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지금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클락은 박효주의 무위(武威)를 보며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긴…… 쪽팔리게 되어가고 있는 거지. 쿨럭.”
“괜찮아?”
“가시가 온몸을 통과했는데 괜찮을 리가 있냐. 지금 거의 죽다 살아났다.”
“말하는 걸 보니 괜찮네, 이제.”
제렌은 클락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저 여자, 바람의 정령을 쓰고 있어.”
“염동력이 특기라고 알고 있었는데 운이 좋아. 상성이 잘 맞는 능력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거니까.”
“그 말이 아냐. 보통 속성 공격을 할 때는 역상성을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잖아? 내가 오룡권갑의 화룡을 꺼낸 것처럼 말야.”
“하지만 그녀는 바람을 쓰고 있군.”
“상성을 무시하는 짓이야. 그런데 이게 통하다니 말이 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효주의 공격이 통한다는 것은 그녀의 힘이 상성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일 테니까.
“아무리 버프가 있고 강화된 무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계시자는 계시자라고. 위상에게 얻은 힘은 절대적이야. 그런데 어떻게 저들이 우리를 압도할 수 있는 거지?”
“그건 너희들이 맥락을 잘못 짚었기 때문이지. 계시자의 힘은 확실히 그 어떤 힘보다 우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건 아니다.”
“……!!”
두 사람은 뒤에서 들려오는 남궁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있었던 겁니까?”
“너희들이 혹한으로 뛰어 들어갈 때부터? 처맞는 꼴은 잘 봤다.”
“으윽…….”
남궁의 말에 둘은 머리를 긁적였다.
“제렌, 너는 상대를 분석하고 주위를 파악하는 눈이 좋다. 불기린을 잡을 때도 그랬지. 하지만 단점은 모든 일을 너희 둘이서 해결 하려는 것이다.”
“그야…….”
“너의 변칙적인 계획을 따를 만큼 순발력이 있는 파트너가 클락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세상은 넓어. 너희들보다 특이한 인간들은 생각보다 많다.”
쾅―! 콰가가강―!!
그 순간, 날카로운 폭음이 터져 나왔다.
날아들던 얼음 가시들이 공중에서 폭발하며 산산조각 났고 그 아래로 몇몇의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명훈과 호준이었다.
골렘을 처리한 뒤 합류한 그들은 경인의 비전 탄막의 엄호 아래 빠르게 여왕의 뒤를 노렸다.
[크윽……!!]
여왕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혹한 속에서 생성된 골렘들이 두 사람을 막아서려는 순간 놈들의 발아래가 폭발하며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계속 달려.
▶ 칭호 : 마안 사냥꾼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 폭쇄탄(爆鎖彈)을 획득하였습니다.
펑―! 펑―!! 퍼펑――!!!
소환된 골렘들이 두 사람에게 닿기도 전에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명훈은 전방을 주시하며 머리 위로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보주가 보이는 쪽으로 이동한다. 경인아, 네가 계속해서 엄호 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여왕의 발치까지 도달한 둘은 거침없이 그녀를 공격했다.
“합류하겠습니다!!”
명훈이 검을 들어 여왕을 향해 있는 힘껏 그었다.
촤악―!!!
그녀의 옷깃이 잘려 나갔다.
[감히……!!!]
여왕은 그들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긴 저희가 맡겠습니다. 보주 쪽으로 이동하세요. 록산느 님께서 그곳으로 이동 중입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애초에 저희들이 미끼 역할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늦은 거죠.”
호준이 목에 걸고 있던 【샐러멘더의 꼬리】가 세공된 목걸이를 뜯어냈다.
▶ 샐러맨더의 꼬리가 불을 피웁니다.
머리 위로 작은 불꽃 마크가 일렁였다.
순식간에 혹한의 추위로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부탁합니다.”
박효주는 둘을 남긴 채 보주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두 명…….]
여왕은 마치 주문처럼 천칭을 체울 목숨의 수를 중얼거리며 명훈과 호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헉, 헉…….”
