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 일곱 번째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알림이 울렸다.
동시에 상공이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 불의 뱀이 당신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 정령체의 최초 등장입니다.
▶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모든 정령술사들의 힘이 강화됩니다.
▶ 살아남으십시오.
명료한 한마디와 함께 사람들은 천천히 상공에서 열리는 문을 바라봤다.
“다시 시작이네요.”
“그래도 전과 같은 패닉은 없을 겁니다.”
“현재 각 도시에 구축된 벙커로 시민들이 대피 중입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붉은 지옥문을 주시하며 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합의 회의실엔 명훈, 호준을 비롯하여 연합의 주요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벙커에 수용 가능한 인원이 얼마 정도지?”
“서울을 비롯해서 대전, 수원, 광주, 대구, 부산, 울산…… 등 최대한 많은 곳에 벙커를 건설 중입니다.”
“수용 인원이 몇이냐고 물었을 텐데?”
남궁의 물음에 건설팀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나무랄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이 부족했으니까요. 이번 마물을 막고 나면 계속해서 도시에 벙커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진수혁이 슬쩍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다들 노력하고 있다는 걸 나도 잘 알아. 나는 뭐라 하려고 물은 게 아냐. 수용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려는 것이지.”
“아…….”
남궁의 대답에 진수혁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모든 벙커의 최대 인원은 현재 인구의 3분의 1 정도 수용이 가능하다고 보입니다.”
“연합의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 벙커에 들어가지 못한 시민들을 보호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진수혁이 이끄는 도시 방어팀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먼저 나섰다.
“형님, 눈에 힘 좀 푸십시오. 어째 못 보던 사이에 더 날카로워지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할 만도 하네요.”
“그래? 딱히 평상시와 다르게 말한 건 없는데.”
“다른 게 없긴요. 완전 눈에 힘 빡! 주고 말씀하시고 계신걸요. 마물 사냥하러 온 것도 아닌데 위압감이 장난 아니십니다.”
“흐음.”
호준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혈맥 때문에 기세까지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건가?’
‘흐음…… 신기하군.’
남궁의 혈맥술에 대해서 알고 있는 덴과 록산느는 그의 변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과 정령술도 마다하더니 우리 몰래 뭔가 새로운 거라도 익힌 거야?”
“그럴 리가. 난 여전히 사령술뿐이다.”
“흐음, 그런데 잠깐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가 있다고?”
“딱히 달라졌다고 생각되진 않지만…… 뭐, 사람이 변하는 데 필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계기니까.”
“뭐가 달라졌는지 이번 마물 사냥에서 볼 수 있겠군.”
록산느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이번 문은 내 자랑 시간이 아냐. 7번째 문의 보스는 내가 잡지 않을 거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마물을 사냥함으로써 카니발의 참가자는 강해진다. 그 말은 사냥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면 강해질 수 없다는 뜻이지.”
남궁은 그녀에게 말했다.
“록산느. 너는 계시자지만 지금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소민인 물론이거니와 거암귀를 사냥한 명훈이와도 승패를 쉽사리 장담할 수 없을걸.”
“아무리 그래도…….”
“계시자로서 너의 가장 큰 힘은 소환수인데, 네 소환수만큼이나 희귀한 것을 얻은 자들도 분명 많아.”
그의 말에 록산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네게 힘을 실어주려고 가시덩굴의 미망인이 벌인 일이 결과적으로는 너를 더 약하게 만든 꼴이 되어버렸어.”
록산느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그녀는 부정하지 못했다.
적색지대에서 그녀는 에픽 등급의 최상위 소환수를 계약할 수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소환수는 분명 훌륭한 전력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그리 알지 못했다.
그 말은 그만큼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적색지대에서 얻은 소환수와 함께 마물을 사냥하는 데 집중했던 반면, 너는 오히려 네 스승을 지키는 데 주력했으니까.”
“그게 뭐가 잘못되었지?”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아냐. 네가 드루이드를 떠나 평화주의자라는 걸 잘 아니까. 하지만 카니발에서 싸우지 않는 자는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어. 결과적으로 정령체가 나타난 시점에서 드루이드인 네가 아닌 박효주가 혜택을 받고 있잖아.”
“……난 애초에 정령술을 쓰지 못하잖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겠지. 쿠후란에게 들었다. 드루이드는 일인전승(一人傳承). 드루이드의 힘을 잇기 위해선 스승의 힘을 받아야 한다지?”
록산느는 남궁을 노려봤다.
“그럼 너야말로 스승의 힘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텐데. 고작 정령술을 익히기 위해 내가 내 스승을 죽이기라도 하라는 거야?”
꿀꺽-
순간 주위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록산느의 투기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럴 필요 없다. 나 역시 쿠후란이 죽길 바라진 않으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
“……다른 방법?”
“드루이드를 포기해.”
“……!!!”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남궁을 향해 소리쳤다.
“미친놈!! 난 태어날 때부터 단 한 순간도 드루이드가 아니었던 적이 없어!”
“그러니까.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된 거지. 카니발이 시작된 후 이 세상엔 드루이드가 아니더라도 정령을 쓸 수 있는 자들이 얼마든지 생겼다. 드루이드의 자격을 버리고 박효주에게 정령술을 익히도록 해.”
“제, 제가요?”
남궁의 말에 박효주가 놀란 듯 록산느를 바라봤다.
“흥, 중급 정령과 계약을 맺었던 쿠후란도 나를 가르치지 못했는데 간신히 하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그녀가?”
“평상시였다면 불가능했겠지.”
화아악……!!
