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270)

175화

사신(死神).

그들은 위상과 비슷하지만 명백하게 다른 존재였다.

위상이 계시자들에게 부여한 힘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강력한 힘을 참가자들에게 내려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준 힘에 몇 배에 달하는 대가를 빼앗아 간다.

목숨이라는 대가.

그들은 20번째 문과 함께 찾아 왔다.

살아남은 인류의 숫자는 카니발이 시작되기 전에 비한다면 고작 1/10,000인 100만 정도로 줄어든 상태.

물론, 단순한 숫자로 본다면 적지 않은 숫자였다.

하지만 카니발 시작 전, 인류가 70억 넘게 살아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남아 있는 자들은 서로 만나는 기회조차 희박했을 정도였다.

자신을 제외하고 생존자가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

고립은 공포를 만들어냈고, 그들 중 몇몇은 결국 더 강한 힘의 유혹에 무너지고 말았다.

‘독이 든 성배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사신을 찾았다.’

결과적으로 22번째 문이 열릴 때쯤, 남아 있던 100만 명 남짓한 사람들 중 2/3가 사신에게 목숨을 잃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대규모 살상(殺傷).

그 결과, 25번째 문이 열렸을 때 남궁은 지구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정말로 놈들이 나타난 걸까.’

이제 고작 7번째 문이 열렸을 뿐인데…….

“빌어먹을 놈들.”

“……네?”

대비를 할 새도 없이 자신들을 몰아세우는 카니발에 남궁은 이를 바득 갈았다.

“우(无)의 탑에 있다 한들 카를로스의 힘의 회수에서 벗어날 순 없어. 탑 안은 분명 현실과 경계가 나눠진 공간이긴 하지만, 결국은 카니발의 그늘 아래 있는 곳이니까.”

남궁은 갈리나에게 말했다.

“아직 피를 주지 않았으니 놈도 어찌할 방법은 없겠지만, 그 말은 결국 당신을 찾으러 놈이 무슨 술수를 부릴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겠지.”

꿀꺽-

남궁의 눈빛을 본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이곳이 평온하길 바란다. 카니발에 지친 자들이 쉴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거든. 그런데 그런 마지막 방주가 위상도 아닌 고작 인간에 의해 엉망이 되는 건 용납 할 수 없어.”

그가 검지와 중지를 펼쳤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조용히 이대로 탑을 나가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직접 알렉산드르 볼코프를 만나러 가는 것.”

“하, 하지만…… 할아버지는 저를 노리고 계신다고요. 그를 만나러 가면 저는 죽은 목숨이에요.”

“내가 같이 간다.”

불안해하는 그녀의 입을 남궁은 한마디로 닫게 만들었다.

* * *

“이게 제가 알고 있는 전부예요.”

남궁은 갈리나가 그린 거대한 조직도를 잠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이 정도의 규모가 어째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는지 이상하네요.”

화이트보드 맨 위에 적혀 있는 [트레이스] 밑으로 무려 9개의 조직이 있었다. 그리고 그 9개의 조직 밑으로도 더 많은 단체와 클랜들이 있었다.

“이상하긴. 국정원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겠지. 아무리 음지에서 활동한다 해도 저렇게 덩치가 큰 조직이 생기는 동안 아무도 모르다니 말이야.”

박효주는 남궁의 말에 씁쓸하게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남미 쪽에도 눈을 몇 개 심어 두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보고가 따로 올라오진 않았는데…….”

“그들이 정말 완벽하게 음지에서 활동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트레이스를 비롯한 나머지 단체들도 잘 알고 있었어.”

“흐음, 일반인들도 알고 있는 것을 국정원 요원들이 알지 못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렇네요.”

남궁은 팔짱을 끼며 갈리나가 그려놓은 조직도를 유심히 바라봤다.

“핏줄이라…….”

그는 힘을 부여받는 조건에 대해 나지막하게 읇조렸다.

“어쩌면 찾지 못한 게 아니라 찾을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무슨 뜻인가요?”

“놈들을 발견하기 위해선 일종의 조건이 필요한 걸지도 몰라.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외부인들은 놈들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는 거지.”

“그런 게 가능한가요?”

“방법은 많지. 집단 최면이라든지 대규모 은폐술이라든지…… 문제는 시기야. 저만큼 많은 클랜을 사람들의 인지 속에 숨기려면 적어도 15번째 문을 공략했을 때나 가능할걸.”

“왜죠?”

“술법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마력이든, 정령력이든…… 혹은 사령의 힘까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엄청난 양이 필요할 테니까.”

남궁은 박효주의 물음에 대답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술법을 유지시키려면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아니, 다수라고 하더라도 시전자가 먼저 쓰러질걸.”

15번째 문을 공략하고 나면 ‘마력의 샘’이라는 것이 도시 곳곳에 생성된다.

샘 안에서는 마력, 정령력, 요력 등과 같은 카니발에 존재하는 모든 이능의 힘이 흘러나왔다.

그곳에서 이능의 힘을 회복할 수 있었기에 생존자들은 그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거점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샘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힘으로, 그들은 도시를 보호할 수 있는 각종 술법을 시전했다.

