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탕-! 타탕--!!!
총탄이 빗발치는 이곳은 전장이 아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번창했던 남미의 대도시 상파울로였다.
피해는 심각했다.
어쩌면 ISR의 활동으로 인해 무너진 중동보다도 도시의 상태는 더 피폐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물의 침공으로 인한 피해도 있었지만, 이곳이 이 정도로 무너진 이유는 도시를 지킬 인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패한 경찰들은 마물의 침공 이후 서로 살아남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각종 불법을 일으키는 카르텔과 힘을 합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헤드를 얻기 위해서라면 일반인들도 서슴없이 죽였다.
‘파벨라’라 불리는 브라질의 슬럼가를 장악한 그들은 민병대를 형성하여 지금은 오히려 도시를 자신들의 발아래 두고 있었다.
“고개 숙이거라, 아가야.”
사실상 6번째 보스 몬스터인 거암귀의 피해가 전무했던 이곳은 노력 여하에 따라 가장 먼저 회복 할 수 있었던 도시였을지도 모른다.
타앙-! 타다다당---!!!
그러나 권력의 힘을 가진 자들의 욕심이 만들어낸 결과는 테러 집단이 벌인 짓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괜찮다. 괜찮아. 걱정 말거라.”
세월의 흔적으로 두터워진 손이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무너진 건물의 잔해 뒤에 숨어 있던 노인은 아이의 허리를 감싸 들어 올리며 말했다.
“혹시 남아 있는 친구들이 있느냐.”
유창한 에스파냐어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노인을 바라봤다.
“파라이조폴리스(Paraisópolis)에…… 다들 모여 있어요.”
아이가 말한 곳은 상파울로 내에 가장 큰 파벨라 중 하나였다. 저 멀리 판잣집들이 즐비한 슬럼가를 바라보며 노인은 말했다.
“흐음, 제법 거리가 있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거지?”
“먹을 걸 구하러…….”
아이의 시선이 간판이 바닥에 떨어진 식품 가게로 향했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이곳까지 내려온 것이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무너진 건물들뿐. 그곳에서 뭔가를 얻긴 힘들어 보였다.
“가지고 있던 헤드는? 그걸로 음식을 살 수 있을 텐데. 6번째 문이 닫히면서 제법 적잖은 헤드가 들어오지 않았느냐.”
하지만 노인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 빼앗겼어요.”
“누구에게?”
“민병대들에게요. 도시를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모두 가져갔어요. 그리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먹을 걸 주지도 않아요.”
“……할당량?”
“저기 대성당에 자라나 있는 바위산이요. 저희 같은 아이들에게 저기서 광석을 캐는 일을 시키고 있어요.”
검은 어금니(Black Molar).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의 인식 속에 나타난 검은 산.
주위는 마물이 가득했고 산을 이루며 쌓여 있는 바위들은 독성까지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건 쌓여 있는 바위의 모습이었다.
마치 해골 같은 형상의 기괴한 바위들로 인해 처음에 사람들은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바위 안에서 룬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검은 산은 사람들도 가득해졌다.
“네 말은 지금 검은 산의 바위를 채취하고 있는 게 너희 같은 어린아이들이란 말이지?”
“네. 맞아요.”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한 듯 입술이 새하얀 각질로 뒤덮여 있었고 안구의 흰자위는 누렇다 못해 시커멓게 보였다.
“내 지금껏 여러 나라를 돌아봤지만 이런 쓰레기 같은 곳은 또 처음이군. 세계연합인가 뭔가 하는 버러지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얘야, 일단 이걸 먹어라.”
그는 입고 있는 조끼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작은 병들 중 하나를 꺼내 아이의 입에 밀어 넣었다.
“……?!!”
꿀꺽- 꿀꺽-
말릴 새도 없이 밀려들어 오는 비릿한 액체에 아이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
하지만 그것을 다 마셨을 때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노인을 바라봤다.
“좀 편해졌지?
전신에 감도는 은은한 충만감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성자(聖子)세요?”
