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강자와 싸우고 싶다? 뭐,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 네놈들이야 워낙 이상한 놈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었어.”
[……무슨 말이지?]
“아포피스의 내단을 먹은 내가 과연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지 알고 그런 짓을 벌였을까. 네 말대로 기껏해야 아직 카니발의 7번 문까지밖에 열지 못한 상황인데.”
훨씬 더 많은 문이 열리고 오랜 세월이 지났을 때도 죽이지 못한 괴물이었다.
시간이 앞당겨진 만큼 히드라 역시 완성되지 못한 상황이라 한들, 과연 그 격차가 얼마나 줄어들었을까.
영혼 군림으로 3마리의 화신들을 소환했을 때 남궁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로 놈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게 네 실수였다. 다른 놈들이 그런 말을 했다면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지만 너는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어.”
“어째서?”
“너무 강했거든.”
남궁의 대답에 히드라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영혼 군림으로 소환한 3마리의 화신들을 압도해 버리는 네 모습을 보고 깨달았지. 고작 아포피스의 내단 정도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그렇게 말하면 쓰나. 너는 나를 죽이러 온 자 아니던가? 화신의 시험을 포기하려고?]
“그럴 리가. 이쪽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오긴 했거든. 갑작스럽게 내단을 얻게 되어서 쓰지 못했지만.”
촤르륵-
남궁은 허리에 차고 있던 전대 안에서 물건을 꺼내 그의 앞에 던졌다.
[오시리스의 채찍.]
히드라는 그가 꺼낸 무구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마도 죽음을 1번 피하게 해주는 무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할 생각인가? 뭐, 나름 도박을 위한 준비는 한 셈이로군.]
“이게 카니발의 물건이었다면 그렇겠지.”
[흠?]
남궁의 말에 히드라는 다시 한번 채찍을 살폈다.
[넘버링이 없다…… 설마 블랙 루트에서 얻은 건가?]
“맞아.”
[이걸 누가 열었지?]
“내 아버지.”
히드라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이 블랙 루트를 열었다? 미쳤군. 블랙 루트는 원래 위상의 특권이다. 그런데 그걸 인간이 열었다는 게 무슨 의민지 아느냐.]
“온전한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래. 그거다. 그 죽음이 쌓일수록 그자의 수명도 갉아먹게 되지. 네 아비는 몇 번의 블랙 루트를 열었지?]
“글쎄. 모르긴 몰라도 서너 번은.”
진웨이와 에이라 미쉘의 훈련이 끝난 뒤, 마지막으로 그들은 화신의 시험을 위해 던전을 공략했다.
블랙 루트를 여는 것이 수명을 갉아 먹는 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남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남기철이 블랙 루트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서너 번? 그자는 설마 반신이라도 되는 거냐. 인간의 수명으론 블랙 루트를 한 번 여는 것도 대단한 일일 텐데?]
“한 번?”
[그래. 인간의 유한한 그릇으로 그럼 얼마나 대단할 것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느냐. 한 번도 엄청난 일이겠지. 설마 그자를 겁박하여 얻어낸 물건이냐.]
“…….”
남궁이 남기철을 찾아 갔을 때, 그는 이미 화신의 시험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각종 무구를 자신에게 건넸었다.
“그럴 리가. 넌 블랙 루트를 열 수 있는 자를 겁박한다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하나?”
퉁-
남궁이 던진 단검이 히드라의 옆에 꽂혔다.
[초장이의 단검? 검날에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던 검이었나…… 내 목을 잘라서 지지기라도 하려고? 크크, 재밌는 생각이야. 그래. 제법 머리를 굴리긴 했군. 그런데 이걸 안 쓰고 왜 내게 보여준 거지?].
“전설 속에서처럼 네 머리가 여러 개였다면 해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그른 것 같고.”
히드라의 웃음을 뒤로한 채 남궁은 남기철이 준비해 준 단검과 채찍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시험보다 궁금한 게 생겼거든.”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현존하는 무구들 중에서 히드라를 상대할 수 있는 최고의 것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얻을 수 없는 무구들.
‘저 두 개의 무구들도 모두 블랙 루트에서 얻은 것들이니까.’
[그게 뭐지?]
“블랙 루트에 대해서 네가 아는 것 모두.”
[하하, 재밌는 놈이군. 그럼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이지?]
“창에 봉인되어 있는 영혼을 풀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보지.”
[함께?]
히드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꼭 날 도와주려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이미 넌 창의 봉인을 푸는 방법에 대해서 짐작하고 있잖느냐. 아포피스의 내단은 네 힘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창 속의 영혼을 감지한 것으로 너는 그 힘을 증명했지.]
그는 말했다.
[창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요르의 사령술이 필요하다. 다만 지금보다 더 높은 단계의 힘이.]
“그렇다면 더욱더 너는 포기하지 말아야지.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국 내 힘이 필요한 것이니까.”
[그렇다면 거래의 조건을 바꿔야겠지. 봉인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아닌 봉인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으로.]
남궁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만 봉인된 존재가 우리 세상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조건만 확실하다면.”
[그런 거라면 문제없다.]
창그랑-
히드라는 자신의 창을 남궁의 발아래 던졌다.
[그 안에 봉인되어 있는 영혼은 인간의 것이거든.]
“……뭐?”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남궁의 표정이 굳어졌다.
