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콰그그극……!!!
남궁은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번개 구슬을 손으로 잡은 남기철이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부숴 버린 것이었다.
“어떻게……?”
하지만 남기철은 대답 대신 산산조각 난 번개 구슬의 잔해를 그가 보는 앞에서 뿌렸다.
▶ 우레왕을 처치하였습니다.
알림은 간결했다.
한데 신기하게도 일반 보상이라든지 하는 그런 것들은 없었다.
대신 우레왕의 시체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몇 개의 무구가 상자에 들어 있지도 않은 채 바닥에 떨어졌다.
‘우(无)의 탑에서 아룡들을 잡았을 때와 비슷하군. 시체가 사라지고 보상 상자가 남는 게 아니라 마치 진짜 현실의 생물을 죽였을 때 같은…….’
어쩌면 블랙 루트가 던전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현실과 융합된 것이 아닌 진짜 던전.
“흐음, 벨트 하나에 써클이 하나 나왔군. 필요한 게 있느냐.”
남기철의 손에 들린 두 개의 무구.
넘버링 41.
이름 : 우레왕의 허리띠.
등급 : 에픽(최고-상위)
▶ 우레왕이 사용하던 허리띠. 번개를 투창처럼 허리띠에 꽂을 수 있게 만들어졌다.
▶ 소지자에게 2등급(+1) 번개 내성 부여.
▶ 체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준다.
▶ 번개의 힘을 저장할 수 있다.
‘상위’라거나 등급에 ‘플러스’가 붙어 있는 등 남궁으로서도 처음 보는 옵션들이 있었다.
‘일반 에픽 무구보다 성능이 더 좋다는 뜻인가.’
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잡은 것도 아닌데. 필요한 게 있으면 쓰시죠.”
“다 늙어서 내가 이런 걸 머리에 쓸 건 아니고…… 이건 가져가서 소민이에게 줘라.”
넘버링 27.
이름 : 얼음꽃 써클릿
등급 : 에픽(최초)
▶ 우레왕의 아내 가이나스의 써클릿.
▶ 소지자에게 1등급 빙결 내성을 부여.
▶ 마력을 정령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게 해준다.
▶ 눈꽃 여왕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 빙결 지대 - 주의 : 막대한 마력을 요구합니다.
반짝이는 크리스탈로 되어 있는 써클릿은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느껴졌다.
“소민이는 할아버지가 있다는 걸 모릅니다.”
“다행이군. 네 녀석이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지 않나 싶은데.”
“그게 지금 할 소리입니까.”
“평생 나를 모르게 해줘라. 애비로서 부탁하마.”
“…….”
남궁은 오히려 먼저 거절하는 남기철의 모습에서 어쩐지 화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
“부탁……? 그게 할 소립니까.”
“음?”
“가족을 버리고 떠난 주제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부탁한다고 하는 거냔 말입니다.”
그는 써클릿을 남기철에게 던졌다.
“내가 사냥한 게 아니니 내 것이 아니지. 주고 싶으면 당신이 주든가. 소민이의 앞에 나타날 자신이 있다면 말이야.”
남기철은 그의 말에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뭘 하는 거지?”
그에게 써클릿은 던져주고, 남궁은 우레왕의 시체에서 뭔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던전이라면 기본 보상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시체 속에 손을 집어넣은 그는 내장을 뽑아내어 그 안에 있는 작은 구슬을 뽑았다.
치직…… 치지직…….
“우레왕의 뒤에 있던 번개 구슬과 닮았군.”
남기철이 그것을 보며 말했다.
“같은 겁니다. 단지 아직 미완성이라서 이렇게 잡을 수 있는 거지만…… 이걸 가이나스에게로 가져가면 온전한 번개 구슬을 만들 수 있거든.”
“자신의 남편을 죽인 자에게 구슬을 만들어 준다고? 마물이라서 애정도 없는 건가. 복수도 하지 않는다니…… 이해가 안 되는군.”