“껄껄, 그건 그냥 적색지대에 살고 있는 흰복어를 달여서 만든 것일 뿐이란다.”
별거 아닌 듯 노인은 말했지만 끔찍한 지옥 같은 상황에서 아이에게 그는 그 어떤 계시자보다도 위대한 존재로 느껴졌다.
“이 할아버지는 성자같이 거창 한 게 아니다. 그냥 평범한 낚시꾼이지. 그래도 조금 도움을 줄 순 있겠구나.”
“도움이요?”
“그래. 네 친구들을 구해줄 수 있을 것 같거든. 거기로 안내해 주겠니.”
“아,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디에고가 할아버지를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
“디에고? 그게 누구냐.”
“검은 어금니를 점령하고 있는 민병대 대장이요. 그를 따르는 사람만 수백이라고요. 걸리면 분명 죽을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이의 이마를 가볍게 쓸며 노인은 웃었다.
“그래도 이런 시궁창 속에 너희 같은 아이들을 그냥 둘 수는 없지. 나도 너만 한 손녀딸이 있거든.”
“그 아인 좋겠어요.”
노인의 말에 아이는 눈을 반짝였다.
“너만 한 손녀딸? 거참 말도 예쁘게 잘하십니다. 자기 자식은 내버려 두고 남의 자식들만 돌보니 성자 소리도 듣고 말이죠.”
하지만 그때였다.
아이가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툭-
“……!!”
그리고 바닥에 기절한 경관을 보며 아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마도 노역장에서 도망친 자신을 쫓아온 자가 틀림없었다.
“걱정 마라. 뒤에 남아 있던 다른 녀석들도 처리했으니까.”
“다, 당신은…….”
하지만 경관의 얼굴보다 더 낯익은 얼굴이 있었으니, 아이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저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네놈이 왜 여기 있는 거냐.”
“그건 내 쪽에서 묻고 싶은 말인데요. 몇 년 동안 소식도 없으시더니 이런 데서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남궁이었다.
“아버지.”
만약 아이가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더라면 노인을 향한 호칭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었다.
“새삼 화를 낼 일도 아니잖냐. 우리가 서로 안부를 전하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야.”
그는 남궁의 부름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네놈이야 TV에서 주구장창 나오니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다만.”
“아버지도 찾으려면 못 찾을 것 없죠. 하늘에 보는 눈이 수십 개나 떠다니는데.”
전생엔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거리의 CCTV는 당연하거니와 위성들까지 모조리 마물의 침공으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으니까.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현대의 기술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사람 하나 찾는 것쯤이야 일도 아닙니다.”
“사인이 그 녀석이냐. 너희는 여전히 몰려다니나 보구나.”
“누구처럼 도망치듯 부대를 버리고 떠나진 않았거든요.”
“흥, 부대를 해체한 녀석이 잘난 듯 말하긴…… 예나 지금이나 네 녀석은 너무 물러. 맺고 끊음이 확실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주위를 가리켰다.
“최명훈인가 하는 녀석. 네 똘마니 중 하나였지? 어리숙하게 생겨서는…… 그런 녀석이 세계연합 수장에 걸맞다고 생각하느냐?”
“…….”
“제대로 일은 하고 있냐는 말이다. 이 꼴을 좀 봐라. 응?”
“명훈이는 당신이 평가할 만큼 서투른 녀석이 아닙니다. 사인이 또한 마찬가지고.”
“내 눈엔 그저 소꿉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만?”
“일에는 중요도가 있으니까. 우리는 당신처럼 유유자적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노는 인간이 아니거든.”
“말하는 꼴 좀 보게. 애비에게 당신이라니. 쯧쯧…….”
조금 전 아이에게 다정히 말하던 모습과는 달리 남궁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당신이 내게 일 처리를 논할 자격이 있을까? 당신이 내게 711 부대를 넘기지만 않았어도 수아가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
날카로운 그의 말에 남기철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아이가 그렇게 된 건 유감이지만, 711부대를 네가 맡게 된 건 내 독단이 아냐. 원망할 거면 내가 아니라 국가를 탓해라.”
