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이, 이게 무슨……!!”
무하드는 떨어지는 낙뢰를 간신히 피하면서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콰아아앙---!
콰강--!!
떨어지는 낙뢰에 순식간에 비룡족의 전사들이 시커먼 재가 되어 버렸다.
“……안 돼!!”
비명 가득한 전장에서 무하드는 이성을 잃은 듯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다……! 죽여 버리겠어!!”
“피, 피하셔야 합니다!!”
“닥쳐!!!”
살아남은 친위대들이 그를 말렸지만 이미 머리끝까지 분노로 차오른 그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컥!!”
하지만 분노는 그의 검을 무디게 만들 뿐이었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에 맞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하드의 허리가 꺾였다.
우득-
검 손잡이에 찍혀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른 듯 무하드는 쇳소리 같은 숨을 토해냈다.
“헤엑…… 헥……!! 네…… 네놈……!!”
입안에 차오르는 핏물을 뱉어내며 무하드는 남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다면 괜찮은 승부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남궁은 그의 공격을 피하며 검을 허벅지에 박아 넣었다.
“크아아악!!”
무하드가 비명과 함께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서걱-
비틀거리는 그의 목을 남궁은 망설임 없이 베어버렸다.
“날 너무 원망하지는 마라. 너희는 애초에 동맹으로부터도 버림받았으니까.”
남궁은 떨어진 무하드의 머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모두 들어라!! 비룡족의 수장, 무칸과 그의 아들 무하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죽었다. 너희는 무의미한 희생을 계속할 것인가!”
[쿠우오오오오---!!]
드래곤의 포효 소리에 비룡족들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살고 싶은 자는 무기를 내려놓고 모두 떠나라. 도망치는 자들은 막지 않겠다.”
남궁의 말에 전사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사방으로 협곡을 떠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정말 그냥 보내실 겁니까? 전쟁에서 쓰진 못하더라도 용 사냥에 좋은 미끼가 될 텐데요.]
[그건 일반적인 드래곤일 때지.]
규류의 말에 라테아가 대답했다.
[드래곤이 엘더 드래곤으로 변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는가 보군. 대리자 일족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어리다는 뜻이겠지.]
[크흠, 어리다니요.]
규류는 라테아의 말이 못마땅하듯 투덜거렸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대답이 듣고 싶은 듯 보였다.
[드래곤의 수명은 우리들의 눈엔 영생에 가까울 정도로 길지. 하지만 그들도 결국은 필멸자(必滅者)다. 정해진 수명 이상으로 삶에 집착하는 자들도 있는 법.]
라테아는 말했다.
[주어진 것 이상을 얻을 땐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니…… 놈들은 삶을 붙잡았지만 그 시간만큼 자신의 이성을 내어 주게 된다.]
규류는 도망치는 비룡족들을 먹어치우고 있는 엘더 드래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끝없는 시간이 흘러 놈들은 자신조차 잊어버리게 되고 한낱 마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비룡족이 어떻게 드래곤을 길들일 수 있겠어.]
남궁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처럼 눈앞에 날뛰는 드래곤은 전생에 자신이 겪었던 드래곤과는 확실히 달랐다.
“지능이 없는 마물이라. 오히려 내겐 기쁜 일이군. 내가 필요한 건 놈의 영혼뿐이니까.”
[어떻게 잡을 거지?]
“못 잡지. 영혼 지대도 끝났으니까. 저걸 무슨 수로 혼자 잡겠어. 연화에게 부탁했던 작살이 완성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남궁은 재빨리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무칸의 창을 주우며 말했다.
[그, 그럼……?]
“도망가야지.”
그는 창을 챙기고는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엑? 그럼 왜 일을 벌인 거야?!]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그를 보며 라테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 * *
[마법 시전이 완료되었습니다.]
[협곡의 상황은?]