“그녀와는 거래를 할 거니까. 그녀는 번개 구슬을 완성할 수밖에 없어. 자신의 아이에게 줘야 하니까.”
“아이……?”
“우레왕의 마지막 핏줄이지.”
남궁은 남기철을 바라봤다.
“인간보다 낫지.”
“…….”
구슬을 전대 안에 넣으며 남궁은 입을 다문 남기철에게 말했다.
“7번째 문의 보스인 샐러맨더는 그다지 어려운 마물이 아니거든. 놈의 보석은 이미 얻었고……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거니까.”
그는 샐러맨더를 포함한 나머지 아룡들은 스펙 업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이거라면 다다음 문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는 되겠지.’
죽음의 경험은 끔찍했지만 번개 나락에서 원하는 보구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돌아가죠.”
솨아아아악……!!
남궁은 던전의 출구를 향해 성큼 걸어갔다.
적어도 출구만큼은 블랙 루트라 할 지라도 그가 알고 있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 * *
“이제 말하는 게 어떻습니까.”
“무엇을 말이냐.”
“어떻게 블랙 루트를 발견했는지 말입니다.”
세기의 던전을 공략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기뻐하거나 환호하는 모습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던전을 공략하던 순간이 차라리 덜 어색한 게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말했잖느냐. 이것저것 잡다한 능력들을 배우다 보니…… 익히게 된 거라고.”
“그런 걸로 익힐 수 있는 능력이 아니란 걸 본인도 아시지 않습니까. 만약 그런 어정쩡한 잡기들을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거라면 차라리 당신에게 기술을 가르쳐 준 스승들이 오히려 블랙 루트를 볼 가능성이 높겠지.”
“글쎄. 때로는 너무 정통한 것이 독이 될 수도 있지. 그들은 자신이 잘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니까.”
“정말로 그 때문입니까? 카니발의 자질은 후천적으로 익히는 것도 있지만…… 진짜 능력은 선천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소민이의 마력처럼 말이냐.”
남기철은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수아의 일은 유감이다.”
“됐습니다. 결혼식 때도 본 적이 없는 사이인데 슬플 이유도 없죠.”
애초에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지도 않았던 그였지만 말이다.
“그래. 유감을 표해야 할 일은 수아가 아닌 네게 해야 하는데 말이다. 네 엄마가 세상을 떠날 때도 가지 못했으니.”
“그게 제가 가장 화가 나는 일입니다.”
남궁은 그를 노려봤다.
“어머니의 임종 때 당신이 오지 않았던 게 아니라…… 나 역시 아내가 떠나는 걸 보지 못했다는 것 말입니다. 죽어도 당신처럼 살고 싶지 않았는데.”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남기철의 귀를 찔렀다.
“내가 똑같은 짓을 했거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느냐. ISR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황금가지들이 그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711부대를 당신이 계속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빌어먹을, 부대에서 다시 만났을 때 차라리 내가 먼저 때려 치웠어야 했는데…….”
“…….”
남기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네가 어렸을 때 너희들을 버리고 떠난 것도 맞고, 네가 711에 입대했을 때 널 대장으로 앉힌 것도 맞다. 하지만 모두 널 위한 것이었다는 것만 알아다오.”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죠. 결국 블랙 루트를 여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거니까.”
남궁은 그에게 말했다.
“아직 공략해야 할 던전이 두 개 더 남았지만…… 어쩔 수 없죠. 혼자서 블랙 루트를 열 수도 없고. 두 개의 던전까지 모두 공략하게 되면 앞으로 있을 마물들의 침공을 훨씬 더 수월하게 막을 수 있을 텐데.”
“조금 전에 죽음을 겪어본 녀석이 그런 소리가 잘도 나오는구나.”
“고작 내 죽음 몇 번으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니까.”
“네 녀석도 영웅 놀음을 하는 게냐.”
“아니. 지켜야 할 사람들 안엔 내 가족과 동료도 포함되어 있거든.”
남기철은 그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녀석, 사람 무안하게. 그냥 찔러 본 말인데 정색하기는…… 필요하면 내가 대신 블랙 루트에 다녀오마.”
