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단숨에 보스 룸까지 올 수 있다니…… 이런 식으로 던전들을 공략했던 건가? 거저먹는군.”
“클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녀석이군. 어디 죽는 게 쉬운 것 같더냐.”
“정말로 죽는 것도 아니잖아.”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사실 남궁으로서도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긴 했다.
갑작스러운 죽음도 아니고 강제적인 죽음도 아닌,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 아주 천천히 자신을 옭아매는 경험은 지금껏 겪었던 그 어떤 것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정말로 죽는 거다.”
“……뭐?
“정말로 죽는 거란 말이다. 블랙 루트에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가기 위해서 무조건 던전의 심층부를 공략해야 한다.”
남기철은 앞에 세워진 신전을 바라봤다.
“그리고 심층부에 가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 경험을 무시하지 마라.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이니까.”
“죽음의 경험이…… 신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군.”
“맞아. 너는 분명 죽었다. 설사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더라도 정신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지. 그 쌓이고 쌓인 경험이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면…… 단순히 정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육체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말은 계속해서 블랙 루트를 공략하게 되면 정말로 죽게 된다는 말인가?”
“맞아.”
“얼마나 많은 블랙 루트를 경험하면 그렇게…… 되는 거지?”
남기철은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른다. 두 번일지 세 번일지.”
그 순간, 남궁은 전생의 남기철이 3번의 블랙 루트를 공략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후 그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누구도 모른다.
‘세 번…….’
그의 죽음이 블랙 루트로 인한 건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지만, 남궁은 어쩐지 그 세 번이라는 남기철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나로 인해서 하지 않아도 될 블랙 루트를 경험하게 되었어. 만약 그의 죽음이 블랙 루트로 인한 거라면…….’
어쩌면 자신 때문에 그 죽음이 빨라지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내 걱정을 하는 거냐? 걱정 마라.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궁금한 건 아니니까. 말년에 뺑이칠 생각 없다. 적당히 살 만큼만 강해지면 나머진 네가 알아서 하겠지.”
“어떻게 블랙 루트를 찾으신 겁니까.”
“녀석, 궁금한 게 있으니 말투부터 달라지는구만. 한 번 정도는 죽을 만한데? 이제 좀 굽힐 줄 알게 된 게냐.”
남기철은 웃음을 터뜨리며 남궁을 놀리듯 말했다.
하지만 남궁은 목적이 있어서 태도를 바꾼 것이 아니었다.
블랙 루트의 공략법을 알게 된다면…….
어쩌면 목숨을 갉아먹는 대가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 걱정이라고 하는 거다.]
“…….”
라테아의 말을 무시하며 남궁은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건 여길 끝내고 나면 알려주마. 방법을 알려주면 네 녀석은 분명 따라해 볼 거잖아.”
남궁을 잘 알고 있는 남기철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들어오기 전에 웃음소리가 들렸지? 여긴 던전의 배 속과 같다. 그놈들은 여기에 갇힌 영혼들이지. 좋든 싫든 블랙 루트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이상 공략하지 못하면 우리도 놈들과 똑같이 될 거다. 영원히 던전의 배 속에 삼켜진 먹잇감이 되는 거지.”
“그럴 일 없어.”
“질문에 대답 안 해줬다고 금세 말투가 바뀌다니. 하여간 쪼잔 한 녀석.”
“당신……!!”
뭐라 소리치려던 남궁은 이내 곧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다물었다.
“일단 여기서 나오고 나서 얘기하죠.”
“그래, 그래야지.”
우우우우웅…….
남기철이 문에 손을 가져가자 문에 새겨진 문양에 물이 차오르듯 서서히 빛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번개나락의 보스에 대해서 아느냐.”
“우레왕이라 불리는 거인. 놈이 부리는 정령들은 1등급 번개 마법을 쓸 수 있는 최상급 정령이야. 현존하는 아이템으로는 막을 방법이 없어.”
“그래? 그럼 제대로 죽으러 온 게 맞군.”
“……뭐?”
“블랙 루트는 던전의 본질을 깨운다. 그 말은 현실 세계에 동화되며 열화된 힘을 온전하게 쓸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이지.”
“보스가…… 더 강해진다는 말인가?”
“잡몹들을 처리하지 않고 단박에 보스 룸에 도착했으니 그 정도 값은 치러야지.”
“그 값은 목숨으로 충당한 게 아닌가?”
남궁은 인상을 찡그렸다.
“사람 목숨만큼 때론 하찮은 것도 없지.”
“……제길.”
그런 그를 보며 어쩐지 즐겁다는 듯 남기철은 문을 있는 힘껏 밀었다.
▶ 우레의 전당에 입장하였습니다.
▶ 침입자의 인기척에 잠들어 있던 왕이 깨어납니다.
▶ 나락의 주인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콰강……!! 콰가가가강……!!!!
문을 열자 마치 왕좌처럼 생긴 높다란 절벽 위로 새하얀 피부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너희는 누구냐.]
‘블랙 루트에도 보스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 건가.’
전생에 번개나락을 공략한 경험이 있는 남궁은 이곳의 보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진입 경로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다행히 눈앞 보스의 모습은 익숙한 그대로인지라, 그는 적어도 보스 공략에 있어서는 안도할 수 있었다.
‘강함을 떠나 사용하는 능력의 종류가 똑같다면…… 승산은 있다.’
우레왕의 가장 큰 능력은 연쇄 번개와 순간 빙결.
“놈의 범위 안으로 절대로 들어가지 마십쇼. 얼어붙는 순간 즉사니까.”
“얼어붙어? 번개를 쓰는 게 아니고?”
