 레오릭의 투구】를 얻었으니 나머지 보고에서 과연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10번째 지옥문이 열리기도 전에 저걸 먼저 준 건 아무래도 우리들과의 격차를 줄이라는 의미겠지.’
조금 전 하늘에서 떨어진 거암귀의 침을 공중에서 받아쳐 궤도를 바꾼 클락 역시 연금술사 2단계 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그의 양팔에 잠겨 있는 두터운 건틀렛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저걸로 거암귀의 침을 떨어뜨린 건가.’
진웨이가 사용했던 【오색반지】보다 한층 높은 속성 효과를 부여하는 전투용 건틀렛이었다.
건틀렛 안에는 속성 효과뿐만 아니라 특수한 기능이 있는데, 보조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금술사의 부족한 전투력을 메꿔주었다.
‘건틀렛의 형태를 보니 아직 거기까진 알지 못하는 모양이로군. 진웨이가 저걸 얻기 전에 사라졌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저 무구를 옛 동료인 클락이 착용하고 있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구 중 하나였으니까.
남궁으로서는 사실 저 건틀렛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길 바랐다.
푸욱-
남궁은 검으로 불기린의 목을 찔렀다.
우습지만 거암귀의 침의 효과는 탁월했고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기린의 불꽃은 힘 없이 꺼진 지 오래였다.
[크륵…!!!]
박아 넣은 검을 비틀자 불기린이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불기린을 처치하였습니다!
간결한 알림과 함께 불기린의 시체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고 그들의 앞에 1개의 상자가 나타났다.
“……엑 뭐야. 이게 끝?”
“마지막 일격 보상도 없는 건 그렇다 쳐도, 일반 보상도 없는 건가?”
“제렌, 너야 퀘스트를 받았으니 괜찮겠지만 이거야 원, 나는 완전히 무보수로 일을 한 거네.”
클락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의 눈빛을 읽었지만 무시한 남궁은 떨어져 있는 보상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철컥-
손을 대자 잠금쇠가 저절로 풀리면서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뭐, 뭐야?”
“설마 트랩인가?”
그 광경을 본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지만, 상자 안을 확인한 남궁은 오히려 그들보다 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여기서 나왔던가?’
최명훈에게 함락된 거암귀는 죽으면서 몸이 단단하게 굳어지며 하나의 섬이 되었다.
이후 그곳은 귀암도라고 불리며, 적색지대와 함께 카니발로 인해 만들어진 3개의 인공 섬 중 하나가 되었다.
귀암도 주변엔 바다에 서식하는 해양 마물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좋은 사냥터가 되었고, 불기린이란 희귀 마물도 있었으니 사람들에게 관심의 장소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남기 급급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생에서 불기린을 누가 사냥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생은 6번째 지옥문이 열리는 시점에서 거의 모든 통신 수단이 마비된 상태였으니까.
화르륵전생은 …!!
불기린을 누가 잡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궁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이 아이템을 사용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
넘버링 448
이름 : 청화(靑火)
등급 : 에픽
▶ 불기린이 가지고 있는 2개의 심장.
▶ 강력한 불꽃을 머금고 있다.
달그락-
푸른 불꽃을 머금고 있는 2개의 구슬은 에픽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부가 효과 없이 간략한 설명이 고작이었다.
이걸 어디에 쓰나 싶었지만, 남궁은 푸른 불꽃을 본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가 아는 한 불꽃을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플레임(Flame).
혹자는 스핏 파이어(Spit Fire)나 화폭마(火爆魔)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지만, 어쨌든 그의 이명이 모두 불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불꽃을 잘 다루는지 알려주는 증거였다.
‘플레임은 소민이가 전에 말했던 프로게이머 정찬호일 가능성이 제일 유력하긴 한데…….’
아마도 지금쯤이면 주사인이 그의 자질을 확인했을 것이었다. 일전에 주사인에게 말했던 가능성이 있다는 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카니발 중반에 혜성처럼 등장한 플레임은 몇 차례의 문을 단독으로 막았다.’
그중에서도 진정 멸망의 위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내몰렸던 21번째 문을 그가 막은 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싸움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라면 플레임이 과연 불기린을 잡았느냐는 거겠지.’
그의 활동 시기는 거암귀가 등장하고 나서도 한참 뒤였으니까.
‘조력자가 있을지도…….’
남궁은 거암귀 사냥이 끝나면 플레임의 행방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에이…… 기껏 희귀 마물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건진 것도 없고.”
