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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화 (202/270)

202화

“카를로스.”

남궁은 복도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톤이 바뀌었군.’

인간처럼 육성으로 말하던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다른 대리자 일족처럼 머릿속에 울렸다.

‘그동안 룬을 더 먹어치운 건가.’

카를로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주위로 작은 박쥐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미 요정족에겐 팔각전쟁을 포기하도록 하셨겠죠. 그렇게 되면 페어리 퀸이 죽을 이유도 없지요. 그런데 왜 따님에게 그리 잔혹하게 말씀하신 겁니까.]

“아직 확답을 들은 건 아니니까.”

[아하, 여왕에게 말입니까?]

카를로스는 남궁의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미 여왕과 짜고 친 것 아닙니까. 딸에게는 죽을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요정족의 자리에 저를 넣으시려는 것…… 아닙니까.]

“눈치는 있군.”

[크, 크큭…… 제대로 절 속이셨군요.]

“딱히 속인 건 아닌데? 네가 원하는 건 대리자 일족의 빈자리에 들어가는 것이잖아. 그것만으로 충분히 일족은 유지된다. 그러니 굳이 이형의 왕에 오를 필욘 없지.”

[하지만 그럼 누가 그 자리에 오를 겁니까. 야차? 당신이 정말 그를 죽일 수 있습니까?]

“어.”

[…….]

카를로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형의 왕이 되고 위상의 힘을 얻게 되었을 때, 그 힘을 빼앗기 위해서는 그를 죽여야 합니다. 차라리 그것보단 제게 그 자리를 맡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남궁은 그의 말을 무시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저를 제대로 속이셨군요.]

“속인 건 네가 먼저지.”

[……네? 당신과의 계약을 위해서 블랙 루트까지 다녀왔습니다. 그런 제가 속였다고요?]

“그래.”

카를로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규류는 죽어도 된다. 현류라는 대리자가 있으니까. 너는 일족의 수장이 죽으면 일족이 소멸한다고 했지? 하지만 그건 수장의 자리를 물려받을 자가 없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전생에서 남궁은 야차 일족의 수장인 무휘의 죽음을 봤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뒤에도 야차 일족은 소멸되지 않았다.

“다른 일족들도 마찬가지야. 팔각전쟁에서 패배의 대가로 죽는 것은 수장이지만, 수장을 맡을 후임이 있다면 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너는?”

[……네?]

“탑 안에 일족이 아직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도망쳐 나온 건 너 혼자뿐.”

[그러니 제가 위상의 힘으로 탑을 열고 난 뒤 다시 남궁 님께 그 힘을 바친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저의 자리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있어서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카를로스의 외침에 남궁은 피식 웃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하아, 그 믿음을 위해서 블랙 루트에 다녀온 것이지 않습니까. 죽음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그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게다가 제가 만든 룬까지 쳐드셨으면서!!!]

“뭐?”

[죄,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해서 말이 헛나왔네요. 그러니까…… 제가 만든 룬까지 드셨으면서 말입니다.]

남궁이 노려보다 카를로스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피했다.

“그래서 팔각전쟁의 빈자리를 준 거잖아. 네 예상대로 요정족 대신 그 자리에 악마족이 들어갈 거다.”

[하지만…….]

“난 널 믿는다. 그러니 너도 날 믿어야겠지. 하지만 네게 후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일단은 대리자 일족의 자리에 앉아 일족의 존속을 유지 할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

하지만 남궁의 말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의 얼굴은 일그러진 채였다.

[일단은? 그럼 이후에 바뀔 가능성도 있는 겁니까.]

“아무리 봐도 일족의 존속이 아니라 위상의 힘을 노리는 것 같이 보이는데.”

[하, 하하…… 그냥 여쭤보는 겁니다.]

“아직은 널 믿는다. 그러니 쓸데없는 헛소리 하지 말고 룬이나 만들어. 아직 노움 일족과 귀귀족도 처리해야 하니 시간이 걸릴 거다. 그동안 최소 레어 등급 이상의 룬을 가져와.”