“녀석의 번개는 얼어붙은 대상에 한해서 위력이 급증하거든. 뭐…… 지금 시점에서는 얼어붙지 않아도 번개 한 방에 즉사겠지만.”
남기철은 남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더는 네게 맡기마.”
그는 망설이지 않고 남궁에게 전투를 맡겼다. 전투에 있어서는 스페셜리스트였기에 자존심보다는 승산이 높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로서 놈을 잡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해. 하나는 미끼, 다른 하나는 후위를 잡는 것. 놈의 번개 구슬을 파괴해야 하는데 실수라도 하면 죽을 겁니다.”
“으흠, 알겠다. 구슬은 내가 맡지.”
남궁의 말에 남기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역할을 정했다.
“쓸데없는 객기 부리지 말고 미끼나 되십시오. 블랙 루트를 찾아 낸 건 대단하지만 당신 실력으로는 구슬을 파괴하는 건 무리야.”
“객기라니…… 하여간 이 자식 못하는 소리가 없네?”
“……죽지 말라는 뜻이니까. 눈앞의 적은 인간이 아니라 마물이니. 마물을 잡으려면 나도 마물이 되어야 하는 법이거든.”
“또 그 이능의 힘을 쓰려는 거냐.”
“어차피 블랙 루트를 연 것도 크게 본다면 이능의 힘인 거잖아?”
“다르다. 이 힘은…….”
남기철은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감히 내 앞에서 잡담을 나누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녀석들이로구나.]
그때였다.
우레왕은 자신의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콰가가가강---!!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휘젓자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번개가 떨어졌다.
티격태격하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번개가 떨어지는 순간 마치 서로 짠 것처럼 일말의 대화도 없이 본능적으로 산개했다.
“여기다!!”
미끼를 자처한 남기철이 품 안에서 약병을 꺼내 우레왕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펑-! 퍼퍼퍼펑--!!
유리병이 깨지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가루들이 폭죽처럼 사방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놈……!!]
우레왕은 귀찮은 듯 주위에 솟아오르는 가루들을 손으로 내저었다.
“죽지 말라니…… 나도 미친 소리를 했군.”
남궁은 미끼가 된 남기철을 보며 쯧-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스스슥…….
여전히 영혼 병사들의 소환은 불가능했다.
블랙 루트의 특성상 영혼계의 힘은 보스 룸에서도 똑같이 사용할 수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이능의 힘은 사령술만이 아니었다.
화르륵-!!! 콰강-!!
요란한 폭음과 함께 남궁의 발아래에서 맹렬한 불꽃이 일었다.
【맹화장】에서 솟구친 화염을 딛고, 남궁이 우레왕의 뒤로 돌아섰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절벽의 끝.
퍼억-!!!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따라 달리던 남궁의 앞에 거대한 망치가 떨어졌다.
“큭?!”
망치가 바닥을 때리자 절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충격과 함께 중심을 잃은 남궁의 몸이 부서진 절벽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궁아!!!”
남기철이 그 광경에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탓-! 타탓--!!
하지만 떨어지는 바위들을 밟으며 남궁은 아슬아슬하게 절벽의 끝으로 올라섰다.
“저 자식…… 놀라게 하긴.”
남기철이 안도하는 것도 잠시, 이미 남궁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원시 아룡의 팔찌를 사용합니다.
▶ 석화의 보석이 발동됩니다.
▶ 어룡의 보석이 발동됩니다.
남궁의 주위로 수어들이 소환되었다.
동시에 그가 팔을 뻗자 두터운 바위벽들이 바닥에서 솟아났다.
[그따위 것으로 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우레왕의 외침과 함께 석화의 보석으로 만들어진 바위벽 위로 날카로운 번개가 떨어졌다.
치직……! 치지지직……!
하지만 놀랍게도 조금 전과 같은 위력은 없었다.
우레왕의 번개가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수어들이 흩어지며 그의 번개 또한 흩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구경만 할 겁니까!!”
남궁의 외침에 남기철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저기 있다.’
바위벽 사이사이로 숨으며 달리는 남궁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절벽 난간에 떠 있는 번개 구슬이었다.
우레왕의 힘의 원천이자 약점.
‘저걸 부수게 되면 놈은 힘을 잃고 만다.’
문제는 자칫 잘못해서 번개 구슬이 폭발하게 되면 공략은커녕 일대가 쑥대밭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꿀꺽-
남궁의 손에 들려 있는 【개명검】의 끝이 파르르 떨렸다.
‘긴장하고 있는 건가.’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넘었던 자신이 고작 이런 상황에 떨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
하지만 곧 남궁은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의 실패로 인해 혹여나 아버지가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우스웠다.
오랜 세월 깊어진 골은 이미 채울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가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집중하기 힘들었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 거냐.”
그때였다.
놀랍게도 우레왕의 번개를 피하며 남기철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소민이랬지? 너와 수아의 딸 말이다. 그 어린아이는 믿으면서 나는 못 미덥다는 말이냐.”
“당연한 소리를…… 소민이의 마력 자질은 최상급이라고. 당신처럼 아무 능력 없는…….”
남궁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번개를 피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이쪽으로 올 수 있었던 거지?’
“아들아. 내가 네게 이능의 힘을 쓰지 말라고 한 건 말이다. 모두 나 때문이다.”
“……!!!”
“내가 이능의 힘을 쓰면.”
그 순간, 남기철이 번개 구슬을 움켜잡았다.
“자, 잠깐!!!”
그의 모습에 깜짝 놀란 남궁이 소리쳤지만 남기철은 보란 듯이 구슬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정말 내가 괴물이 되거든.”
콰직---!!
구슬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