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카니발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위상과 달리, 상점을 비롯하여 일족의 능력까지 세세한 부분에 있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대리자 일족.
어쩌면 그들은 카니발 참가자들에게 있어 위상보다 더 중요한 자들일 수 있었다.
그들의 소멸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대리자 일족은 각각 대륙의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8개의 일족 중 거인족과 노움 일족, 그리고 귀귀족이 소멸된 상태였다.
그로 인해 그들이 맡고 있던 남아메리카, 유럽, 중동은 더 이상 대리자 일족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된 상황.
그 덕분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현재 아시아를 비롯하여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 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저희가 원한 일이긴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남은 대리자 일족 중에는 요정족도 있잖습니까.]
규류는 남궁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영원히 팔각전쟁을 마무리하지 않고 있을 순 없어.”
[그야 그렇지만…….]
“그리고 너도 들었겠지만 우(无)의 탑 상층부로 가기 위해서는 위상의 힘이 필요해.”
[설마 그 악마 놈의 말을 믿으십니까? 정말로 그놈에게 대리자 일족의 자리를 주실 건 아니시죠?]
“왜? 그렇지 않으면 네가 이형의 왕이 되었을 때 내가 널 먹어 치워야 할지도 몰라.”
[차라리 그게 낫죠!]
규류는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소리쳤다.
[정말 원하시면 저는 왕좌를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도 못하는 놈에게 그런 제안을 한다고요?]
“녀석은 블랙 루트도 다녀왔어. 그것도 2번이나 죽음을 경험했지.”
[그게 뭐 대수라고요. 전 신용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끔찍한 경험이라도 공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다고요.]
규류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족이 소멸되지 않기 위해 탑에서 튀어나온 놈이 팔각전쟁이 끝나면 위상의 자리를 내놓겠다고요? 자칫 목숨을 날릴 수도 있는 일인데 말입니다.]
“위상의 힘을 양도하는 것이 꼭 목숨을 대가로 한다는 얘기는 없어.”
[그러면 제가 해도 되지 않습니까.]
“대신 목숨을 대가로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 대리자 일족의 자리는 포기하면 그만이지만, 만에 하나 위상의 힘을 넘겨주기 위해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 거라면?”
남궁은 규류를 바라봤다.
“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훌쩍-
“……우냐?”
[아 씨, 갑자기 훅 들어오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아니, 그리고 죽긴 누가 죽어요! 전 안 죽을 겁니다! 평생 붙어 있을 건데!]
“네가 붙어 있으면 카니발이 안 끝난다는 말이잖아.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그냥 사라져.”
[싫거든요? 싫어요!]
울먹이며 달라붙는 규류를 밀어내며 남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헛소리 그만하고 야차계의 문이나 열어. 이미 다른 일족들도 전쟁 소식을 들었겠지?”
[클클, 그래봤자 소용없을 겁니다. 남궁 님께서 합류하시는데 지들이 뭐 어쩌겠습니까.]
규류는 자신 있다는 듯 손가락을 뻗으며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남궁은 살짝 눈을 흘겼다.
나가 일족과 비룡족, 그리고 해인 일족까지.
요정족을 제외한 나머지 일족들은 하나같이 쉽지 않은 자들이었다.
* * *
[우측으로! 대열을 유지하라!]
두두두두두……!!
[좀 더 빠르게!! 1진을 축으로 전 병력 선회! 2, 3조는 산개하여 뒤를 노린다!!]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야차족 전사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 보였다.
“과연 현류로군.”
[저, 저도 저 정도는 가르칠 수 있거든요?]
남궁이 훈련장 단상에 올라 서 있는 현류를 바라보며 말하자 규류는 입술을 삐쭉였다.
[집중해라! 이런 식으로 했다간 전장에서 가장 먼저 시체가 될 테니까!]
와아아아---!!!
그의 말과 함께 전사들이 서로 엉키며 싸우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 저 회색 전투복은 하급 전사들일 텐데. 개개인의 실력도 썩 나쁘지 않아.’
남궁은 진법의 이해도가 뛰어난 현류를 이곳에 남겨둔 것이 잘 한 일이라 생각했다.
[오셨습니까.]
“제법 틀이 갖춰진 것 같은데?”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기껏해야 방패막이나 될 정도일까요.]
현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그들의 움직임만 봐도 남궁은 충분히 그들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수가 얼마나 되지?”
[당장 투입할 수 있는 수는 약 200 정도 됩니다. 훈련장에 있는 하급 전사들까지 합치면 1,000명 정도는 되겠지만요.]
“나머지 전력은?”
[일단 요정족은 저희와 동맹을 맺은 상태라 팔각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신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뭐지?”
[일전에 약조한 것을 가장 먼저 실행해 달라고 하더군요.]
[호수에 대한 것인가 보네요. 나가 일족에게 빼앗긴 호수 말입니다.]
규류가 현류의 말을 이어 받았다.
[페어리 퀸이 말하길 팔각전쟁을 시작하면 나가 일족을 먼저 공격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도 지원을 하겠다는군요.]
[건방지게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좋아. 그들에겐 호수를 되찾아 준다고 약속을 했었다. 요정족도 명분이 있어야 우리를 도울 수 있으니 말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건가?]
