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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화 (181/270)

181화

“뭐 하고 있지? 어서 증명해 봐. 탑을 빠져나온 것이 네 힘이라면 말이야.”

“…….”

“역시…… 마족의 세 치 혀보다 네 혀가 조금 더 긴 모양이군.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지. 지금 당장 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다. 인류와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다면.”

“자, 잠깐!!”

남궁이 돌아서려 하자 카를로스는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절대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카를로스는 창백한 얼굴로 남궁에게 말했다.

불안해 보이는 그 모습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남궁은 여전히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주위를 물려주시겠습니까.”

“나머지 인질들을 모두 풀어주고 장벽을 완벽하게 없애면 생각해 보지.”

“이미 장벽은 따님께서 완벽하게 없애 버린 것 같은데요…… 뭐, 좋습니다. 술법의 기점이 되는 도시들에 세워 놓은 오벨리스크들을 파괴하죠.”

탁-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도시마다 세워져 있던 높다란 탑과 같은 건축물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사상마법이라니…… 몇 번의 카니발을 겪어봤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마법입니다.”

“신기한 건 알겠지만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볼 것까진 없어.”

“하하, 실제로 보니 더 대단해서 말입니다. 게다가 요정족의 보구 까지?”

카를로스는 소민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계수의 요정이 정말 저 아이를 마음에 들어 하신 모양입니다.”

“소민아. 다른 사람들은?”

“효주 씨와 사인 씨께서 술법 내에 있는 도시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명훈 대표를 비롯한 연합원들은 지금 악마술에 계약된 자들을 살피고 있습니다.”

스아아악……!!

순간 소민의 앞에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그 안에서 덴 하울이 걸어 나왔다.

“호오…… 레아의 서 입니까? 책의 색깔을 보니 2번쩨 페이지까지 연 모양인데. 과연, 이곳의 계시자들은 수준이 높군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하고자 하는 얘기가 뭐야?”

남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덴 하울이 마법서의 페이지를 펼쳤다.

우우우웅…….

그러자 페이지에 적혀 있는 룬어들이 빛나며 그 안에서 기둥들이 솟아나 카를로스의 주위에 박혔다.

쿵-! 쿵-! 쿠웅-!!

지면에 박힌 기둥 사이로 단단한 줄이 엮이며 감옥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치직……! 치지직……!!

카를로스가 기둥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자 날카로운 스파크가 일었다.

“[거짓된 침묵]이라…… 여기에 갇히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그래도 탑의 경험이 도움이 되는군요. 예전이라면 꽤나 불편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자신을 옭아맨 마법 감옥이 오히려 반갑다는 듯 말했다.

“이 마법이 뭔지 안다면 지금부터 헛소리는 못하겠지. 거짓을 고할 때마다 감옥이 점점 좁혀질 거다.”

덴의 으름장에 카를로스는 옅게 웃었다.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아주 조금 비틀어서 얘기할 뿐.”

기둥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부터 드릴 이야기는 그 작은 변화도 줄 필요 없는 진실이니까요.”

“말해봐.”

“여러분들께서 탑의 1층을 공략한 덕분에 2층에도 문이 열렸다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빠져나온 곳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문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촤르륵……!!

카를로스가 양손을 펼쳐 평행으로 마주하자 그 사이로 작은 틈이 만들어졌다.

아공간처럼 보이는 그것은 미카엘이 도약술을 쓸 때 만들어지는 틈이라든지, 덴 하울이 이동마법을 시전할 때 일어나는 일그러짐도 아니었다.

“으흠,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개구멍이군.”

남궁의 말에 카를로스는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딱이네요. 맞습니다. 이건 아주 작은 틈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이곳으로 들어가려면…… 몸을 욱여넣을 수밖에 없겠죠.”

그는 양손을 꽈악 눌렀다.

그러자 손바닥 사이에 만들어진 작은 공간이 찌그러졌다.

“들어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만한 구멍에 몸을 욱여넣으면 과연 들어가고 난 뒤에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을 하며 그는 씨익 웃었다.

“도약술이나 이동 마법은?”

“그런 모든 이능의 힘은 카니발을 통해 얻은 것들이지 않습니까. 탑은 위상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 힘이 통할 리 없죠.”

“그럼 너는 어떻게 나왔지?”

“대리자 일족은 위상의 밑에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저희가 쓰는 힘은 저희 일족 고유의 힘이지 그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니까요.”

‘그녀의 말과 똑같다.’

그의 말에, 순간 남궁은 과거 요정계에 갔을 때 페어리 퀸이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궁이 여왕에게 우(无)에 대해 물었을 때였다.

-대리자 일족은 우(无)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네 말은…….”

남궁은 카를로스를 바라봤다.

“정말로 탑에서 탈출할 때 위상의 관여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군.”

“악마의 혀는 가볍지만 악마의 맹세는 무엇보다 무겁지요. 위상들이 제가 탑을 빠져나온 것에 대해서 알지언정 누군가가 저의 탈출을 도운 적은 없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지하에 갇혀 있는 란(亂)이 탑을 빠져나오지 못하는데 어찌 저 같은 미천한 것이 빠져나올 수 있겠냐 물으셨지요. 하지만 사실 간단한 이유입니다.”

“그 역시 결국 위상의 하나일 뿐이니까.”

“정답입니다.”

의심의 끈을 단박에 놓을 순 없는 일이었지만 카를로스의 말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탑의 상층부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뭐지?”

