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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182/270)

182화

“결국 그게 목적이었군. 뭐가 그냥 살아남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욕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진심입니다! 그러니 위상의 자리에 오른다 하더라도 그 힘을 포기하겠다는 것이지요. 위상의 힘을 포기해도 대리자 일족은 여전히 유효하니까요.”

카를로스는 남궁을 향해 소리쳤다.

“저는 남궁 님께 위상의 힘을 드리고 다음 카니발을 도모할 생각입니다.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으니 그야말로 남는 장사 아닙니까?”

“네가 위상의 자리를 포기한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지?”

“……네?”

“계속해서 말이 바뀌는데 내가 뭘 믿고 그런 계약을 하겠냐는 말이야. 고작 고대 룬 따위가 너를 믿을 수 있게 해줄 것 같아?”

“고, 고작이라뇨…….”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남궁을 바라봤다.

“고대 룬은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걸 내어 드렸는데 고작이라니요. 허허, 너무하십니다.”

“물건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야. 충분히 버릴 수 있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러니 너도 고대 룬을 아무렇지 않게 내게 먼저 준 것 아닌가?”

“그럼…… 뭐 팔다리라도 하나 내어 드려야 된다는 겁니까.”

“팔다리 잘린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목이 잘리고도 다시 알아서 붙이는 네게 그런 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겠지.”

“아니,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무엇을 드려야 이 거래를 성립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카를로스는 남궁을 바라보며 난감하다는 듯 되물었다.

“악마든 인간이든 살아 있는 것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어.”

“그야…….”

남궁의 물음에 그의 얼굴이 굳었다.

“목숨?”

“잘 아네.”

“하아…… 목숨을 내어 드리면 저보고 죽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살기 위해 탑을 빠져나왔는데…… 바보 같은 말씀입니다.”

“정말로 죽으라는 것이 아냐. 죽음을 경험할지언정 나와 거래를 하고자 하느냐 하는 것이지. 덴, 거암귀에서 얻은 지도가 연합의 1번 창고에 있어. 가져와 주겠어?”

“물론입니다.”

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인을 맺자 그의 앞에 두 개의 지도가 나타났다.

“방금 말했다시피 거암귀를 사냥한 후 우리는 3개의 지도를 얻었다. 그중의 하나인 번개나락을 공략했고.”

“……번개나락이요?”

“그리고 이제 2개가 남았지.”

“자, 잠시만요. 번개나락이라니요. 어째서 그 지도를 벌써 얻으신 겁니까? 그것도 모자라 번개나락을 공략하셨다니, 말도 안 되는…….”

“공략을 하라고 준 건 아니겠지. 위상들은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상태니까. 던전 공략을 하다 죽기라도 바라는 게 아닐까?”

“허…….”

“그러니까, 네가 대신 죽어달라는 거다. 공략할 수 없는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죽음의 대가라는 걸 너도 알겠지.”

“죽음의 대가…… 설마.”

그 순간 카를로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소리쳤다.

“그래. 대리자 일족이라면 당연히 알겠지. 이건 엄연히 카니발의 규율 아래 있는 것이니까.”

“설마 번개나락을 그렇게 공략하신 겁니까.”

“맞아.”

“믿을 수가 없군요. 블랙 루트를 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 아…… 있으니까 열었겠지.”

남궁은 말을 하려다 소민을 힐끔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뭐, 여는 것도 여는 거지만 블랙 루트를 인간이 공략하다니…… 목숨을 내놓고 사시는 겁니까?”

카를로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네게 말하는 거잖아. 나를 대신해서 목숨을 걸어봐. 일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어 보는 것도 할 만하지 않겠어?”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겠지요.”

“응. 없어.”

단호한 그의 대답에 카를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좋습니다. 인류를 위해 목숨을 걸고 번개나락을 공략하셨을 테니…… 그런 분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한 번쯤은 저도 목숨을 걸어야겠지요. 그래, 어떤 던전을 원하십니까.”

“뭘 어떤 던전이야. 두 개 다 공략해서 와.”

“…….”

남궁은 카를로스에게 지도를 던지며 말했다.

“할 수 있겠지?”

“……하하. 맡겨주십시오.”

카를로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

“좋아. 설마 대단한 악마족의 수장이 인간도 공략에 성공한 블랙 루트를 실패하진 않겠지. 당연히 우리의 거래는 성사된다고 믿을 테니…….”

우우우웅…….

순간 남궁의 몸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룬은 내가 먼저 쓰마.”

“……엑?”

“믿고 있으니 부디 날 실망시키지 마라.”

황당해하는 카를로스를 뒤로한 채 남궁은 등을 돌렸다.

* * *

[카를로스 저 악마 녀석이 정말로 던전을 공략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성을 벗어나 함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테아가 남궁에게 물었다.

“공략할 거야. 어차피 블랙 루트를 공략하는 건 진짜 죽음이 아니니까.”

[하긴, 모가지가 떨어져도 사는 놈이니…….]

“신체가 잘려 나가는 건 악마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야. 악마의 죽음은 아마도 신체의 죽음과는 별개의 것이겠지. 가령 영혼의 소멸 같은 것 말이야.]