남궁의 말이 끝나자 그의 앞에 라테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문이 열리면서 울린 알림으로 들었겠지. 운이 좋게도 7번째 문의 보스는 샐러맨더다. ]
영체인 그녀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직접 울렸다.
[샐러맨더는 아룡이지만 4대 정령체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당신이 남궁이 말한 정령술사인가?]
그녀의 물음에 박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식으로 술사가 된 건 아니지만…… 바람의 정령을 다룰 수 있습니다.”
[좋아. 한번 정령을 불러보겠나?]
박효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솨아악…… !!
그녀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며 바람이 서서히 작은 소녀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말로 재잘거리며 그녀의 주위를 날기 시작하는 정령들.
[크르르…….]
그 순간 정령들 사이에서 묘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의 정령을 소환한 박효주도 그 소리에 놀란 듯 감았던 눈을 떴다.
“이건…….”
손바닥만 한 바람의 정령들 사이로 보이는 작은 늑대의 형상.
비록 소녀들처럼 선명하진 않지만 확실하게 기운이 느껴졌다.
[바람의 중급 정령이다. 원래 너의 실력으로는 소환이 불가능하지만 샐러맨더의 효과로 인해 정령술이 증강되었기 때문이지.]
라테아가 손을 뻗자 늑대 형상의 정령이 고개를 숙였다.
“바람의 중급 정령…… 소환할 수 있는 정령의 등급만 본다면 쿠후란과 같군.”
“그래. 물론 쿠후란처럼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어쨌든 동급의 정령술이다.”
록산느는 남궁이 내려놓은 정령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저걸 쓰면 소환할 수 있는 정령의 등급을 한 단계 더 올릴 수 있으니 운이 좋다면 그녀는 상급 정령술사가 될 수 있겠군.”
“7번째 문을 공략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당신이 노린 게 이건가.”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드루이드로 남고 싶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문은 열릴 거고 쏟아지는 마물들은 갈수록 강해지겠지.”
“…….”
“하지만 넌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거다. 과연 언제까지 우물 안 개구리로 소중한 이들을 지킬 수 있을지 나도 궁금하군.”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 아니라 계기를 마련해 주려는 것이다. 스스로 변할 수 없다면 변할 수 있도록 말이야.”
남궁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강호준.”
“……네?!”
“네게도 기회를 주겠다. 화염 내성을 갖춘 무구가 있다 한들 샐러맨더의 불꽃을 버티기 위해서는 그만한 체력이 필요해. 적임자는 너겠지.”
그는 맹화장을 비롯하여 규류가 준 코트까지 벗어 강호준에게 건넸다.
“제, 제가요?”
“거암귀 사냥을 끝낸 뒤 명훈이의 성장은 가까이에 있는 네가 가장 잘 알 거다. 명훈이가 좋은 형인 건 맞지만 언제까지 등만 보고 있을 건 아니잖아?”
“그, 그건…….”
강호준은 생각지도 못한 남궁의 제안에 잠시 당황스러운 얼굴로 명훈을 바라봤다.
남궁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진웨이의 공습 때도 두각을 나타내긴 했지만 확실히 거암귀를 사냥하고 난 후 명훈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달라졌으니까.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알듯 사냥도 그저 보는 것과 사냥감의 목숨을 따는 것은 천지차이지.]
라테아의 목소리가 강호준을 때렸다.
“해보겠느냐.”
“네.”
강호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탑에 가서 요란 일족에게 샐러맨더 사냥법을 배우도록 해라. 그리고 박효주는 성채의 훈련장으로 가서 정령수를 사용하도록 해. 혹시 모르니 덴과 소민이가 그녀를 지켜보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남궁과 록산느의 시선이 서로 부딪혔다.
“넌 마음대로.”
“왜, 왜 난 마음대로야?”
“지금 상황에서 딱히 전력이 되는 것도 아니고. 너 정도는 대체 할 인력이 충분하거든.”
잘도 신경을 긁는 그의 말에 록산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굳이 그렇게까지 그녀를 몰아세울 필요는 없지 않나?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는 가시덩굴의 미망인이 뽑은 계시자인데 말이야. 전력이 안 될 리가…….]
“당장은 쓸 만할지 모르지. 하지만 이대로 머물러 있다간 10번째 문이 열릴 때쯤만 돼도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걸.”
[흐음, 그럴 수도 있겠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니나가와 에리카의 예지, 미카엘의 도약…… 사실 지금 시점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올랐어야 해.”
굳이 따지자면 덴 하울의 마법만이 전생보다 낫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렌과 클락도 재능을 따진다면 에이라 미쉘과 진웨이에 비해 결코 떨어지진 않을 거다. 그래도 명색이 전생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들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이제 막 계시자에 뽑혔을 뿐이다.
결국 모든 계시자들은 성장을 위해 저마다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진 빠른 속도로 문을 닫으면서 전생보다 더 많은 헤드를 얻을 수 있었지만, 대신 성장 기회는 놓쳤어. 그렇기 때문에 이젠 모은 헤드를 이용해서 그들을 폭발적으로 키울 때야.”
[잊은 건 아니겠지. 결국 끝에 가서는 계시자들도 서로 싸워야 하는 사이라는 걸.]
“물론. 알고 있어.”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뒤의 싸움을 대비하는 것도 필요할 거다.]
라테아의 말에 남궁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 그 뒤의 싸움을 꼭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
[흐음?]
“왕좌를 노리는 게 아니라 바로 신좌를 노릴 수도 있으니까.”
쿠웅-
그때였다.
“헉…… 헉…… 빌어먹을!”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카를로스가 마물의 잘린 목을 든 채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