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블랙 루트(Black Route).]
“맞아.”
[역시…… 그것까지 알고 있었구나. 창조는 일방이 아닌 순환을 따르니까. 정말 도대체 넌 모르는 게 뭐지? ]
“전생에 낚시꾼이라 불리던 길잡이가 하나 있었다. 전투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색적(索敵) 능력 하나만큼은 전 세계에서 최고였지.”
[재밌군. 계시자도 아닌 자가 그럼 블랙 루트를 발견했다는 말인가? 그자는 어떻게 되었지? 웬만한 자가 아니면 그곳으로 들어가서 살아 돌아올 수 없을 텐데.]
“그렇지. 그런데 살아 돌아왔어. 블랙 루트를 3번이나 경험하고도 말이야.”
요르는 남궁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런 자가 있다고? 말도 안 되는군. 그 정도 인물이라면 계시자들보다 뛰어난 거 아냐?]
“뛰어나지. 인성으로는 모르겠지만 능력으로만 본다면 나보다 더 뛰어난 인간이야.”
[피도 눈물도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적에겐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나라도 가족과 동료에게는 그렇지 않아.”
[그럼 그자가 가족과 동료를 팔아먹기라도 했다는 거냐.]
“어. 맞아. 그 인간은 가족을 버렸거든.”
[……흠?]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오히려 물은 요르의 표정이 당황으로 바뀌었다.
남궁은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얼굴이 아른거려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아버지다.”
요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아비라면…… 남소민의 조부라는 말이냐.]
“당연하지. 설마 그런 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바, 바보 같은 질문이군.]
“너야말로.”
[끄응…… 혈연관계를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보통 인간들은 난리통에 가족을 챙기려고 하잖아? 그런데 어째서 네 딸은 할아버지에 대해서 한 번도 물어보지 않지?]
“평범한 인간이면 그렇지. 조금 전에 말했잖아. 그 인간은 가족을 버렸다고. 소민이는 할아버지의 존재를 모른다.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고 알고 있거든.”
[허허…….]
요르는 남궁에게서 느껴지는 분노, 아니, 분노를 뛰어넘는 살기에 고개를 저었다.
[위상들의 눈마저 피해 숨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조금 아까운걸. 너보다 더 대단한 자일 텐데. 그를 계시자로 뽑을 것을.]
“넌 최휘수 같은 인간이나 뽑았잖아. 그런 녀석이 낚시꾼을 상대하겠다고? 욕심이지.”
[욕심? 나 참, 너 요즘 너무 기어오른다? 위상인 내가 인간에게 휘둘릴 것 같아?]
요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지만 남궁은 오히려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다. 그자에겐 관심 끊는 게 좋아. 블랙 루트를 발견했을 때…… 전생에서도 당연히 그 인간을 계시자로 받고 싶어 하는 위상들이 있었지.”
남궁은 말했다.
“내가 최휘수의 능력을 이어받았던 것처럼. 계시자의 능력은 계시자가 죽으면 딱 한 번 이어질 수 있으니까.”
[그렇지. 미풍의 어머니와 화롯불을 다루는 자가 새로운 계시자를 뽑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니까.]
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과 너는 다르다. 전생의 너는 내게 인정받지 않고 계시자에게 힘을 받았다면, 그 둘은 계시자가 죽음으로써 위상들에게 새로이 선택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한 번이라는 제한은 유효하잖아. 그렇지 않다면 계속해서 계시자를 갈아 치워 버릴 테니까.”
[그렇지. 그 말은 나도 한 번은 기회가 있다는 건데…… 이참에 그 양반을 노려봐?]
“넌 최휘수를 죽였잖아.”
[그 녀석은 계시자의 시험을 치르기 전이었으니까. 규율에 어긋나지 않지.]
“마음대로 해봐. 하지만 조금 전에 난 말했다. 전생에서도 그 인간을 노리던 위상들이 있었다고.”
[그래서?]
“하지만 대마족의 퀘스트를 끝낸 건 나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 텐데.”
[크큭, 네 아비보다 네가 더 뛰어나다고 말하고 싶은 게냐. 클클, 하여간 자존심은 강해서 말이지.]
“그 반대야. 그자는 위상과 계약을 맺었었다. 하지만 위상에게 죽임을 당했지.”
[무슨 소리야. 위상이 계시자를 죽이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만큼 제어할 수 없는 인간이란 뜻이다.”
요르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남궁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괜히 엮이려다 골치 아프기만 할걸. 쓸데없는 욕심은 버리고 나한테나 더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얘기하니 더 궁금한데? 좋아. 그럼 이건 얘기해 줄 수 있겠지. 전생에 누가 그자와 계약을 맺었지?]
“미래 발설은 위상들 사이에서도 금기 아니던가?”
[이제 와서 뭐 어때. 네가 회귀자라는 건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는데.]
“해와 달의 관망자. 그가 내 아버지와 계약을 맺었었다.”
남궁은 그의 대답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해와 달이라…… 이거 참 묘한 일이로군. 전생과 지금은 분명 다르게 흘러갈지언대.]
요르는 눈빛을 빛냈다.
[지금 해와 달의 관망자는 계시자를 두고 갈림길에 놓여 있는 상황이지.]
사실상 계시자의 힘을 잃은 알렉 트라만을 봤을 때 지금 해와 달의 관망자의 계시자 자리는 공석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네가 그 녀석을 다시 계시자의 자리로 돌려놓으라고 한 이유를 알겠군. 행여나 그자가 계시자로 선택받게 된다면…… 가족에게 검을 드리우게 되는 꼴이니까.]
