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저는 능력을 받지 않았으니까요.”
예상외의 대답이었지만 정작 갈리나는 여전히 담담한 모습이었다.
“능력을 받지 않았다고? 다 죽어가는 당신의 조부마저 3개의 자질이나 샀는데?”
“자질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목숨은 하나예요. 꼭두각시로 살 바에야 능력이 없는 게 낫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 없는 시체들을 가리켰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저도 저들과 함께 있었을 테죠.”
“알렉산드르를 암살해 달라는 이유는 뭐지?”
“간단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저를 죽이시려고 하거든요.”
“……어째서? 아무런 능력도 없다면서.”
“능력은 상관없습니다. 단지 제가 그 사람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기 때문입니다.”
갈리나는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제 몸에 흐르는 피가 필요하거든요.”
“그게 자질을 얻는 것과 관련된 건가?”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대화가 길어질 것 같군.”
탁-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원시 아룡의 팔찌】가 가볍게 떨리면서 그의 주위를 감싸던 바위들이 사라졌다.
웅성- 웅성-
“아…….”
몰려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지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살인…… 사건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체를 수습하고 성채 안으로 오도록 해.”
박효주의 목소리가 들리자 남궁은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살인이요?”
“뭐, 비슷해. 혹시 메모리스트도 함께 왔나?”
“네. 다행히 연합에 3등급 메모리스트가 계셔서 함께 왔습니다.”
“3등급이라…….”
사물의 기억을 읽는 능력을 가진 메모리스트는 등급에 따라 읽어낼 수 있는 기억의 양이 달라졌다.
현 시점에서 3등급은 결코 낮은 수치는 아니었지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아 보였다.
“니나가와 에리카를 데리고 오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어쩔 수 없지.”
예지 능력뿐만 아니라 메모리스트로서도 1등급 실력을 가진 에리카의 실력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계시자인 그녀를 쉽게 오라 가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남궁에게 고개를 끄덕인 박효주가 건물 밖에서 누군가를 불렀다.
별생각 없이 갈리나와 함께 지나치려는 순간 남궁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잠깐.”
“네?”
“아니. 당신 말고, 거기 말이야.”
박효주가 부른 메모리스트가 남궁의 부름에 황급히 쓰고 있던 모자를 더욱 눌렀다.
“이봐. 우리 전에 만났던 사이 같은데. 안 그래?”
“…….”
“마, 만나요? 어디서요? 왜, 왜요?”
남궁의 말에 박효주가 당황한 듯 허둥지둥 그에게 물었다.
처음 보는 박효주의 그런 모습에 팀원들은 키득거렸지만, 그녀는 그들의 웃음이 귀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잊지 못할 일이 있었거든.”
꿀꺽-
박효주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남궁을 바라봤다.
휙-!!
동시에 남궁이 메모리스트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겼다. 그러자 모자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모자가 벗겨진 그녀는 남궁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인 그녀는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름이 뭐였지? 아, 그래. 채송아.”
“오, 오랜만입니다.”
‘뭔데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거지?’
박효주는 눈을 흘기며 그녀를 바라봤다.
“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그, 그쪽이 부른 거거든요?”
당황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는 그녀는 다름 아닌 첫 번째 문이 열렸던 날, 노숙자들을 이용해 공원에서 자신을 노렸던 여자였다.
“부러진 다리로 용케 아직까지 살아 남았나 보군.”
“네. 아주 좋은 경험이었네요. 덕분에 아주 바닥까지 핥으며 올라왔거든요.”
“그래. 내게 고마워해야겠군.”
빠득-
채송아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저……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세요?”
“날 죽이려고 했거든,”
“아하…… 네? 에엑?”
박효주는 그의 대답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비명 같은 추임새를 뱉어냈다.
“……옛날 일은 좀 접어두시죠? 그리고 저도 의뢰를 받아서 온 거니까요. 그쪽에서 메모리스트를 구하지 않았으면 서로 만날 일도 없었어요.”
채송아는 남궁이 들고 있던 모자를 빼앗아 다시 눌러쓰며 말했다.
“메모리스트의 자질이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한때 사람을 죽여서 헤드를 얻으려고 했던 그녀를 의외의 상황에서 재회하게 된 건 남궁으로서도 놀랄 일이긴 했다.
“뭐, 당신이 내 다리를 부러뜨리고 간 덕분에 생긴 능력일지도 모르죠. 감정이 극대화 면서 자질을 얻었거든요.”
“감정의 극대화? 너…… 단순히 사물의 기억을 읽는 메모리스트가 아니군?”
“벼, 별로 상관없지 않아요? 어쨌든 메모리스트의 능력도 가지고 있으니까.”
“어차피 연합에 정보가 있으니 상관없겠지. 과거의 일이야 넘어간다 쳐도 지금 의뢰는 제대로 해야 할 거야. 허튼짓하는지 내가 지켜볼 테니까.”
“…….”
채송아는 입술을 들썩였지만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자신과 남궁의 차이를 이제는 모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연합 소속인가?”
“……네.”
“기억하고 있겠어. 가지.”
건물을 떠난 남궁의 뒷모습과 채송아를 번갈아 보며 박효주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 *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좀 더 사람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법을 배워야겠네요.”
고블린 성채 안으로 들어가던 도중에 갈리나가 남궁에게 말했다.
