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전쟁 영웅……? 거창하게 얘기하지만 결국 인간의 영혼들이란 말이잖느냐. 그들이 원시성령이나 엘더 드래곤보다 낫다고?]
요르는 남궁의 말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개개인의 능력치만 본다면 그 어떤 영혼을 데리고 온다 한들 그들을 뛰어넘긴 어렵겠지.”
[잘 아는구나. 하지만 기억하겠지? 혹여라도 현실에 남아 있는 유물이나 유적에 존재하는 영혼을 불러내는 건 금기라는 걸.]
그는 말을 이어갔다.
[너희가 신화라 부르는 전설 속의 존재들 중엔 선대의 위상들도 있으니까.]
“알고 있어. 내가 불러낼 영혼들은 절대적으로 인간의 피를 가진 자들이다.”
[인간의 피라…… 아하, 그렇군. 네 녀석 반신(半神)을 노리는 것이로구나.]
요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데미갓이라면 확실히 금기 사항은 아니지. 네가 지금 얻은 미궁의 기사 역시 그러하니까.]
하지만 어쩐지 그는 조금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남궁에게 말했다.
[하지만 고작 데미갓으로 내 화신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해. 여튼…… 보상은 받았으니 돌아가도록 하지.”
[영혼 사역의 레벨이 최대치에 도달했으니 아마 사역할 수 있는 영혼의 수는 20명이겠지. 그 공석을 모두 반신으로 채울 수는 없을 터인데…….]
요르는 삼독문을 나서는 남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과연 무엇을 보여줄지 궁금하군.]
[속을 알 수 없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냐?]
그때였다.
차분한 목소리가 조용한 홀 안에 들려왔다.
[삼독문 안으로 멋대로 들어오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로구나.]
요르는 검은 로브를 쓴 사내의 등장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계시자나 신경 쓸 것이지 왜 남의 영역에 들어온 거지?]
[내 계시자는 이미 카니발에서 제외된 것과 다름없어서 말이야. 본의 아니게 여유가 생겼거든.]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벗자 영롱한 붉은색 눈동자와 황금빛 눈동자가 보였다.
해와 달의 관망자.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요르를 바라봤다.
[어찌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알렉 트라만. 그는 계시자들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였는데 말이야. 네 후보로 덕에 완전히 틀어져 버렸어.]
[그래서 계시자를 내팽개치고 남의 창고에 기웃거리고 있는 거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시자를 갈아버리든지. 미풍과 화롯불처럼 줏대 없이 말야.]
요르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 말대로 그건 정말 줏대 없는 짓이지. 그리고 어떤 계시자를 고른다 한들…… 너의 계시자를 이길 수는 없을 테고.]
[그럼 왜 여기에 온 거지? 내가 알기론 너는 별해검이 부서진 이후 계시자에게 이렇다 할 도움도 주지 않은 걸로 아는데.]
[그 검은 계시자를 위한 검이니까. 다른 이에게 빌려줘서 부러진 것을 내가 도와줄 필욘 없지.]
[관망자라는 이명을 참 잘도 지었어. 아주 네게 딱 어울려. 지 편할 대로 하는군.]
[카니발의 우승을 가져다줄 것이라 기대한 내 계시자가 남의 계시자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는 요르를 노려봤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하지만 그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귀찮다는 듯 요르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정말로 시험을 치르게 할 생각이냐.]
[못 할 것도 없지. 녀석은 혜택을 포기하고 기회를 얻으려는 것이니까.]
[화신을 단숨에 소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네가 잘 알면서?]
[과연 관망자로군. 잘도 훔쳐보고 있다니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시지?]
[당연히 모를 리가 없지. 문의 개수가 줄어들게 되지 않느냐. 사실 그게 녀석이 바라는 것이기도 하더군. 아주 가증스러운 계시자가 아닐 수 없어. 클클…….]
[웃어넘길 일이 아니잖아.]
해와 달의 관망자는 요르의 반응에 오히려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 네가 잘 알 텐데. 카니발의 문은 단순히 마물을 뱉어내고 참가자들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란 걸.]
[…….]
[마물은 오염의 부산물이다. 란과 우를 봉인하고 있는 결계에서 생성되는 오염이 형상화된 것이니까.]
그는 말을 이어갔다.
[지속적으로 오염을 제거하지 않으면 놈들의 봉인이 풀리고 말 거다. 문은 그런 오염들을 마물로 만들어 뱉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단 말이다.]
[다 아는 소리를 굳이 내게 와서 하는 이유가 뭐야?]
[빌어먹을……!! 문은 등가교환의 일종이다. 문의 개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그만큼 란과 우의 봉인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의미잖느냐!]
시큰둥한 요르의 반응에 해와 달의 관망자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결국 노성을 터뜨렸다.
[왜 놈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거지? 녀석은 우리를 카니발을 통해 인간들을 가지고 노는 쓰레기로 보고 있잖아.]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아니긴……!! 카니발을 통해 살아남은 자를 왕좌 전쟁에 세워 승부를 가린다. 이게 단순한 놀음을 위한 헛짓거리가 아니잖아! 란과 우, 그 둘을 죽이기 위한 존재를 길러내는 일이라고!!]