“인간의 영혼?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거지?”
[그 이후는 정말로 네가 창의 봉인을 풀 수 있는 능력이 되었을 때 알 수 있겠지.]
“…….”
[대신 내가 알고 있는 블랙 루트에 대한 것을 네게 알려주마.]
그는 제단의 계단에 툴썩 앉았다.
“목숨 걸고 싸울 상대와 대화라…… 이야기가 어째 우습게 흘러가는군.”
[뭐, 나쁘지 않잖아? 목숨은 언제든 빼앗을 수 있는 것이고, 나는 수백 년 넘도록 이곳에 있었으니 조금은 말벗을 두는 것도 좋은 일이지.]
히드라는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블랙 루트. 너도 겪어 봤으니 알거다. 그건 던전의 이면을 열 수 있는 능력이지.]
주저앉은 그와 달리 남궁은 여전히 그를 경계하며 내려다봤다.
[카니발은 여러 차원에 존재하는 종족들이 문과 던전을 통해 불러내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참가자들의 역량에 따라 종족들의 힘이 재설정되지.]
“하지만 블랙 루트를 통한다면 그들의 진짜 힘을 볼 수 있지.”
[맞아. 블랙 루트는 서로 다른 차원을 잇는 것과 똑같다. 카니발을 통해 건너편의 종족들이 넘어오는 것처럼, 블랙 루트를 통해 카니발의 참가자들이 종족들에게 넘어 갈 수 있는 거지.]
“그리고 그 조건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 다 아는 얘기는 좀 그만하지?”
[죽음은 가짜가 아니다. 죽음은 차곡차곡 쌓여 시전자를 갉아먹지. 모르긴 몰라도 네 아비는 이미 반송장이나 다름없을 거다.]
“글쎄, 그렇다고 하기에 너무 쌩쌩하던데.”
[인간은 죽음을 역행할 수 없다. 인간에게 허용된 죽음은 단 1번 뿐. 아무리 가짜라도 인간에게 주어지는 블랙 루트의 기회는 1번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 역시 블랙 루트를 경험했는데?”
[넌 그저 블랙 루트의 시험을 경험한 것뿐 그 어떤 대가를 지불 한 것이 아냐. 오히려 너로 인해 네 아비가 2배의 대가를 지불한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어째서 아버지는 블랙 루트를 그렇게 많이 열 수 있는 거지?”
[그건 나도 모르지. 혹시 네 아비는 신이냐.]
“……그럴 리가.”
[아니면 데미갓?]
“그냥 평범한 인간이다. 아니, 평범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이상한 일이로군. 죽음을 빗겨 나는 방법은 스스로 위상이 되거나 그에 준하는 반신이 되는 것뿐이다. 설령 대리자 일족이라 한들 위상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블랙 루트를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결국 알 수 없다는 뜻인가?”
[글쎄, 확인을 해볼 필요는 있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있긴 해.]
“그게 뭐지?”
[너.]
“……?”
[시간을 역행하는 것. 그건 일종의 부활과도 같지. 너 역시 그러하지 않느냐. 전생의 죽음이 닥칠 미래를 두고 과거의 현재로 도망쳤으니.]
“하지만 그건 다르지. 나는 카니발의 퀘스트를 통해서 회귀한 거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위상의 계시자도 대리자 일족의 계약자도 아냐.”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전생의 네가 전설급 퀘스트를 성공시켰을 때, 너는 무엇이었지?]
히드라는 남궁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었잖느냐.]
남궁은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카니발은 수없이 많이 일어났었고 던전과 문에서 나오는 마물들은 타 차원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일종의 초대를 받은 것이지. 참가자가 아닌 마물로서.]
히드라는 말했다.
[그렇다면 반대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닌가? 꼭 너희만이 참가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법은 없잖아.]
남궁은 어쩐지 그의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 목소리 끝에 숨어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너희를 찾아오는 카니발의 마물처럼. 너희 역시 다른 차원의 카니발에서 마물이 될 수도 있겠지.]
“설마…… 아버지께서 다른 차원의 카니발을 경험했다는 말이야?”
[뭐, 그걸 확인해 보는 건 네가 해야 할 일이겠지. 하지만 만약 네 아비가 참가자가 아닌 다른 형태로 타 차원의 카니발을 경험했다면 블랙 루트를 여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째서?”
[원래 블랙 루트는 마물의 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참가자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느냐. 그는 마물로서 카니발에 징용되었겠지.]
히드라는 남궁을 향해 말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닐 지도 모르겠군.]
“……·헛소리.”
[딱히 허무맹랑한 소리라고는 할 수 없을걸. 블랙 루트를 한 번도 아니라 수차례 열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수명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카니발이 열리기 전에 이미 다른 차원의 카니발을 겪고 능력을 얻었다는 뜻일 텐데.’
어째서 자신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카니발이 어떤지 이미 알고 있었다면…… 적어도 전생에 끔찍한 비극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과연 그럴까? 오히려 전생의 비극을 겪었기 때문에 네가 퀘스트를 완수할 수 있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진 않아?]
“뭐?”
[네 아비가 너를 찾지 않았던 건…… 인간이 아니라는 건, 카니발의 끝에서 그는 인간의 위치에 설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히드라는 말했다.
[그는 우리와 같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존재. 언젠가…… 문의 보스가 돼야 할 존재라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