“……딱히. 소민이에게 못 볼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야.”
[그래, 그래. 그렇다고 해두마.]
남궁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요르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나저나 블랙 루트를 열게 되면 다른 위상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솔직히 그 낚시꾼인가 하는 길잡이가 던전의 이면을 찾았다고는 해도 한참 뒤에나 가능할 터.]
촤르르륵……!!
요르가 손을 뻗자 허공에 수십 개 던전의 형상들이 홀로그램처럼 나타났다.
[그걸 앞지른다는 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강력한 회귀의 특전이란 말이지.]
“회귀할 수 있는 퀘스트를 만든 것 자체가 그런 모든 특전을 앞지를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감내한다는 것 아닌가?”
[뭐, 반쯤은 장난삼아 만든 것도 있긴 하지만…… 회귀와는 별개로 카니발의 참가자들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은 있다.]
“전생의 낚시꾼은 그 건드려서는 안 될 걸 3번이나 공략했는데? 어째서 그는 그냥 두었지?”
[그거야 모르지. 나는 전생을 살지 않았으니까.]
요르는 대수롭지 않은 척 얘기했지만 사실 궁금했다. 남궁의 친부라는 자가 과연 어떤 자이길래 계시자도 아니면서 블랙 루트를 알게 되었는지 말이다.
“어쨌든 나는 간다. 방해한다 하더라도 상관없어. 애초에 너희가 던져준 이 지도 자체가 함정이었으니 할 말 없겠지.”
[네가 그렇다면 나는 막진 않을 거다. 하지만 관여할 수도 없는 일이니…… 부디 살아서 돌아오길 바라마. 네가 죽으면 새로운 계시자로 네 아비를 찾아볼 테니 말이지.]
“얼마든지.”
남궁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솨아아악……!!
요르는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고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온 남궁은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공간은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우(无)의 탑도 아무렇지 않던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이상하군.]
“위상을 만나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니까. 특히나 요르…… 일곱 뱀의 주인은 우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놈이거든.”
[하긴, 의아하긴 하더군. 원래 일곱 뱀의 주인이란 분란을 조장하는 자리니까. 위상과 위상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끊임없이 갈라놓게 만드는 존재인데…….]
라테아는 자신이 겪었던 카니발에서의 일곱 뱀의 주인을 떠올려봤다.
그때도 지금처럼 8명의 위상이 존재했다.
하지만 위상의 자리는 같아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위상은 달랐다.
그녀의 세계가 이곳과 다르듯이 말이다.
각설하고 지금의 요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의문 투성이었다.
그녀가 겪었던 일곱 뱀의 주인은 그야말로 포악하고 잔인무도한 존재였다.
[같은 자리의 위상인가 싶을 정도로 그놈과는 너무나도 다르군.]
“그건 당신이 일곱 뱀의 주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는 분란을 조장하는 자가 아니야.”
[흠……?]
“일곱 뱀은 그저 유흥을 좋아하는 것뿐이야. 단지 그 상대가 위상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이 말이지.”
남궁은 나지막한 목소리고 말했다.
“설령 자신의 계시자라 한들 녀석은 유흥을 위해 이용할 거다.”
[네 편이기 때문에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저 아직은 나를 돕는 편이 더 재밌기 때문일 뿐이야.”
보이는 것과 달리 요르와의 만남은 목숨을 건 줄다리기와 같았다.
끊임없이 그를 자극하고 자신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게 하는 것.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만약 내가 블랙 루트를 공략한다면 녀석은 알게 모르게 날 도와줄 수밖에 없을 거야.’
지금껏 누구도 던전의 이면을 공략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사실이 전생에선 깨졌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그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보고 싶을 것이다.
인간이 블랙 루트를 공략하는 것을 말이다.
‘다른 위상들이라면 오히려 막으려고 난리겠지만…… 애초에 놈은 위상들끼리 벌이는 카니발의 경쟁 따윈 관심 없으니까.’
그가 일곱 뱀의 주인을 위상으로 고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전생에 그런 자가 있었다 한들 네가 공략법까지는 알지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 생각이지?]
“당신 말대로야. 전블랙 루트를 공략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 인간은 만난 적이 없거든.”
[혈연인데 생사도 몰랐단 말인가.]
“대마족의 퀘스트를 내가 끝냈으니 생사는 알지. 어디선가 죽었단 뜻이니까.]
[……그건 그것대로 씁쓸하군.]
라테아는 남궁의 말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지만 남궁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
“블랙 루트의 공략법이야 지금 시점에선 누구도 몰라. 하지만 공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를 데려가면 되겠지.”
[설마…… 방금 말한 그 낚시꾼?]
“맞아. 그 인간을 만나러 갈 거다. 어떤 시기에 그가 블랙 루트를 공략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기와 상관없이 당장 지옥 불에 던져놓아도 살아 돌아올 인간이니까.”
던전의 이면(裏面).
모든 것이 뒤집힌 세상.
입구는 출구가 되고 출구는 입구가 되는 기현상의 세계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발을 들여놓는 순간 뇌에 쏟아지는 상방된 인지(認知)에 뇌가 터져 버릴 수도 있었다.
남궁은 그런 위험천만한 곳을 가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부자(父子) 간의 오붓한 만남이로군.]
“아주 오붓한 만남이지.”
그는 라테아의 말에 던전의 지도가 그러져 있는 양피지를 전대에 찔러 넣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니까…….”
남궁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슬쩍 들어 보였다.
“칼 좀 갈고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