자신을 바라보는 규류에게 현류는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켰다.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뭔데?”
[아무래도 다른 일족들도 요정족이 호수를 되찾기 위해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현류는 말했다.
[비룡족과 해인 일족도 호수로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안으로 드시죠. 현재 전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남궁은 현류의 안내를 받아 홀 안으로 걸어갔다.
“무휘는?”
[아버님께서는 한 번 더 폐관 수련 중이십니다. 남궁 님 덕분에 활력을 되찾으신 뒤로 더 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이왕이면 전쟁 시작 전에 수련이 끝나면 더 좋겠지만.”
[하하, 아마 아버님까지 전쟁에 참가하진 못하실 겁니다. 대신 저희 형제들이 모두 모였으니 너무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라 함은…….”
[네.]
끼이이익-.
홀 안에 문을 열며 현류가 말했다.
[연화 누님께서 아버님을 대신해 일족의 전략을 지휘하시기로 했습니다.]
[남궁 님!!]
커다란 지도가 걸려 있는 홀 안에서 그녀가 남궁을 보더니 반색하며 달려왔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덕분에요. 이렇게 또 뵙게 되서 기쁩니다.]
척-!!
연화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일족들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쓸데없는 격식 차릴 필요 없어. 모두 일어나라.”
남궁은 그렇게 말했지만 야차들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신념이 있으니까요. 이쪽으로 오세요. 저희가 준비한 전략을 말씀드릴 테니 남궁 님의 의견을 보태주세요.]
“으흠.”
자신의 손목을 잡고 이끄는 연화에 남궁은 야차들을 보던 눈을 돌렸다.
영체임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손목에서 묘하게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요정족의 호수는 현재 나가 일족의 소유입니다. 거인족이 배치되어 있어 경계를 하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호수의 효과를 보는 건 나가 일족이죠.]
[호수의 힘을 받고 있는 나가들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요정들이 호수를 되찾으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호수의 물이 강력한 자연의 기운을 품고 있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요력을 사용하는 요정들부터 마력을 쓰는 나가 일족까지 모두 호수를 탐내는 것이었다.
[거인족과 요정족 연합이 아슬아슬하게 나가 일족과 비등한 힘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은 우리가 남은 두 일족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군.”
[맞습니다. 문제는 해인 일족일 겁니다. 나가 일족이 호수를 차지하고 있는 동안 호수 위로 배를 띄우면, 그들 역시 호수의 힘을 받을 겁니다.]
“너희와 붙는다면? 이길 수 있나?”
[쉽게 밀리진 않을 겁니다.]
[밀리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 쓸어버릴 테니까.]
연화의 대답에 규류가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녀석의 말은 무시하세요. 야차술을 익힌 뒤로 너무 자신만만해서 문제니까.]
“자신 있어?”
[문제없습니다.]
규류의 대답에 남궁은 피식 웃었다.
“그럼 남은 건 비룡족인가.”
[네. 그게 문제인데…….]
연화는 조심스럽게 남궁을 바라봤다.
“내가 맡도록 하지.”
[쉽지 않을 겁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비룡족이 드래곤을 길들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드래곤?”
[네. 비룡족이 사는 비룡계엔 3마리의 드래곤이 서식하고 있거든요. 그들이 그 3마리 중 1마리와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레드 드래곤은 아니겠지?”
[네. 비룡계에 있는 드래곤은 모두 엘더 드래곤이라 평범한 오행 속성의 드래곤은 아닐 거예요.]
“그럼?”
[비룡계에 있는 3마리의 엘더 드래곤은 빛과 어둠 속성인 화이트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 그리고…… 무속성의 수정 드래곤입니다.]
[엘더 드래곤인 만큼 나이가 많아 움직임은 둔할지 모르지만 마력의 수준은 훨씬 대단할 겁니다.]
“마음에 드는군.”
긴장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와 달리 남궁은 드래곤이란 말에 오히려 입꼬리가 올라가는 듯 보였다.
[네? 뭐가 마음에 드시는 건지……?]
“준비물이 제법 필요하겠어. 용 사냥은 오랜만이거든. 그래도 다행이군. 연화, 네가 무구 제작을 할 수 있어서.”
[지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남궁을 잘 아는 규류가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놈들도 섣불리 먼저 공격을 해오진 못할 거야. 병력을 배치하고 요정족에 지원을 요청해 두도록 해. 그들이라면 호수의 힘을 억누를 수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연화, 넌 도안을 그려줄 테니 바로 용 사냥에 필요한 도구들을 제작하도록 하고.”
[네.]
“비룡족의 위치는 파악되었어?”
[네. 호수로 이동 중인 비룡족들의 무리를 찾아두었습니다.]
“좋아. 규류. 넌 나와 함께 그리로 간다.”
[엑……? 지금요?]
규류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물론, 빼앗기 전에 그들에게 인사라도 해둬야지.”
[빼앗다니…….]
솨아아악……!!
그 순간, 대답 대신 남궁의 주위로 영혼 병사들이 소환되었다.
[……!!]
영혼 병사들에게서 지금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위압감에, 야차 일족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사령술사가 용을 사냥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이제 다들 알게 될 거야.”
▶ 사역 가능한 사령의 수 5/10
남궁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빈자리는 충분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