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믿을 수가 없군. 이 안에 아버지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다고?]
화신의 시험이 끝나자 단절되었던 영혼들이 돌아왔다. 삼독문을 지나 현실로 돌아온 남궁에게 라테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우우웅…….
남궁이 단검을 꺼내자 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단검이 강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반응이 강해졌던 건 마지막 유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혼에 가까워졌었기 때문인가.]
라테아는 단검의 반응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봉인을 풀 수 있을까?]
“히드라의 말에 따르면, 상급 사령술을 익히게 되면 봉인을 풀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시험을 통과…… 했기 때문에 잠겼던 사령술의 등급이 풀리긴 했지만, 아직은 부족한가 보더군.”
통과란 말을 입에 담으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사령술을 살폈다.
아포피스의 내단 덕분에 승급된 상급 사령술의 술법 3가지는 모두 레벨이 없었다.
그 말은 처음부터 최대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능력을 사용해 보고 난 뒤 그는 알 수 있었다.
‘레벨이 없다는 것은 술법의 강함을 단순하게 구분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더 이상 남궁에게 있어 사령술은 단순한 스킬이 아닌, 끝없이 반복해서 경험으로 익혀야 하는 실제의 능력이 된 것이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을 찾는다면 가능할지 모른다. 어쨌든 전생의 너는 아버지를 만났잖으냐.]
남궁에게 라테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인연은 생각보다 깊고 단단하니까.]
“레오릭의 마지막 유품이라…… 전생에도 얻지 못했던 것이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군.”
[적어도 삼독문에는 없었던 모양이다. 단검은 유품의 위치를 쫓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도 하는 것 같더군. 네가 그곳에 갔을 때 단검은 반응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남궁은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지만…… 서두르다 봉인을 잘 못 해제하는 실수를 하면 안 되겠지. 조급해하지 말자.]
그녀는 마치 자신에게 다독이는 것처럼 남궁에게 말했다.
“일단은 새롭게 익힌 사령술들을 좀 더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지. 레벨이 없다는 것은 결국 계속해서 사용함으로써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니까.”
[8번째 문이 열렸더구나.]
“그런 것 같더군. 돌아오자마자 한기가 느껴지는 것을 봐서는 말이야.”
쿠그그그그…….
남궁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커먼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 우레왕의 아내인 가이나스가 온 모양이군. 온 세상에 눈이라니…… 정말 끔찍한 여왕이야.]
“아니, 오히려 나는 이 눈이 반가운걸.”
[어째서?]
무명은 남궁의 대답에 의아한 듯 되물었다.
“가이나스가 처음 문을 통해 강림했을 때 내린 눈은 고작 이런 것이 아냐. 하나하나 마치 날카로운 칼날 같았고, 수천, 수만…… 아니, 마치 소나기처럼 내려 전 세계를 뒤엎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파슥-
남궁은 펼친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눈꽃을 털어내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이것들은 너무나도 평범한 눈들이지. 봐, 오히려 아름답기까지 하지 않은가.”
한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죽음의 눈을 바라보며 남궁은 또 하나의 변곡을 느꼈다.
“록산느가 전장에 나선 것이다.”
쿠후란이 남긴 【드루이드의 눈물】을 흡수한 그녀가 아니라면 눈꽃 여왕의 힘을 억누를 수 있는 자는 없을 테니까.
“화신의 시험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끔찍한 무력감을 느꼈다.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나의 자신감을, 그들은 무참히 무너뜨렸지.”
저벅- 저벅-
남궁은 천천히 성채를 나섰다.
“하지만 그렇다고 멈춰 있을 수만은 없지. 무력감을 잊지 않고 고통을 양분 삼아 나는 더욱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가이나스를 사냥하러 가는 건가?]
“아니. 드루이드의 힘을 깨우친 록산느가 있다면 그녀는 더 이상 인류를 위협하는 보스가 될 수 없어.”
[그렇다면?]
“강해지기 위한 수단.”
-기다렸습니다.
그 순간, 주위를 휘감던 추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따뜻한 봄날과 같은 기운이 남궁을 감쌌다.
남궁은 자신의 앞에 선 작은 여왕을 바라봤다.
“페어리 퀸이여.”
그녀는 그에게 허리를 숙이며 천천히 웃었다.
-호수를 찾아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늦었습니다. 정리할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제가 너무 오랫동안 왕좌에 있었나 보네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소민이와는…… 얘기를 잘 나눴나?”
-돌아오면 가장 먼저 지팡이로 후려칠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걱정했습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라고요.
남궁은 그녀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명하신 일은 모두 끝냈습니다. 요정족은 더 이상 대리자 일족이 아니며, 팔각전쟁을 포기한 대가로 저는 여왕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우우우웅…….
페어리 퀸이 두 손을 모으자 그녀의 손바닥 위로 작은 빛무리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이번 카니발의 대리자 일족임을 증명하는 【규율의 빛】입니다. 저는 이것을 악마족의 수장, 카를로스에게 넘길 것을 약속합니다.
[지금부터 악마족은 카니발의 새로운 대리자 일족이 되어 남은 축제를 도울 것입니다.]
남궁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카를로스가 기다렸다는 듯 여왕의 빛을 받았다.