[……그렇게 계속 저를 부려먹기만 하실 건 아니시죠?]

오싹-

카를로스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남궁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경고했다.

지금은 온간 아첨을 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어쨌든 그는 분명 요란 일족을 카니발의 승자로 이끌었던 대리자 일족이었다.

결코 약한 종족이 아니라는 것.

“살기 내려. 대리자 일족의 자리를 받기도 전에 죽고 싶지 않으면.”

[……알겠습니다.]

부글거리는 화를 간신히 누르며 말하는 듯한 그에게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고 남궁은 복도를 향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단순히 힘만이 아니라 악마족은 교활한 놈들이니까. 언제라도 우리에게 칼을 겨눌 수 있어. 그 때문에 우리 일족도…….]

라테아는 말을 아꼈다.

“알아. 카니발에서 절대적인 믿음은 없어. 언제든 배신할 수 있지. 그러니 최대한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것만 이용해 먹을 거다.”

[나의 아버지는?]

“그와는 죽이 잘 맞았지. 적어도 목표가 같았으니까. 이번이 안 되면 다음에는 꼭…… 놈들을 죽이겠다는 열망 말이야.”

남궁은 그녀가 왜 묻는지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걱정 마. 그는 전생에서부터 내가 마지막까지 믿었던 존재니까.”

[아니. 그 반대다. 그렇다면 이번엔 나의 아버지도 믿지 말라는 말이다.]

“……어째서?”

[네가 나의 아버지를 만났던 시기와 지금은 또 상황이 다르니까. 전생에 그랬다 해서 나의 아버지가 똑같을지는 모르지.]

예상과 다른 대답에 남궁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의 아버지는 위대한 영웅이지만 야망가이기도 했다. 카니발의 종결과 인간의 해방. 물론 그런 원대한 목표가 있었지만 그와 더불어 힘을 원했던 자이기도 하니까.]

“그 전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나 역시 네가 어떤 자인지 조금 더 확인을 해볼 필요는 있으니까. 내 목숨을 맡기는 것까진 할 수 있으나 내 영혼까지 맡겨도 될 자인지 말이야.]

“나를 시험한 건가?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다들 쉬운 녀석이 없군. 그래서 답은?”

[나의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것을 네가 하리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역시 언젠가 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마라.]

“…….”

남궁은 말을 멈췄다.

[너를 과거로 보낸 것이 아버지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

“그가 목적이 있어서 나의 회귀를 도왔다는 건가.”

[아직은 모르지만…… 아버지는 위상에게 희생당한 자들을 부활시키려 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순리를 역행하려고 했던 일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역시 꼭 옳은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신기하군. 당신이 내게 그런 얘기를 하다니.”

전생에 대마족의 퀘스트를 끝내는 시간 동안, 레오릭은 남궁의 마지막 동료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동료의 딸이 자신의 아버지를 의심하라는 말은 반대로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할 터.

“명심하지.”

[단검을 꺼내보겠나.]

그녀의 말에 남궁은 레오릭의 단검을 꺼냈다.

“……흠?”

[역시.]

사용하지 않아 몰랐는데, 전대에서 단검을 꺼내자 단검의 날이 마치 뭔가에 반응하듯 떨리고 있었다.

[그 단검이 내 피를 머금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단검의 반응이 나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울린다. 그리고 그 강도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

“……이건 무슨 반응이지?”

[내 기억으론 카를로스를 만난 이후부터 단검의 반응이 변한 것 같아. 아버지와 연관된 자들을 만나면서 유품의 힘이 강화된다는 건, 곧 아버지와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뜻이겠지.]

라테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곧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을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전생에 너는 유품을 모두 모으지 못했지?]

“맞아. 삼독문에 가지 못했었으니까.”

[유품을 모두 모은 아버지는 강하다. 분명 나 같은 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지.]

라테아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느껴졌다.

아버지를 경계하라고는 했지만 그의 강함을 자식으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그렇군.”