[마법이 시전되기 전에 드래곤의 제어가 풀린 것으로 보입니다. 비룡족의 수장이 드래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술사의 보고에 나가 여왕은 낮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드래곤에게? 테이머가 죽은 건가……?]
[그렇게 사료됩니다.]
“크큭, 자기가 길들인 개에게 물려 죽는 것만큼이나 쪽팔리는 일도 없을 텐데. 무칸 녀석 어쩐지 분에 넘치는 짓을 하더니…… 쯧쯧.”
해인 일족의 수장 쏘론은 혀를 차며 말했다.
[목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실수 없도록 해라. 동료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여왕의 말에 나가 술사는 허리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동료의 죽음이라…… 누구 손에 죽은 건지 모르겠지만 뭐…….”
[방금 들었을 텐데. 무칸은 자신의 드래곤에게 죽었다고 말이야.]
“네, 네. 어련하시겠어. 그냥 농담 한번 해본 것뿐인데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볼 필요가 뭐 있어? 한배를 탄 입장에서.”
쏘론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정말로 협곡에 마법을 떨어뜨리다니…… 나가 일족…… 역시 믿을 게 못 되는 족속이야.’
동맹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들의 눈엔 불신이 사로잡혀 있었다.
[보……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때였다.
거점의 막사에서 다급한 병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이냐.]
[그, 그게…….]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부하를 보며 여왕은 인상을 찡그렸다.
[드…….]
[뭐?]
[드래곤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적을 앞에 두고 서로에 대한 불신을 가지는 것은 뼈아픈 사치였다는 것을 말이다.
콰아아아아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꽃이 거점을 때렸다.
* * *
[저거…… 남궁 님 아닙니까?]
[에이, 설마.]
호수의 맞은편, 거점을 구축하고 있던 야차 일족의 병사들은 열심히 뛰어오는 한 남자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그분이 바보도 아닌데. 거점의 위치를 잘못 알고 계실 리도 없고 말이야.]
[하긴 그렇지?]
그들은 서로 말하면서도 우습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콰아아앙---!!!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공에 다시 나타난 드래곤이 있는 힘껏 적진을 향해 불을 뿜자 그들은 놀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뭐, 뭐야?!]
[저거 비룡족이 데리고 온 것 아냐? 어째서 드래곤이 자기 진영을 공격하는 거지?]
그들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하지만 그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고 나서야, 적진에서 뛰어 다니는 자의 정체를 믿을 수 있었다.
* * *
[이건 미친 짓이야!!!]
라테아의 외침에 남궁은 오히려 즐거운 듯 웃었다.
“그럼? 나가 일족만큼 녀석을 상대할 만한 힘을 가진 자가 또 있나? 그들은 호수의 효과를 받고 있다고. 작살이 완성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기 딱 좋은 상대지.”
[여긴 적진이라고! 적진 한복판에 뛰어드는 놈이 어디 있어!]
“당신, 웃고 있는데?”
파앗-!!
남궁은 자세를 좀 더 낮추며 속도를 붙였다.
[크, 크크…… 그러니까. 살아생전 나도 이런 미친 짓을 좀 해볼 걸 그랬구나!]
라테아는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실없이 웃으며, 폭주하는 드래곤을 막으려 황급히 튀어나오는 나가 일족의 병사들을 보고 말했다.
“하면 되지.”
“……컥!”
남궁은 병사들을 밟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건 미친 짓도 아냐.”
쩌저적……!!
병사의 어깨를 밟고 여왕이 있는 가장 큰 막사에 도착한 순간, 그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번개가 떨어졌다.
[네놈……!!]
거칠게 막사의 문을 열며, 붉게 변한 비늘을 가진 나가 여왕의 모습이 나타났다.
[키킥, 푸른 비늘의 색이 변하다니. 화가 단단히 난 모양입니다.]
규류가 그녀를 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죽여 버리겠다!!]
“화를 내야 할 상대를 잘못 본 것 같은데. 나를 신경 쓰기보다는 저놈을 먼저 신경 쓰는 게 좋지 않을까? 난 너희를 공격하지도 않았는데?”