“탑은 그야말로 위상의 힘이 점철된 곳입니다. 그곳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위상의 힘에 반(反)하는 힘을 가져야겠지요.”

카르르릉…….

그때였다.

그의 말에 대답하듯 남궁의 손목에 감겨 있는 우(无)의 사슬이 움직였다.

“맞습니다. 사슬은 우(无)의 힘이 집약된 무구지요. 탑의 힘을 무효화시키는 게 그만큼 확실한 것도 없을 겁니다. 다만…….”

“다만?”

“지금의 사슬로는 이 틈을 부수기는커녕 오히려 사슬이 탑의 힘에 짓눌려 끊어지고 말 겁니다.”

카앙!!!

남궁이 있는 힘껏 카를로스가 만들어낸 틈을 향해 사슬을 휘둘렀다.

그러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슬이 튕겨 나갔다.

“흐음.”

단 한 번뿐이었지만 탑의 틈의 기운이 사슬에 닿는 순간 남궁은 손목이 끊어질 것 같은 아찔한 통증을 느꼈다.

“네 말대로 확실히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군.”

그는 사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틈에 충격을 주려면 사슬의 힘을 강화시켜야 할 것 같은데…….’

전생의 경험 덕분에 카니발에 존재하는 여러 힘에 대해 남궁은 제법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无)에 대한 모든 것은 그에게 있어서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야차들이 일러주지 않았습니까?”

“……뭐?”

“대리자 일족이 우(无)에게서 파생되어 나온 것은 알고 계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카를로스는 오히려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당연히 대리자 일족인 야차 일족도 우(无)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것이 당연지사. 사슬의 힘을 강화 시키는 방법을 그들이 모를 리 없지요.”

남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카를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설마…… 그들이 일부러 남궁 님께 이 사실을 감춘 건 아니겠지요. 클클.”

“헛소리 하지 말고 그 방법을 안다면 말해. 그들이 얘기를 하지 않은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테니까.”

카를로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우(无)에 대해서는 위상인 요르도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위상이니까요. 말했지 않습니까. 위상은 란(亂)에게서 만들어졌고 대리자 일족은 우(无)에서 생겨났다고 말입니다. 서로 엄연히 다른 존재입니다.”

“하지만 싫든 좋든 간에 그들은 분명 카니발의 규율 아래 있다.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일 테고 너는 어차피 카니발에서 벗어난 존재니…….”

남궁은 히죽거리는 카를로스의 입술을 손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지껄여도 상관없지 않나?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이야, 죽기밖에 더하다니…… 살려고 탑에서 도망쳐 온 사람에게 참 시원시원하게 말씀하시는군요.”

“네가 사람은 아니지.”

카를로스는 남궁에게 입술이 잡혀 뭉개지는 발음으로 잘도 얘기했다.

“사슬의 힘을 강화시키는 건 간단합니다. 어떤 것이든 강해지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는 법이죠. 우(无)는 위상과 상반된 힘. 당연한 얘기겠지만 사슬의 먹잇감은 위상의 힘입니다.”

“그 말은…… 위상을 먹어 치우란 말인가?”

“그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무리 남궁 님이 대단하다 해도 결국은 위상의 계시자에 불과하지요. 계시자가 위상을 거스른다?”

카를로스는 라테아를 가리켰다.

“저 꼴이 나겠죠.”

[네, 네놈……!!]

“위상을 죽이지 않아도 위상의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팔각전쟁.”

남궁은 그의 말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팔각전쟁의 의의를 아십니까.”

“물론. 카니발이 진행되는 동안 8개의 대리자 일족들은 저마다의 전쟁을 치른다. 그리고 그 결과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승리한 일족은 이형(異形)들의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

남궁은 입술을 잡았던 손을 옷에 닦으며 말했다.

“과연…… 그렇다면 그 이형들의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아시겠군요.”

“……위상으로 승격되는 것.”

“그 말은 곧 위상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과 같지요. 자, 그럼…… 방법은 나왔지 않습니까?”

카를로스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팔각전쟁의 우승자를 먹어 치우십시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위상의 힘을 흡수할 수 있을 겁니다. 크큭.”

그는 입술을 씰룩였다.

“아차, 그렇군요? 야차 일족의 힘이 느껴지는 걸 봐선 계시자인 동시에 야차 일족의 계약자인 모양이시군요. 허허…… 이것 참. 상황이 묘하게 되었군요.”

마치 이제 알았다는 것처럼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야차 일족이 말을 하지 않은 이유도 이해는 갑니다. 행여나 위상의 힘을 남궁 님께서 노리신다면…… 멸족의 위기에 놓이는 것이니까요.”

“확실히…… 난 규류에게 팔각전쟁의 승리를 약속했었지.”

남궁의 대답에 카를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남궁 님께 아주 큰 제안을 하나 하죠.”

“뭔데?”

“그들도 살리고 위상의 힘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카를로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팔각전쟁에 빈자리에 저를 끼워 넣어 주십시오. 제가 대리자 일족으로서 팔각전쟁에 우승한 뒤에 그 힘을 남궁 님께 드리겠습니다.”

“……뭐?”

“어차피 저는 당장에 소멸해도 상관없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저를 이용하십시오.”

비릿한 웃음.

전생에 마족들을 악마라 부르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진짜 악마족을 만난 적은 없었다.

생전 처음 만나는 악마였지만 남궁은 그 웃음이야말로 카를로스가 악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남궁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지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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