남기철은 남궁을 바라봤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711 이후 더 중요한 임무가 있었으니까. 알겠냐. 나는 네 녀석처럼 무르지 않아.”
툭-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남궁이 남기철의 앞에 뭔가를 던졌다.
“그렇게 말하니 다행이네. 이제부터 당신도 제대로 일을 좀 해야 할 거야.”
“……뭐?”
“남기철 전(前) 중령. 당신이 그렇게 따르는 국가의 부름이다. 나와 함께 가줘야겠어.”
“무슨 꿍꿍이지? 너와 내가 함께 임무라고? 네 녀석, 나와 함께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 했잖아.”
“싫지. 하지만 그런 감정은 임무를 함께해야 할 파트너에게나 갖는 거지 임무에 필요한 도구에 가지진 않거든.”
“허허, 지금 내가 네 도구라는 말이냐. 사람을 도구로 쓰고 많이 컸구나. 아들.”
남기철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당신도 다를 바 없잖아.”
남궁은 남기철의 품 안에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이봐, 꼬마. 저 인간은 네 친구들을 구해주려는 게 아니라 그냥 널 이용해서 검은 어금니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뿐이다.”
“……네?”
“저 인간이나 민병대나 다를 것 없어. 이용해 먹기 편한 녀석들을 노리는 거니까.”
“싹퉁머리 없는 말투는 여전하구나.”
“그, 그게 진짜예요?”
떨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향해 남기철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하여간 이 자식은 쓸데없는 소리나 하긴…… 그런 거 아니니 걱정 마라.”
“설마 개과천선이라도 했단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시끄럽고 일이나 하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네 말대로 나도 저 산에 볼일이 있는 건 맞으니까.”
남기철은 손을 털며 말했다.
“얘야. 여기서 500미터 정도만 가면 빨간 지붕의 집이 있을 거다. 안전한 곳이니 거기에 있거라.”
“친구들…… 구해주시는 거죠?”
“당연하지.”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달려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날 버릴 때랑은 다르군.”
“네 녀석은 귀엽지가 않았으니까.”
“……미친.”
남기철은 어이없다는 그의 반응을 보며 품 안에서 투박한 너클을 꺼내 손에 끼웠다.
“배웠던 것들은 잊지 않았겠지?”
“당신한테 배운 것들은 이제 쓸 필요도 없어.”
“그 시커먼 소환수들 말이냐? 그런 것에 의지하지 마라. 너무 과한 힘은 인간성을 무너뜨릴 뿐이야.”
“그럼 당신은 이능의 힘을 하나도 쓰지 않는다는 건가?”
“쓰지. 약초술과 잡다한 조합술 몇 가지를 헤드를 주고 샀거든.”
남기철은 조끼에 달려 있는 각종 약병들을 보이며 말했다.
‘정말 전투 관련된 스킬을 하나도 익히지 않은 건가? 뭐…… 저 인간이야 워낙 괴물 같은 작자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으로 블랙 루트를 공략한 건 말이 안 되는데.’
남궁은 그의 말에 더욱 의문이 들었다.
“여튼 나와 있을 땐 그 힘은 쓰지 마라. 나서지도 말고. 대신 넌 내가 싸우는 걸 지켜봐라.”
“TV에서 날 봤다면서? 내가 어떤 괴물들을 죽였는지 잘 알 텐데. 그런데 지금 내게 당신이 싸우는 모습이나 보라고?”
“그럼.”
남기철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날 철천지원수라 생각하는 네가 고작 정부의 임무로 날 찾아왔을 리 없거든. 네 목적은 임무가 아니라 나일 테니까. 내게서 뭔가를 얻고자 한다면…….”
꽈악-.
그는 너클을 낀 주먹에 힘을 주었다.
“내가 싸우는 걸 봐야지 않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