“날 죽이려고 했던 녀석이야.”
“하지만 죽이지 못했죠. 그리고 당신은 그녀의 다리를 부러뜨렸다면서요.”
“그게 충분한 대가라고 생각하나? 손톱을 부러뜨리면 손가락을 자르고 손가락이 잘리면 팔목을 잘라 버린다는 킬러단인 당신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알렉산드르가 저의 할아버지긴 해도, 제가 킬러인 건 아니에요.”
“어쨌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를 잘도 상냥하게 대하겠군.”
“꼭 그녀 때문은 아니에요.”
남궁은 걸음을 멈추고서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조금 더 상냥해진다면 분명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따를 거라 장담하죠.”
“상냥하게 대하라고? 내 귀엔 그저 당신 의뢰를 받아달라고 약을 치는 것처럼 들리는데.”
“하하…… 들켰나요?”
갈리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뭐, 겸사겸사였어요. 의뢰를 들어주면 좋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진심이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내 걱정 하기 전에 당신부터 생각하지?”
성채 안으로 들어온 갈리나는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탑 안에 마을을 만든 것도 신기한데 여기는 더 놀랍네요. 현대 기술로 만든 게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마을 주위의 울타리부터 건물들에 들어간 공방 기술이나 무구 제작 기술 모두 현대 기술이 아닌 이능의 힘이야.”
“그렇긴 하죠. 그냥…… 뭐.”
남궁은 어쩐지 조사를 하는 것처럼 주위를 보는 그녀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로 도망친 건지 아니면 도망친 척한 건지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 조심해야겠군.’
“지금은 집구경보다 자기 목숨부터 챙겨야 하는 것 아닐까?”
그가 말했다.
“알렉산드르가 당신을 노리는 이유가 핏줄 때문이라는 건…… 자질을 얻기 위해 당신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뜻인가?”
“[트레이스]가 은밀한 단체긴 하지만 사이비 종교는 아닙니다. 산 제물을 바치는 행위 같은 건 안 하죠.”
그녀는 남궁의 말에 옅게 웃었다.
“그건 모르지. 피 한 방울이면 제물의 가치는 충분하니까. 고작 그 한 방울이 네 목숨을 가져갈 수도 있어.”
그 웃음의 대가로 남궁은 차갑게 말했다.
“제물이라고 해서 당장 죽어야 하는 것만은 아니니까. 언제든 죽일 수 있게 되는 것. 네가 말한 꼭두각시의 삶도 제물의 일종이다.”
“…….”
“피를 바치게 되면 어떻게 되지?”
“……힘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누가?”
“저와 할아버지. 모두요.”
남궁은 건물 안에 남은 시체들의 죽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혈연관계의 상위자가 하위자의 피 한 방울을 바치는 대신 자질을 얻는 구조라…….’
하지만 힘을 빼앗기는 자들은 분명 존재했다.
건물 안에 죽은 세 사람처럼 말이다.
‘그들의 위치는 당연히 하위자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렇다면 빼앗아 간 힘은 누구에게 돌아가는 것일까.
‘상위자일 수도 있겠지만…….’
자질을 부여해 준 존재, 카를로스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그래야 거래가 성립되니까.
거래란 자고로 쌍방이 서로 이익을 봐야 하는 것이니, 하위자의 힘을 카를로스가 얻게 되는 구조라면 앞뒤가 맞게 된다.
“결국 산제물 신세잖아.”
하위자가 얻은 능력은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저 능력이 사라지기만 하는 광월과 달리, 카를로스의 능력 부여는 하위자의 능력이 사라짐과 동시에 소지자의 목숨까지 빼앗아가는 참혹한 것이었다.
‘일단은 해와 달의 관망자와는 별개의 능력일 수 있다는 거군.’
남궁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행여나 광월의 힘이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자에게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건 자칫 최악의 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광월과 비슷한 힘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이따금 계시자의 죽음과 함께 그 능력의 하위 버전이 만들어질 때도 있긴 했다.
전생에 남궁이 최휘수의 죽음과 함께 사령술을 얻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알렉 트라만이 죽지도 않았고, 카를로스의 능력은 광월의 열화판이라고 보기 힘들어.’
완전히 별개의 능력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위상이 부여하는 힘과 비슷한 힘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라…….’
있긴 했다.
하지만 설마 그들이 벌써 움직였을 것이라고는 남궁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20번째 문이 열릴 때쯤이나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이었으니까.
꽈악-
남궁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잡았다.
‘……너무 빨라.’
거암귀를 사냥하고 얻은 던전의 지도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남궁이 놈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최휘수의 사령술을 이어받았을 때쯤…… 그와 비슷한 힘을 가진 놈이 하나 있었지.’
마물군주 빈탄.
그는 최휘수의 사령술과도 달랐으며 키만 얀의 시체술과도 달랐다.
‘놈은 마물의 시체를 다루는 자였으니까.’
여튼 중요한 것은 빈탄이 가졌던 능력은 위상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위상의 하위 단계라 할 수 있는 대리자 일족과 비슷하지만, 부여 한 힘에 대한 대가를 철저하게 받아가는 족속들.
강한 힘은 유혹적이었고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먹이를 갈구하듯 놈들의 힘을 구걸했다.
하지만 그들 중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신(死神)
사람들은 놈들을 그리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