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제법 시간이 흘렀군. 열흘 만인가? 그래, 시험을 치를 준비는 끝난 모양이지.]
옥좌에 앉아 있던 요르는 초췌한 얼굴로 나타난 남궁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과연 네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여줄지 궁금하군. 단순한 만용일지…… 아니면 이 또한 전생의 기억으로 준비한 계획인지 말이야.]
“전생의 기억은 필요 없어. 그 당시 나는 계시자도 아니었고 화신들을 사냥하는 걸 보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모두 죽고 난 뒤에도 너는 3마리의 화신을 죽였잖느냐. 그것도 혼자서 말이야.]
“그때는 이미 스무 번째 문이 열린 뒤였어. 화신들이 강하긴 하지만 문의 회차로 본다면 초반의 보스들이었으니까.”
요르는 남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시간이 흐를수록 문의 보스들도 강해지게 마련이지만…… 내 화신들이 약하다는 얘기는 좀 듣기 싫은 말이로군.]
챙그랑-
그는 작은 동전 하나를 그의 앞에 던졌다.
[내가 화신들을 문의 보스로 보낸 건 그 뒤의 문이 열리기 전에 카니발을 끝내 버릴 생각이었던 건데 말이야.]
“그래? 그렇게 말하면 확실하네.”
남궁은 요르가 던진 동전을 주우며 말했다.
“전생에도 실패했으니 이번에도 실패할 수밖에.”
[클클…… 어디 한번 보여봐라. 내 계시자가 그동안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친히 봐주마.]
화아아아악……!!
남궁이 쥔 동전이 불타기 시작했다.
▶ 사계(蛇界)의 문이 열립니다.
▶ 오직 일곱 뱀이 허가한 자들만이 이곳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동전에서 피어 오른 불꽃이 남궁을 감싸자 그의 시야가 새로이 변했다.
“흠…….”
음침한 아공간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눈앞에 펼쳐진 뱀의 세상은 생각보다 밝은 분위기였다.
울창한 숲과 함께 푸른 하늘.
오히려 현실보다 더 맑은, 기분 좋은 공간이었다.
콰아아아앙---!!!
아니, 기분 좋은 공간이었었다.
“큭?!”
남궁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뱀의 머리를 피하며 앞으로 굴렀다.
[키에엑--!!!!]
거대한 구렁이 같은 뱀이 몸을 꺾으며 남궁을 향해 달려들었다.
6번째 화신, 피톤.
무섭게 달려오는 괴물은 위압적이었지만 남궁은 능숙한 자세로 나무 사이를 통과하며 녀석의 공격을 피했다.
우지끈……!
쿠우우웅……!!
거대한 뱀이 남궁을 쫓아 숲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자 빼곡하게 자라나 있는 나무들이 녀석의 힘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물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 원시 아룡의 팔찌를 사용합니다.
▶ 어룡의 보석이 발동됩니다.
남궁이 손목을 꺾자 소환된 수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곱 마리 화신들 중 히드라를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녀석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피톤에게 힐끔힐끔 눈길을 주며 생각했다.
‘물리적인 측면만 강할 뿐. 다른 놈들과 달리 특별한 환술을 쓰는 건 아냐.’
운이 좋았다.
일대일로 사냥하기 가장 좋은 상대였기 때문이다.
“가자.”
남궁의 발아래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나트리엘이 나타났다.
[크륵!!]
그가 뿔을 움켜잡으며 나트리엘의 등 위에 올라타 녀석의 옆구리를 가볍게 발로 두들겼다.
솨아악……!!
그러자 나트리엘은 미끄러지듯 빠른 속도로 숲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기로군.’
수어들의 시야가 공유된 상태에서 남궁은 숲 안에 있는 거대한 호수를 찾았다.
[크르르르륵……!!]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불도저처럼 나무들을 부수며 달려오는 피톤을 바라보고는 나트리엘의 속도를 올렸다.
파앗-!
빼곡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사라지자 그의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숲 안쪽에 거대한 호숫가 있었다.
파앗-!!
나트리엘이 그 위로 뛰어오르더니 탁!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발을 구르며 날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피톤이 그의 뒤를 따라 호수 위로 뛰어들었다.
우지끈-!!!
그 순간, 호수 아래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피톤의 허리를 물어뜯었다.
콰가가가가강……!
피톤이 괴로운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꿈틀거렸고, 녀석의 허리에 박힌 두터운 이빨이 뽑히자 상처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크르륵…….]
비틀거리는 피톤의 목을 다시 한번 물어뜯는 푸른 써펀트.
용아(龍牙)의 이빨이 사정없이 녀석의 비늘을 꿰뚫었다.
“부탁한다.”
두 마리의 뱀이 뒤엉키는 것을 보며 남궁은 좀 더 속도를 올렸다.
[멈춰라. 인간이여.]
[이 이상 갈 수는 없다.]
용아와 피톤이 뒤엉키는 굉음이 서서히 줄어드는 시점에서 남궁의 앞에 두 사람이 막아섰다.
둘은 뱀의 화신이지만 조금 전 피톤과는 모습이 달랐다.
온전한 뱀의 형태가 아닌 반인반수의 모습.
그들은 상체는 인간의 것을 가졌고 하체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창을 단 다부진 사내는 3번째 화신인 튀폰이었고, 두 자루의 쌍검을 든 여인은 4번째 화신인 라미아였다.
“오랜만이로군.”
남궁은 그들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아아압……!!]
튀폰이 두터운 창을 들어 남궁에게 뛰어들었다.
카앙-!!
하지만 그 순간, 그의 공격을 아스가 가로막았다. 동시에 소환된 나머지 영혼 병사들이 그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건방진……!!]