“앞으로 뭘 할 생각이지? 가능하다면 소민이의 곁에 남아 있으면 좋겠는데.”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왕의 자리를 내려놓는 순간 저는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소민이가 슬퍼하겠어.”
-아뇨, 오히려 그녀와의 유대는 더욱 깊어질 겁니다.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 저는 소민 양의 지팡이에 깃든 힘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할 테니까요.
남궁은 여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카니발이 없길 바라지만…… 혹여나 또다시 기회가 온다면, 그때도 요정족은 당신을 지지하겠습니다.
그녀가 가벼운 날갯짓으로 다가와 남궁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 페어리 퀸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 3일 동안 당신의 모든 능력이 50% 상승합니다.
-위험한 일을 할 생각이시죠? 떠나기 전 마지막 제 선물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과분할 정도의 선물이로군.”
남궁의 대답에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솨아아아악…….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여왕이 떠났군요. 인사도 없이 가다니. 조금은 섭섭한걸요.]
그때였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 사이로 규류의 모습이 나타났다.
툭-
그는 피가 묻은 주머니를 남궁의 앞에 내려놓았다.
[귀귀족의 수장입니다. 계약자가 죽은 뒤에 주춤했으나 끝까지 팔각전쟁을 포기 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결국 일족을 이끌고 정리했습니다.]
“고생했다.”
[이제 남은 건 비룡족이군요. 뭐, 그곳이야 수장의 자리에 오른 애송이 하나뿐이니…… 금방 정리가 되겠지요. 뭣하면 제가 끝낼까요.]
“아니, 내가 마무리 지을 거다. 어차피 비룡족이 마무리되면 팔각전쟁도 끝나는 거니까.”
[크흠…….]
남궁의 말에 카를로스는 헛기침을 하며 규류를 힐끔 바라봤다.
[도무지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요. 야차와 악마 중에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결국 끝나지 않을 일인데 말입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카를로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규류. 너는 비룡족에게 가 내 말을 전해라. 원만한 마무리를 바란다면 수장이 직접 나를 찾아오라고.”
[그렇지 않겠다면요?]
“수장의 목숨 하나로 끝날 일을 일족 전체의 멸족으로 마무리 짓게 되겠지.”
[역시 시원시원하십니다.]
규류는 엄지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미는 하루를 주겠다고 전해라. 고민할 일도 아니니 시간도 굳이 필요 없겠지.”
[알겠습니다.]
“너희 둘은 내일 이 시간이 되면 성채로 와 기다리고 있어라. 대리자 일족의 전쟁은 이곳에서 끝나게 될 것이다.”
[드디어…….]
카를로스와 규류는 서로를 바라봤다.
‘설마 저 녀석에게 승자의 자리를 줄까? 말은 죽어도 된다고 하지만…… 한눈에 봐도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설령 내가 죽더라도 배신할지 모르는 악마 놈에게 자리를 내줄 수 없지. 어차피 수장의 자리도 남궁 님 덕분에 오른 거잖아.’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 서로를 보는 그들은 우습게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살아서 왔구나. 솔직히 나는 송장 치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모닥불이 서서히 꺼지려는 밤.
한국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울창한 숲속에서 남기철은 꺼져가는 불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뭐, 죽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창피하게 목숨을 구걸받았네요.”
“그럴 거라 생각했다. 너무 성급했어. 히드라는 무기가 있다고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그걸 아시면서 제게 무기를 구해 주셨습니까.”
“네 녀석이 0.001%라도 죽지 않을 확률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니까.”
남궁은 자신의 아버지의 말에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모습은 남궁이 찾아왔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블랙 루트를 몇 번이나 더 겪었을 텐데도 말이다.
‘단순히 횟수의 문제가 아니었어.’
남궁은 처음엔 전생의 남기철이 죽은 이유가 블랙 루트를 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생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블랙 루트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전생에 그가 죽은 데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아버지는 인간입니까?”
“별 시덥잖은 소리를 하는구나. 술은 가져왔냐. 헛소리를 할 거면 보따리나 열어라.”
남궁은 들고 있던 검은 봉지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흐음, 역시 한국이 좋기 좋군.”
편의점에서 사 온 음식과 술을 꺼내며 남기철은 마음에 드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클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인간이 아니면 뭐냐. 괴물이라도 된다는 소리더냐.”
드드득-
그는 소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그건…….”
“난 인간이다.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이니 걱정 마라.”
“…….”
순식간에 1병을 비워 버린 그는 언제나처럼 대충 병을 던져 버리고는 다음 술병을 찾았다.
“그럼 다시 물어도 됩니까.”
“뭔데?”
“전생에 아버지는 3번의 블랙 루트를 열었을 때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아마 그때쯤 죽었겠죠.”
“남이 죽었다는 얘길 쉽게도 하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많은 블랙 루트를 열었습니다. 블랙 루트의 횟수가 죽음과 관련된 게 아니라면…… 시간입니까?”
남궁은 그를 바라봤다.
“블랙 루트를 연 건 3번뿐이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카니발이 진행된 상태였죠. 알고 있었죠? 아버지가 문의 보스가 돼야 한다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죽은 것 아닙니까.”
“…….”
그 순간 남기철이 들고 있던 술병이 멈칫거렸다.
“괴물이 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