[하지만 전쟁에 살아남은 자들은 란과 우가 아닌 우리들을 죽이려 했지.]
빠득-
요르의 대답에 해와 달의 관망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몇 번이나 똑같았다. 우리의 힘을 받아 살아남은 계시자들이 어째서 왕좌 전쟁을 끝내고 나면 한결같이 란과 우의 편을 들까.]
그것이 탑이 만들어진 이유기도 했다.
[그, 그야……!! 놈들의 꾐에 넘어 가는 것이겠지!]
[글쎄. 어쩌면 우리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 태초부터 존재한 그들을 봉인하고 현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말이야.]
[무슨 헛소리야. 란과 우가 다시 세상에 나타나게 되면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네가 잘 알 텐데.]
[그렇다 한들 그것이 순리라면 위상인 우리가 순리를 억지로 막아서고 있는 거잖아?]
척-
해와 달의 관망자가 팔을 뻗었다.
그의 손엔 【별해검】을 닮은 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 검끝이 자신을 향하자 요르는 굳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건 무슨 의미지? 【천두검】을 내게 들이밀다니.]
[그 시험. 포기해라. 가뜩이나 저 빌어먹을 회귀자 때문에 카니발의 속도가 빨라졌는데 자진해서 그 속도를 더 높이겠다고?]
[회귀의 특전을 남긴 건 너다. 관망자 주제에 인간을 돕는 척하니 이 사들이 났지.]
[……너!!!!]
[다들 그만하시죠.]
그때였다.
[……레아.]
해와 달의 관망자는 또 다른 등장인물에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계절의 방랑자.
로브를 벗자 갈색 곱슬머리의 여인이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나 참, 이놈이나 저놈이나 삼독문을 제집 다니듯 하다니…….]
요르는 그녀의 등장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검을 거두시죠. 우리끼리 싸워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아실 텐데요.]
[저 녀석이 이번 카니발을 망치려고 하는 걸 그럼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를 해 할 권리는 없습니다. 의무는 더더욱 없고요.]
[그럼 어쩔 생각이지? 만에 하나 남궁이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6개의 문이 사라지는 거다. 그만큼 란과 우의 봉인을 유지할 힘이 없어지게 되는데도?]
레아는 요르를 바라봤다.
마도의 신이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눈동자는 요르로서도 껄끄러운 것이었다.
[문은 결국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되었든 결국 카니발의 승자는 결정되고 왕좌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우우우웅…….
레아가 두 손을 모으자 그 안에 수많은 구슬들이 나타났고, 그곳에서 카니발의 참가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봉인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걸 모를 리 없기에 그가 안배를 둔 것이겠죠. 안 그런가요?]
[……쳇, 재미없는 녀석.]
요르는 그녀를 향해 입술을 삐쭉거렸다.
[당신은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니까요. 우(无)의 탑을 세운 것도 당신이잖습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해. 당연 한 것 아니냐. 설령 반기를 든 자들이라도 그들은 한때 우리를 따르던 자였으니까.]
그런 그녀의 말에 요르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왕좌 전쟁을 끝내고 힘을 가진 자가 우리의 뜻과 어긋나지 않고 부디 란과 우를 처단해 주기를 바라는 것. 이제는 우리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해야 할 일이겠군요.]
레아의 말에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남기철을 어떻게 생각하지?]
[무슨 뜻이지?]
[녀석이 그러더군. 전생의 네가 그의 아비와 계약을 맺었다고 말이야.]
[블랙 루트를 열 수 있는 노인네 말이냐.]
[맞아. 그 정도 능력이라면 남궁을 뛰어넘을 수도 있겠지.]
요르의 물음에 해와 달의 관망자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와 계약을 맺었다고? 빌어먹을…… 나도 갈 때까지 간 모양이로군.]
그는 한심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찡그렸다.
[됐다. 아직 계시자가 살아 있는데 바꿀 만큼 쓰레기는 아니니까.]
그는 검을 집어 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명심해라. 나는 이번에야말로 란과 우를 소멸시킬 것이니까.]
화르륵…….
해와 달의 관망자가 사라진 뒤 레아는 긴장이 풀린 듯 어깨를 떨궜다.
[이해하세요. 그가 어째서 그토록 태초의 위상을 증오하는지 아시잖아요.]
[그래. 기억이 전이된다는 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지.]
요르는 그녀의 말에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눈물의 사용법을 알게 될까요?]
[글쎄. 나도 몰라. 하지만 그 이전에 시험에서 살아남는 것이 먼저겠지.]
[그는 카니발을 연 우리들을 증오하고 있어요. 저는 그걸 알면서도 당신이 그를 계시자로 뽑은 이유가…….]
[쉿.]
순간 요르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자 레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당장에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충분해. 녀석이 시험에서 살아남는지가 먼저라고 했으니까.]
[……알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우리가 하는 일이 과연 옳은 것인지 가끔 의문이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으로 인간에게 칼자루를 쥐여주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삼독문을 나서기 전 그녀는 다시 한번 요르에게 말했다.
[안배가 아니라 독을 쥐여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태초의 인간의 눈물】
그것은 신살(神殺)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도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