달라붙는 영혼 병사들을 향해 일갈을 내뿜으며 튀폰이 창을 휘둘렀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일격을 당한 영혼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부서지며 사라졌다.
재로 변한 병사를 뚫고 다른 영혼 병사를 향해 창을 찌르려는 순간,
촤르르륵……!!
그의 발아래에서 검은 사슬이 튀어나와 구속했다.
쿠웅-!!!
영혼 주술사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그를 붙잡고 있는 사슬이 점점 더 두터워졌다.
▶ 영혼 지대 Lv 10(최대)가 발동 됩니다.
▶ 영혼 강화 Lv 10(최대)가 발동됩니다.
▶ 영혼 지대 안에 있는 모든 영혼 병사들의 능력이 일시적으로 강화됩니다.
▶ 지속 시간 15분
붉은색의 영혼 지대가 발아래 생성되었고 그 위에 선 영혼 병사들 전신에 흑색의 갑옷이 생성되었다.
지금까지의 강화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상급 사령술에 도달함과 동시에 모든 스킬들이 최대치로 상승한 지금, 영혼 병사들의 강화 역시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푸욱-!!!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튕겨 나갔던 영혼 병사들의 검이 튀폰의 비늘을 뚫고 박혔다.
[크윽?!]
튀폰은 생각지 못한 그들의 공격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떨어져……!!!]
화아아악---!!!
그의 창날을 휘감는 돌풍이 영혼 병사들을 떨궈내려 요동쳤다.
쿵-!!
하지만 바람이 영혼 병사들을 공격하기 직전, 아스의 강화된 도끼가 떨어지며 그의 팔을 잘라 버렸다.
[크아아아악!!!]
튀폰이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 이…… 개 같은!!]
튀폰의 두 눈이 붉게 변하며 인간의 상체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촤르르륵-!!
하지만 남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튀폰의 뒤로 돌아간 남궁이 그의 어깨 위로 올라타며 사슬로 목을 조였다.
[……컥!!]
튀폰은 사슬을 풀려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남궁의 사슬은 그의 목을 더욱더 조여왔다.
[멈춰……!!]
라미아가 황급히 쌍검을 들어 남궁에게 달려들었다.
붉은 뱀의 문양이 그려진 검이 번뜩였다.
남궁은 그 끔찍한 검을 바라보며 바득- 이를 갈았다.
일곱 마리의 화신 중에 가장 강력한 마물은 히드라였지만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은 바로 라미아였다.
‘미혹의 검.’
검 끝에 닿기만 하더라도 착란을 일으키는 검은 수많은 사람들을 그녀의 명령을 따르는 노예로 만들었다.
검의 세뇌에 당한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일제히 각 도시의 다리 위에서 강물로 뛰어들었던 ‘자살비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콰앙-!!!!
라미아가 남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하지만 남궁은 코앞까지 날아오는 그 검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튀폰의 목을 감은 사슬을 더욱더 강하게 잡아당길 뿐이었다.
[죽여주마!!!]
그녀의 외침이 숲을 울렸다.
콰아아아앙---!!!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의 검이 남궁에게 닿기 직전, 상공에서 소환된 드래곤의 머리가 그녀를 통째로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우드득-
동시에 남궁이 사슬을 감았던 튀폰의 머리를 비틀었다.
쿠웅…….
튀폰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졌고 남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크르르르…….]
소환된 엘더 드래곤이 머리를 조아리자 그는 녀석의 이마를 가볍게 툭툭 쳤다.
‘이제 4마리인가.’
그는 전대에 넣어둔 포션을 입에 털어 넣으며 숲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산맥을 바라봤다.
바위를 깎아 만든 정상까지 올라가는 계단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의 모습이 보였다.
‘우로보로스…….’
놈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독기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느껴졌다.
특이한 모습만큼이나 녀석을 공략하는 방법도 특별했다.
“이봐. 이제 너희들 차례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특이한 행위는 단순히 우로보로스를 마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무한이란 우로보로스의 자세에 담긴 신화적 의미.
그것은 연금술이었다.
‘녀석은 오직 연금술로만 죽일 수 있다.’
화아악……!!
남궁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의 앞에 로브를 덮어쓴 한 사람이 나타났다.
“진웨이.”
[…….]
검은 가면을 쓴 사내는 남궁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건틀렛을 사용했던 그때와 달리 그는 검은 로브와 함께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에이라 미쉘.”
그리고 그 뒤에 그와 같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여인은 거대한 망치를 들고 서 있었다.
콰아아앙---!!!
남궁의 눈짓에 진웨이가 낫을 들어 계단 위를 지키고 있는 우로보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걱-! 서걱-!!
그의 낫이 움직일 때마다 우로보로스의 비늘에 날카로운 상처들이 나기 시작했다.
[……키에엑!!]
우로보로스는 진웨이의 공격에 고통스러운 듯 몸을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 * *
[저 녀석들은…… 죽은 계시자들이잖아? 전쟁 영웅을 소환하겠다고 하더니 어째서 저들이 있는 거야?]
화신의 시험을 내려다보던 요르는 남궁이 소환한 두 사람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신기한 일이군. 도대체 무슨 마술을 부려 저들을 사역한 거지? 자신을 죽인 자를 따를 리가 없을 텐데.]
요르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설마……?]
그 순간, 마치 자신의 시선을 알고 있다는 듯 위를 쳐다보는 남궁의 눈빛이 그에게 들어왔다.
[크, 크큭…… 그런 건가?]
생전에 사용했던 무기가 아닌 특이한 무구들.
[저들은…….]
요르는 남궁이 어떻게 그들을 사역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빈껍데기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