“그건 안 돼!”
“왜? 너보다 내가 훨씬 더 확실하게 던전을 공략할 수 있을걸. 기억하지? 벌벌 떨던 너 대신 내가 번개 구슬을 부순 거 말이다.”
“……하여간 그건 안 됩니다. 블랙 루트를 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던전의 지도는 넘기지 않을 거니까.”
“별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구만.”
남기철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지만, 남궁은 행여나 2번의 블랙 루트를 열었다가 그에게 변고라도 생길지 모른다는 것을 차마 말하지 못했다.
“여튼…… 됐습니다.”
남궁은 머리를 긁적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진심으로 블랙 루트를 열 방법을 알고 싶은 거냐.”
“가벼운 마음이었다면 당신을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그렇다면 여길 정리해라. 네 말대로 더 많은 사람을 구할 힘을 원한다면 눈앞의 사람들부터 지켜보라는 거다.”
남궁은 주위를 훑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검은 어금니(Black Molar)라 불리는 산의 정상이었다.
밑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봤을 때 아마 입구에서 그들이 쓰러뜨린 경관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세계연합인가 하는 걸 만들었다면서. 꼭 마물의 침공을 막는 것만이 사람들을 구하는 일은 아니다. 남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야.”
“어울리지도 않는 훈계야.”
남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산 아래로 거침없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기 있다!!!”
“놈을 잡아라!!!”
주위를 수색하던 경관들이 남궁의 모습을 보더니 소리치기 시작했다.
에에에에엥……!!
사이렌이 울렸고, 막사 안에 있던 병력들까지 모두 동원되어 남궁의 주위를 둘러쌌다.
“꼼짝 마!! 손들어!!!”
“내가 누군지는 다들 알 텐데.”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경관들은 그의 한마디에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당신이 누군지는 잘 알지. 하지만 막무가내로 쳐들어와서 우리 쪽 사람들을 쓰러뜨린 이유는 들어야 할 것 같은데.”
그때였다.
경관들 사이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정부의 관할이오. 만약 타당한 이유 없이 습격을 한 거라면 세계연합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겁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힘줄이 돋아나 있는 팔뚝은 한눈에 봐도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단련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넌 누구?”
“디에고라고 하오. 이 산을 관리하고 있지.”
“아아…… 네가 그 녀석이군.”
이곳에 오기 전 만났던 소년이 두려워하던 민병대 대장이었다.
“저 산이 독성이 있다는 건 알고 있나.”
“…….”
“됐다. 일일이 말을 하는 것도 입 아픈 일이지. 알고 있으니까 지들 끼리만 방독면을 쓰고 있는 걸 텐데 말이야.”
저벅- 저벅- 저벅-
남궁은 디에고를 향해 걸어갔다.
“뭐, 좋아. 고작 이런 일로 블랙 루트를 여는 방법을 알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득이니까.”
퍼억-!!
그는 거침없이 【계명검】의 넓은 면으로 디에고의 뺨을 후려쳤다.
“컥!!!”
단발마의 비명 소리를 내뱉은 디에고의 몸이 크게 흔들리며 바닥에 처박혔다.
“다, 당신……!! 아무리 세계연합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타 국가를 무시해도 될 것 같아?!!”
“제법 튼튼한 놈이군. 한 대 맞고도 죽지 않은 걸 보니. 아니면 저 산에서 애들의 목숨으로 뜯어낸 룬으로 신체를 강화해서 그런가?”
“이 새끼……!!”
“왜? 열 받아? 네가 저 아이들에게 한 짓도 똑같잖아. 힘을 앞세워 약자들을 마음대로 써먹었으니까.”
남궁은 디에고의 얼굴을 조금 더 흙바닥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국가? 아이들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게 나라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 덕분에 좋은 본보기가 되겠어. 나라 한둘쯤은 없어지는 건 마물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일이란 걸 말이야.”
꿀꺽-
그 순간 흙가루와 함께 텁텁한 침이 디에고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