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소민이가…… 블랙 루트를 열 수 있다는 말인가?’
[글쎄. 그건 모르지. 너나 나나 블랙 루트를 여는 방법을 모르니까. 그녀의 힘이 꼭 블랙 루트의 열쇠인지 확인된 건 없어.]
라테아는 둘밖에 들을 수 없는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내 생각엔, 만약 블랙 루트를 연다면 네가 아니라 네 딸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군.]
‘……그건 절대로 안 돼.’
블랙 루트 안에 있는 던전에 들어가면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아니, 그 이전에 블랙 루트를 여는 것 자체가 생명력을 갉아 먹는 행위일지도 모르는 일.
남궁은 그런 일을 소민이 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지레 걱정할 필욘 없다. 네 딸이 꼭 블랙 루트를 열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행여나 그런 능력이 있다 한들 하지 않으면 그만이잖느냐.]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냐.’
남궁은 자신의 딸을 잘 안다.
만약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소민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해도, 정말로 필요하다면 말이다.
‘그런 일이 오지 않도록 내가 막아야겠지.’
꽈악-
남궁은 주먹을 쥐었다.
‘나와 수아가 소민이를 그냥 두지 않을 거니까.’
[그래. 그러면 된다. 모르긴 몰라도 네 아비도 비슷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르지.]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던 남궁은 라테아의 말에 차갑게 웃었다.
‘그 인간은 달라. 그 사람이 우릴 버렸을 땐 카니발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어. 세상이 멸망할 일도 없었는데 떠난 인간이니까.’
[글쎄. 모르지. 꼭 카니발이 아니더라도 위험한 일들은 충분히 세상에 많으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지. 그보다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줄 필요가 있겠어. 당신 말대로 정말 잘못해서 위층의 문을 열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그러도록 하지. 잠시 다녀오마. 상급 사냥꾼들에게 문의 경계를 두터이 하라고 전하고 올 테니.]
남궁은 라테아가 떠나자 두 아이를 바라봤다.
“너희도 명심해라. 아직 위에 어떤 자들이 살고 있는지 우리도 알지 못해. 우호적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적대적인 자들이 있을 수도 있어.”
소민과 테메르는 그의 말에 긴장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많은 사람들을 봐라. 저들은 너희와 달리 일반인들이 대부분이야. 만일 너희들의 실수로 인해 저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어떨까. 다칠 수도 있고, 혹은 사망자도 생길 수 있겠지.”
“그, 그건 안 돼요!”
테메르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래. 안 되겠지? 그러니 앞으로는 문이 있는 곳에 가지 마라. 알겠지?”
“……응.”
“알겠습니다.”
칭찬을 기대했던 소민은 오히려 남궁의 타이름에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대답하는 그녀의 입술이 삐쭉거렸다.
“꽃잎은 회의실에 달아두자. 예쁘구나.”
남궁의 말에 소민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메르, 같이 가자!”
“응응.”
테메르는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남궁에게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때?”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요란 일족과의 마찰도 생각보다 크지 않고…… 일단 아이들은 경계심이 덜하니까요. 소민이가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남궁 옆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망토를 두르고 있던 창환이 나타났다.
“그건 뭐야?”
“불가시 망토입니다. 이번에 주사인 형님이 만든 시제품인데 써보라고 하셔서요.”
“이런 건 옛날에도 개발되지 않았었나?”
“단순히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만 아니라 열 감지를 차단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저는 없지만 마력과 같은 이능 능력까지 감출 수 있다고 하더군요.”
“흐음…… 그렇군.”
투명 망토는 확실히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자들에겐 유용한 물건일 듯싶었다.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게 아마 【무늬 나비의 날개】였던 것 같은데.’
야차 보따리에서 구입할 수 있는 아이템이긴 하지만 레어 등급의 물건이라 비쌌다.
게다가 성능도 단순히 모습을 감추는 정도.
다른 감지 능력은 숨길 수가 없어 가격에 비해 유용하지 않았다.
“성채 안에 사인이가 있나? 대량 생산이 가능한지 물어보고 싶은데. 8번째 문을 막는 데 꽤 도움이 될 것 같거든.”
“주사인 형님이라면 지금 자리를 비웠을 겁니다.”
“어디 갔는데?”
“글쎄요. 후임을 찾으러 가본다던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인이 녀석,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군. 좀 더 기다리면 좋았을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창환은 어깨를 으쓱했지만 남궁은 주사인이 플레임을 찾으러 간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플레임이 정말 프로게이머 정찬호가 맞다면…… 조심해야 할 텐데 말이야.’
설마 주사인이 당하겠나 싶긴 하지만, 상대는 전생에 유명했던 화폭마다.
어쩌면 영입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뭐, 그건 녀석이 알아서 할 일이겠지. 알겠어. 훈련은 잘 되어가고 있나?”
“네. 쓸 만한 녀석들로 몇 명 뽑아서 진행 중입니다. 경인이도 잘 따라오고 있고요.”
창환은 기대하라는 표정으로 남궁에게 대답했다.
“잘 부탁한다.”
“걱정 마십시오. 그런데 벌써 가시는 겁니까?”
“그럼, 여기에 남아서 뭐 하겠어. 사인이에게 뭐 좀 알아봐 달라고 할 게 있어서 온 건데, 자리를 비웠으니 어쩔 수 없지.”
“뭔데요?”