[미친놈!! 헛소리는 그만 지껄여라! 네놈이 데리고 온 것이잖느냐!!]
남궁은 그녀의 말에 냉소를 지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데려온 게 아니라 원래 너희 편인 거잖아. 왜? 같은 편을 배신했는데 이 정도 대가도 없을까 봐?”
[……닥쳐!!]
여왕은 거대한 창을 휘둘렀다.
창날에 번쩍이는 스파크가 일었고, 창극이 꽂히는 자리에 작은 낙뢰가 연달아 떨어졌다.
[크아아아악……!]
[사, 살려줘!!]
여왕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이를 바득 갈았다. 엘더 드래곤은 개걸스럽게 병사들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쏘론……!! 당신의 해인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저 드래곤을 막아!!]
“어이, 내게 명령하지 마. 나는 당신의 수하가 아냐.”
[지금…… 그걸 따질 때야? 저기 저 드래곤이 보이지 않느냐고!!]
“보이지. 하지만 이대로 우리 모두가 드래곤에 발이 묶이게 되는 것이야말로 저놈이 원하는 거라고.”
[……뭐?]
“내가 저 앞에 있는 놈들을 상대하겠다. 호수의 힘과 더불어 물 위라면 지지 않아. 그러니…….”
막사 안에서 나온 쏘론은 그녀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짓고는 호수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죽을힘을 다해 호수의 힘이 사라지지 않도록 유지해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우리 모두 끝이야.”
[미친놈……!!]
쏘론은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부족에게 적용되고 있는 호수의 힘이 사라지는 것이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갑작스러운 드래곤의 공격으로 인해 나가 일족은 오히려 호수의 힘을 더욱더 끌어 올려야 했다. 덩달아 자신들의 힘도 증강되니 쏘론은 지금이야말로 판을 뒤집을 수 있다 생각했다.
[닥치고 드래곤이나 먼저 잡아! 너희 혼자서 야차와 요정, 그리고 거인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전쟁은 요정족에겐 자신들의 호수를 되찾는 전쟁이긴 하지만, 팔각전쟁의 틀에서 본다면 남궁의 딸을 계약자로 삼고 있는 지금 그들은 나서는 데 고민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페어리 퀸이 직접 움직이진 못하겠지.”
쏘론은 여왕에게 말했다.
“거인이야 수장을 잃었으니 놈들은 그저 덩치 큰 골렘에 불과해. 우리가 제대로 상대해야 할 건 야차뿐이다.”
[너희가 야차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냐.]
여왕의 물음에 쏘론은 피식 웃었다.
“걱정 마라. 육지라면 모르지만 물 위라면 자신 있으니까. 더욱이 야차 놈들은 물을 싫어하니까. 그러니 너희는 호수의 힘이나 끌어 올려.”
빠득-
그의 말에 여왕은 분노에 차 이빨을 갈았지만 반박을 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드래곤을 여기까지 끌고 올 줄이야. 전군을 투입하면 드래곤이야 잡을 수 있겠지만 호수 건너편의 적이 문제다. 어중간하게 두 부족 모두 드래곤에 피해를 입게 되면 놈들의 공격을 막을 수 없어.’
[확실히…… 잡을 수 있겠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여왕은 낮은 한숨과 함께 쏘론에게 말했다.
“걱정 마라. 해인 일족이 물 위에서 야차에게 진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닻을 올려라!!! 호수를 건너 적들을 처단한다!!”
우! 우! 우!!
쏘론의 외침에 해인 일족들이 일제히 호수에 정박하고 있던 배들을 밀어 물 위에 띄우기 시작했다.
쿵-
그때였다.
“야차들이 물을 싫어 하는 건 맞지.”
가장 먼저 호수 안으로 들어간 배가 가볍게 출렁거렸다.
“근데 난 아닌데?“
갑판 위에서 남궁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