남궁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그녀가 레오릭의 투구로 망자화를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만약 레오릭을 만나 그에게 다시 모든 유품이 돌아가게 된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영체를 사역하는 방법도 있지만 투구 없이 영혼 병사로 만들게 되면 그녀는 지금처럼 자신의 의지를 갖추기 어려울 것이다.

“…….”

남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레오릭을 만나는 것이 그녀와의 이별을 의미한다는 것이었으니까.

복도를 걷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 무게가 이제 조금씩 카니발의 끝을 향해 가는 것임을, 그는 알 수 있었다.

* * *

[해인 일족의 보물섬에서 가져온 물건입니다.]

흠뻑 젖은 몰골로 나타난 규류는 두 개의 물건을 가지고 왔다.

[말씀대로 녀석들의 보고에 레전더리는 없더군요. 대신 쓸 만한 에픽급 무구를 가져왔습니다. 현류도 함께 갔었으니 쓰레기는 아닐 겁니다.]

“꼴이 말이 아닌데. 고생했어.”

[별말씀을.]

남궁은 규류가 가져온 물건을 살폈다.

넘버링 992

이름 : 발라의 도끼

등급 : 에픽

▶ 해인 일족의 선조이자 위대한 바다 영웅 발라가 생전에 사용했던 도끼

▶ 스스로 사용자에게 적의를 가진 자를 찾는다.

▶ 적을 처리하는 숫자가 증가하는 만큼 도끼의 위력도 증가한다.

▶ 도끼는 피를 원한다.

[일족의 보물섬에 있는 것 중에 가장 쓸 만한 무기입니다. 저주를 받은 것도 아니고 에픽치고는 파괴력도 좋고요.]

“흐음, 그렇군.”

[그런데 묘하네요. 어째서 해인 일족의 계약자가 쓸 만한 무기를 구해오라고 하신 겁니까? 정말 그녀에게 무기를 줄 생각입니까.]

“팔각전쟁에서 패배했다고 대리자 일족이 사라지는 것은 아냐. 그리고 카니발을 끝내기 위해서 계약자의 힘은 절실하지.”

[딱히…… 함께 싸울 만한 상태로 보이진 않던데요.]

소론의 죽음 이후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요르드는 소식이 끊킨 상태였다.

“필요한 준비를 할 뿐이야. 날 원망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나약했다면 대리 경매에서 살아남지도 않았겠지.”

[저라면 후한을 남겨두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죠.]

“날 죽이기 위해 살아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지. 그렇다면 좋든 싫든 그녀도 싸우러 나온다는 뜻일 테니.”

남궁은 피를 머금고 있는 두툼한 도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언제나 전장에 있을 거니까.”

[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바다 마법서입니다. 고대 마법서 중 하나인데 풍랑(風浪)을 다룰 수 있는 마법이라고 합니다. 딱히 이렇다 할 살상력이 있는 건 아닌 자연 마법이지만…… 현류의 추천입니다.]

남궁은 도끼와 함께 내놓은 낡은 마법서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네. 앞으로 해양에서 소환 되는 마물들이 증가할 테니까. 해인 일족의 힘이 없을 때를 대비 할 수 있겠어. 현류가 잘 골랐군.”

[녀석도 그리 말하더군요.]

“이 책은 덴 하울에게 맡기도록 해. 본인이 익혀도 되지만 에픽 등급이니 협회의 마법사들에게 공급하는 것도 좋겠지.”

자연 마법은 규모가 클수록 위력이 더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뛰어난 마법사가 혼자서 시전하는 것보다 중급의 마법사 여럿이 시전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좋았다.

[7번째 문도 무사히 막고 탄탄대로네요.]

“당분간 자리를 비울지 몰라. 현류에게 일러 악마족을 감시하라 하고, 너는 노움족과 귀귀족을 마무리하도록 해.”

[어디 가십니까?]

“화신의 시험에 들 거다. 그러기 위한 준비.”

[……!!]

“영웅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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