“일전에 거암귀를 해체할 때 장길수를 영입하려 접촉한 클랜이 있었거든. 러시아의 [매머드]란 곳이었어.”
남궁은 창환에게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을 얘기했다.
“흐음…… 이상한 일이긴 하네요. 영입을 하러 온 것치고는 크게 달라붙는 느낌도 없고 말입니다.”
“영입……? 설마 녀석들이 여기에도 왔었단 말이야?”
“네. 딱히 출입 제한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현재 주거를 잃은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는 터라…….”
“언제쯤 왔었는지 기억나?”
“그럼요. 이틀 전일 겁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기억합니다.”
“누구에게 접근했는지도 아나?”
“글쎄요. 제게도 오긴 했는데 다른 사람들과 접촉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음…….”
“출입 체크를 모두 하고 있으니까 검문소에 출입자 명부와 함께 인적사항도 기록되어 있을 겁니다.”
“지금 검문소에는 누가 있지?”
“참악부대 부대원들이 지키고 있을 겁니다.”
“그래.”
남궁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녀석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 * *
“충성!”
“됐습니다. 그보다 출입자 중에 [매머드] 팀의 팀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매머드]라…… 언제쯤이신지 아십니까?”
“이틀 전이라고 들었습니다.”
“현철아, 출입자 명단 중에 클랜 명부 띄워봐.”
“네. 알겠습니다.”
우(无)의 탑 입구에 세워진 검문소에 있던 대원들은 남궁의 말에 빠른 속도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모니터로 빼곡하게 채워진 클랜 명단이 나타났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탑에 왔었습니까?”
“이건 고작 하루 명단입니다. 생각보다 우(无)의 탑을 찾는 클랜들이 많습니다. 남궁 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습니다.”
검문소 팀장의 말에 남궁은 옅게 웃었다.
“찾았습니다.”
검문소를 관리하는 참악부대의 대원이 몇 번 키보드를 두들기자 모니터로 몇 개의 이름이 나타났다.
“여기 있습니다. 마물 해체팀…… 맞으시죠? [매머드] 팀 소속의 루나 뷔엘. 아직 탑 안에 있는 모양인데요?”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으음…… 아마 거주자들이 아니라서 출입자 숙소에서 기다리면 만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머지 이름들은 뭡니까.”
“아, [매머드] 팀이 왔을 때 함께 온 사람들입니다.”
남궁은 이름을 살폈다.
‘에드워드 조, 바실리 쉬만, 갈리나 볼코프…….’
명부에는 사진도 함께 등록되어 있었지만 그들 모두 그의 기억 속엔 없는 자들이었다.
‘특별한 자들은 아니라는 건데…….’
대표자인 루나 뷔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생엔 없던 자들이야. 전생에선 일찌감치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전생엔 뛰어난 자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들이 수두룩했다.
자신의 딸인 소민만 봐도 그랬으니까.
어쨌든 정보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위험도가 얼마만큼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일단은 조심하는 게 좋겠지.’
탑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자신을 위협하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쉬운 일일 테니까.
“흐음…….”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아는 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명단을 보던 남궁은 한 사람의 정보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갈리나 볼코프…….’
모니터엔 아직 앳되어 보이는 스무 살 여성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 알지 못하는 인물이다.
다만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건 그녀가 아닌 그녀의 성(姓) 때문이었다.
볼코프(Volkov).
늑대라는 뜻을 가진 이 성은 러시아에서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성을 가진 자들 중 아주 희귀한 사람을, 남궁은 알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볼코프.’
그는 다름 아닌 러시아 킬러단 자가트(закат)의 초대 수장이었다.
한때 여의도에서 남궁 일행을 지원했었던, 니나가와 에리카를 따르는 거구의 사내 이고르가 몸담았던 단체이기도 했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자들 중엔 볼코프란 성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렉산드르에 대한 예우인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볼코프란 성을 가진 자들 모두 스스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겠지. 음지의 사람이 아니든가…….’
알렉산드르 볼코프의 혈연(血緣)이든가.
“만나봐야 알겠지만…….”
남궁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의 경험상 좋지 않은 예감은 꼭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볼코프가(家)가 연관되어 있는 거라면 조금 골치 아플지도 모르겠군.’
단순히 킬러단 때문이 아니었다.
711부대에 있던 시절, 그는 알렉산드르와 만난 적이 있었다.
‘놈은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한 자야.’
만약 갈리나가 그와 관계가 있는 자라면 문제는 그녀가 소속되어 있는 팀이었다.
‘[매머드]는 아르헨티나에 있는 [트레이스] 산하 팀이라고 했었다.’
비록 지금은 현역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과 관계된 사람이 누구의 밑에 있는 것을 알렉산드르가 용인할 리가 없다.
‘알렉산드르가 [트레이스]까지 관리하는 숨겨진 우두머리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남궁이 알기로 알렉산드르는 이제 90이 넘은 노인이었기에, 그가 직접 뭔가를 한다고 볼 순 없었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조차 반박하지 못할 정도로 [트레이스]의 주인이 쉽지 않은 자라는 뜻인데…….’
남궁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인된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너무 많은 억측을 하는지도 모른다.
“뭐,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니까.”
그는 부대원들에게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하고서 검문소의 문을 열었다.
까아아아악---!!!
그때였다.
문을 열자마자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 소리가 그의 귀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