남궁은 항구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대리자 일족도 결국 불사가 아닌 이상, 놈은 진짜 죽음을 겪어보지 못했을 거야. 그런 의미에서 블랙 루트는 놈에게 확실한 죽음을 경험하게 해주겠지.”

[흐음, 녀석에게 일부러 죽음을 경험하게 만들려는 것이로군. 어째서지?]

“블랙 루트에서의 경험은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일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2개의 던전을 모두 끝내고 온다면…….”

[살아야 한다는 놈의 말이 최소한 거짓은 아니라는 말이군.]

“맞아. 악마의 말은 믿을 수 없지만 절박함은 악마가 아닌 누구에게나 똑같은 것이니까.”

[믿음을 시험하고 보상은 네가 먹고. 설령 놈이 포기한다 하더라도 이미 고대 룬을 얻었으니 손해는 아니지.]

두 사람의 얘기를 듣던 무명이 말했다.

[훌륭하다. 제법 머리를 썼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녀석이 어떻게 나오는지 기다리는 것뿐인가.]

“기다리면서도 할 일은 있지.”

[…… 흠?]

“고대 룬의 힘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고대 룬 : 고대 사냥꾼의 룬을 사용하였습니다.

▶ 약점 포착을 익혔습니다.

▶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약점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 사용자의 능력보다 상위의 객체의 경우 약점 포착이 불발될 수 있습니다.

* * *

남궁은 천천히 눈을 떴다.

돌아가는 함선의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망망대해뿐이었지만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바다가 아닌 함선 안에 있었다.

‘이게 고대 룬의 효과인가.’

지금까지 봐온 풍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치익-

살짝 두통이 일었지만 남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복도를 걸었다.

“형님, 일어나셨습니까.”

“내가 얼마나 잤지?”

“30분 정도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조타실 안에 있던 명훈이 남궁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명훈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보는 남궁에게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남궁은 명훈의 쇄골과 팔목에 보이는 작은 붉은 점을 주시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훈뿐만이 아니었다.

함선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신체 부위에 작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점들이 바로 그들의 약점 부위를 나타내는 표시일 것이다.

‘설마…….’

남궁은 황급히 조타실을 나와 거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역시.”

고대 룬의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위로 보이는 붉은 점들.

“이게 내 약점이란 건가.”

꽤나 열심히 단련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의 몸에 붉은 점들이 잔뜩 있었다.

[약점이란 상대적인 것뿐이니까. 그게 꼭 절대적으로 약한 것은 아니다. 드래곤의 약점은 거꾸로 돋은 비늘인 역린이란 걸 모두가 알지. 하지만 약점이라고 불리는 역린도 인간이 부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니까.]

무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의 약점도 그런 맥락이다. 다른 이에겐 약점이 아니라 평생을 바쳐도 단련하지 못할 수준일 수도 있겠지.]

“위로가 되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쁘진 않은걸. 이 약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자마자 알 것 같아서.”

남궁은 말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당신도 알겠지.”

전신에 퍼져 있는 붉은 점들은 무명의 말처럼 그가 약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기껏해야 한두 개씩 보이는 점들이 왜 나는 전신에 퍼져 있는가.”

[바로 혈맥이기 때문이지.]

무명의 말에 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맥술을 익혔지만, 아직 나는 강(强)의 단계를 완벽하게 마스터하지 못해 비약을 먹어야 하니까.”

상대적으로 약한 부위라는 건 그 부위를 강화시키면 더욱 높은 단계로 오를 수 있다는 의미일 터.

“이건 뭐지?”

전신에 퍼져 있는 혈맥들 가운데 남궁의 눈에 들어오는 한 부분이 있었다.

배꼽 아래 부분.

소위 단전이라 불리는 곳에서 시작되어 명치까지 올라가는 한 줄기 혈맥의 색깔이 다른 것들보다 훨씬 짙어 보였다.

▶ 약점 포착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사용하시겠습니까?

다른 부위와 달리 남궁이 단전을 본 순간 그의 눈앞에 경고가 나타났다.

남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시야가 다시 한번 역전되며 마치 몸 안을 투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배 아래 흐르는 혈맥 위로 손을 가져갔다.

꿀꺽-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혈맥의 기운은 지금껏 그가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신기하군. 약점 포착의 능력은 마물을 사 할 때나 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는 데에도 사용되다니…….]

무명과 라테아는 눈을 감은 채 단전에서 흐르는 혈맥을 느끼는 남궁을 보며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명훈아.”

-네, 형님.

복도에 있던 무전기로 조타실에 연락한 남궁이 그에게 말했다.

“도착할 때까지 나 찾지 마라. 할 일이 있으니까.”

-오래 걸리십니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끝나면 알려줄게.”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히 하십시오.

“응.”

연락은 마친 남궁은 느껴지는 기운이 사라질세라 황급히 선원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클클, 마음이 급한 모양이로군. 꼭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야.]

라테아는 가부좌를 튼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럴 수밖에. 저 혈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저 녀석이 잘 알 테니까.]

[기대 되는군.]

[그래. 그동안 잡지 못했던 마지막 실마리다. 과연…… 눈을 떴을 때 얼마나 그가 변했을지.]

모두가 주목했다.

유독 붉은 한 줄기의 혈맥.

다음 단계의 혈맥술로 넘어가는 마지막 장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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