아쉬움 가득한 클락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남궁은 2개의 청화를 전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물은 언제나 보상을 준다. 그게 꼭 보상 상자라는 고정 관념은 버리는 게 좋아.”
“그게 무슨 뜻입니까?”
“불기린을 사냥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진짜 보상은 바로 이 녀석 자체기 때문이거든.”
“네?”
“녀석의 가죽과 발톱, 이빨, 심지어 혀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고급 재료야.”
남궁은 그렇게 말하며 빠른 속도로 마물의 시체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다만 불꽃이 꺼지면 평범한 마물의 시체와 별반 다르지 않으니 최대한 빠르게 해체해야 해.”
남궁은 불기린의 눈알과 이빨을 두 사람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이걸 가지고 서울에 있는 네스트의 공방에 가봐. 쓸 만한 물건을 만들어줄 거야.”
“세계연합 본부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만지기 꺼림칙한 부위였지만 두 사람은 남궁의 말에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돌아가도록 해. 너도 퀘스트를 완료했을 테니 보상을 확인하고. 곧 배치되어 있는 해군들이 거암귀를 사냥하기 위해 포격을 시작할 거야.”
“알겠습니다.”
클락이 먼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제렌은 남궁이 준 불기린의 잔해를 들고서 그에게 말했다.
“이게 끝이 아니죠?”
“무슨 뜻이지?”
“불기린을 잡으려고 온 게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요. 아까 보니 애초에 잡을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그 말은 다른 것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거겠죠? 아닙니까?”
“눈치가 빠르군.”
남궁의 말에 제렌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당연히 보상을 탐내지 않겠습니다. 대신에 저희도 데려가주시면 안 됩니까?”
“안 돼.”
“……왜요? 그래도 계시자인데 혼자보다는 좀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언뜻 보기엔 선의의 말로 들리지만 남궁은 제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의도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움을 주려는 것이 아닌 새로운 퀘스트를 찾는 눈빛이군.’
제렌은 계시자가 되지 않았던 전생에도 카니발의 참가자 중 가장 많은 퀘스트를 클리어한 자였다.
치터(Cheater)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그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포기한 퀘스트마저 공략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대마족의 퀘스트를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고작 3명밖에 남지 않았던 인류.
닫지 못했던 지옥문이 하늘을 수놓았고, 마족군 외 많은 마물들이 지구를 유린하고 있는 상황에서 놈들만 골라 사냥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불가능을 가능케 한 이가 제렌이었다.
“도움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냐. 너희가 정말로 불기린을 잡아 버린 덕분에 내가 하려는 일이 완전히 틀어졌거든.”
“……네?”
쿠그그그그그…….
그 순간, 지면이 떨리기 시작했다.
“달려.”
남궁은 두 사람의 뒷덜미를 낚아채듯 잡아당기며 말했다.
“용암호수가 폭발한다.”
콰앙---!! 콰가가가가강---!!!!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암귀의 등에 있는 화산들이 일제히 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으악!! 저희가 뭔가 잘못한 건가요?”
클락은 날뛰는 거암귀의 등 위에서 당황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응, 제대로 망쳤지.”
“죄송……!”
콰앙---!
남궁이 그의 머리를 누르자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암석들이 요란하게 떨어졌다.
“덕분에 청화를 얻었으니 나도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거 맹화장을 포기할 순 없지. 제렌, 너 지금 성서의 몇 페이지까지 해독했지?”
“네? 아, 지금 3번째 장까지 읽었습니다!”
“딱 좋네. 3번째 성법을 읊어봐. 미풍 지대를 만들면 당분간 버틸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남궁이 어째서 자신의 보구를 알고 있는지 놀라는 것은 일단 뒤로하고, 제렌은 황급히 들고 있던 성서를 펼쳤다.
“오룡권갑은?”
“2번째 용까지는 소환할 수 있습니다.”
클락은 양팔에 착용하고 있는 건틀렛을 보이며 남궁에게 말했다.
“미풍 지대가 발동되면 오행기(五行氣)를 최대한 끌어모아. 그다음 나와 함께 중앙에 있는 화산으로 간다.”
“네, 알겠습니다.”
우우우웅……!!
손이 빠른 제렌이 어느새 성서의 주문을 외우자 그들의 머리 위로 반구의 영롱한 보호막이 생성되었다.
“가자.”
두 사람은 그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신기했다.
그들은 남궁과 처음 보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래전부터 합을 맞춰 본 것처럼 호흡이 딱딱 들어맞았다.
물론 두 사람은 당연히 알지 못할 터였다.
남궁이 그들과 8년을 함께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