능력자들은 마물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실드(Shield)라든지, 거점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는 은폐술이라든지, 또는 거점을 보호할 수 있는 각종 함정들까지 각종 수단을 샘의 힘을 통해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15번째 문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들조차 샘의 힘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마법이든 술법이든 이능의 힘을 쓰는 것은 일종의 불을 지피는 것과 같아. 무한정 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이군요.”

“그래. 술사들이 힘이 고갈되면 포션이라든지 각종 재료로 회복하는 것처럼 말이야.”

“회복할 수 있는 재료가 필요하다는 뜻이군요. 그렇다면 조건은 충족된 것이 아닐까요.”

남궁의 말을 듣던 박효주가 갈리나를 가리켰다.

“힘의 회수.”

“……네?”

지목당한 갈리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박효주를 바라봤다.

“술법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재료로 인간을 쓰는 거죠.”

“어떻게?”

“우(无)의 탑에서 나온 시체 말입니다. 카를로스가 피를 제공한 하위자 말이죠. 부여한 힘을 회수할 때 그들이 죽는다고 했죠? 회수한 그 힘을 카를로스가 얻는 것이 아니라, 술법을 유지하는 재료로 쓴다면 어떨까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네요. 생명은 그 어떤 마법 재료보다 강력한 힘을 가졌으니까요.”

“……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당연히 마법 고문으로서 있는 거지. 이런 사건에 내가 빠지면 안 된다구.”

소민이 자신을 가리키며 씨익 웃자 남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그 테메르인가 하는 애랑 놀고 있어. 세계연합 마법 고문은 네가 아니라 덴 하울이니까.”

“아저씨도 아저씨가 없을 땐 내가 아빠를 도우라고 했어.”

“그만 가봐.”

남궁이 손을 젓자 소민은 입술을 내밀며 뾰루퉁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칫…… 아빠, 지금 나 보내면 후회할걸?”

“……아빠?”

갈리나가 두 사람을 바라봤다.

“후회 안 하니까 돌아가.”

“형님, 그래도 소민이 의견도 한 번 들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명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살인이 일어났어. 그것도 우리가 머무는 곳에서. 그 말은 성채도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야. 이런 일에 소민이가 엮여봤자 좋을 게 있다고 생각해?”

“……그건 아닙니다.”

남궁의 대답에 명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민을 향해 눈썹을 찡그렸다.

‘이해는 되지만…… 형님께서 너무 소민이를 감싸고 도시는 것 같아.’

이제 겨우 중학생이니 어린아이는 맞지만, 그녀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남궁이 그녀를 너무 과보호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누가 뭐라 해도 소민은 대마법사라 불리는 덴 하울조차 시기할 만큼 엄청난 마력의 자질을 가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법적인 지식도 덴이 훨씬 나으니까, 그가 오면 제대로 된 계획을 짤 거야.”

하지만 라테아에게서 소민이 블랙 루트를 열 수 있는 자질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은 남궁은 더욱더 딸을 이런 세계에서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덴 아저씨가 와도 모를 텐데? 이건 마법이 아니니까.”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바라는 것과 달랐다.

“……뭐?”

“사람들의 인지(仁智)를 속일 만큼 대규모 술법을 시전하려면 진법 없이는 불가능해요.”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구슬 같은 것이 나타나 보드 위에 있는 지도에 붉은 선을 그었다.

“다들 아르헨티나를 시작으로 해서 마다가스카르, 포르투갈, 인도, 그리고 러시아를 이어봐요.”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지도를 바라봤다.

“W 자와 비슷한 모양이 나오죠?”

“별자리…… 인가? 뭐였더라? 카시오페아 자리?”

“맞아요. 비슷해요. 드루이드들은 자연 속에서 술법을 일으키는 자들이에요. 그들의 술법 중엔 천문(天文)의 자리를 본떠 만든 것들도 있어요.”

명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소민이 박효주를 바라봤다.

“드루이드들은 카시오페아 자리를 다르게 부르죠.”

“라타토스크(Ratatoskr)의 좌.”

박효주는 소민의 대답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말로는 갉아대는 이빨이라고도 하고요. 라타토스크는 세계수 속에 사는 청설모를 뜻해요. 녀석은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이간질시키는 존재구요.”

“라타토스크…… 놈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하는 능력을 가졌어. 그러니 [라타토스크의 좌]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술법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박효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저 도시들이 술법의 쐐기라고 했을 때, 얼마나 큰 [라타토스크의 좌]가 시전되고 있는 걸까요?”

꿀꺽-

박효주는 소민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저 정도의 대규모 술법진이라면…… 전 세계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에도 충분하겠지.”

하지만 그녀가 놀란 것은 단순히 술법의 규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술법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재료들이 필요할까.”

그녀의 머리로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 재료란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끔찍할 따름이었다.

“그럼 카를로스가 드루이드란 말인가?”

“아뇨. 그자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아직 몰라요.”

남궁의 물음에 박효주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도시 하나에 술법을 거는 것도 엄청난 일인데 그 도시를 술법의 쐐기로 사용할 정도라면…….”

박효주는 소민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빛이 교차되었을 때, 그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은 듯했다.

“드루이드가 아니라 괴물이죠.”

소민이 그녀를 대신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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