두 사람이 여왕을 막는 동안 박효주는 다시 한 번 여왕의 뒤에 있는 제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골렘은 모두 처리된 건가?’
처음과 달리 제단을 수호하고 있던 아이스 골렘들이 보이지 않았다.
“여왕의 마력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겠지. 덕분에 나도 이제 조금 숨을 쉬기 편해졌어.”
“록산느.”
제단에 도착한 박효주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말과 달리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일대를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여왕의 냉기를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터지기 일보 직전인 폭탄 같은 상태지만 말야. 여왕의 천칭이 모두 기울어지면 그때는 나도 막을 수 없을 거야.”
“그 전에 이걸 부수면 되겠죠.”
박효주는 보주의 앞에 섰다.
“응. 맞아. 하지만 문제는 이걸 정말로 부술 수 있을까 하는 거지.”
“클락의 화염은 통하지 않았지만 제 단검으로는 금이 났어요. 그건 단순히 속성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종류의 차이 때문이겠죠.”
그녀는 단검을 고쳐 잡았다.
휘이이익…….
단검의 날 주위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남궁 씨가 당신과 저를 이번 문의 주력으로 삼은 이유도 그런 것이겠죠. 보주는 정령력으로만 부술 수 있는 거니까요.”
“맞아. 드루이드의 눈물을 얻고 난 뒤에야 나도 알 수 있었지. 눈꽃의 여왕은 단순히 냉기의 힘을 쓰는 마물이 아니야. 그랬다면 보주 안에 이런 것이 있을 리 없지.”
“…….”
록산느의 말에 박효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신은 이걸 죽일 수 있어?”
보주 안에는 작은 아이가 잠들어있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남궁에게 들었다. 이 아이를 죽인 게 나라더군.”
“……네?”
“다음 문의 보스를 상대하기 위해 이 아이가 가진 힘이 필요하거든. 하지만 다음 문의 보스는 그가 처리할 거야. 그 말은 굳이 우리가 이 아이를 죽여서까지 여왕을 처리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글쎄요. 그녀가 과연 그 정도로 순순히 물러날까요? 그녀는 우레왕의 복수를 하려고 하는 걸 텐데.”
“내 생각은 달라.”
록산느는 보주를 어루만졌다.
마치 부화되기 직전의 알을 만지는 것처럼.
신기하게도 맹렬한 추위 속에서도 보주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당신도 이젠 알 거야. 보주는 분명 여왕의 약점일 수는 있지만 힘의 원천이 아니라는 걸. 보주를 부순다고 해서 그녀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그녀를 물리치는 데 이 아이를 이용할 수는 있겠죠. 잊지 마세요. 우레왕의 죽음 때문에 그녀가 우리를 공격한 것만은 아닙니다.”
박효주는 상공에 떠 있는 음침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어차피 문의 보스였습니다. 써펀트나 마왕과 다를 바 없이 인류를, 세상을 멸망케 하려는 괴물일 뿐이라고요.”
“그렇게 생각했겠지. 저 아이의 목숨을 거두었던 전생의 나도 말이야.”
“무슨 뜻이죠?”
“여왕의 힘은 강력하지만 그렇다고 공략이 완전히 불가능한 상대는 아냐. 제렌과 클락도 자신들의 공격이 실패한 이후 이젠 정령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 거야. 그리고 대리자 일족이 가진 물건들 중엔 정령력이 없더라도 정령력을 쓸 수 있게 해주는 도구도 있지.”
록산느는 뒤를 가리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저들이 다시 도전하지 않는 걸까. 남궁이 그들을 막고 있어서?”
“……?!”
남궁의 이름이 들리자 박효주는 황급히 뒤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리치는 눈보라에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순 없었다.
“남궁 씨가 여기에 왔나요?”
“응. 지금 그 둘과 함께 있어.”
“그렇군요.”
“너무 좋아하지 마. 지금까지 가만히 있는 걸 봐선 그는 이번 사냥에 합류하지 않은 모양이야.”
“그래도 다행이에요.”
남궁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박효주는 마음이 놓이는 듯 말했다.
“하여간 별나다니까. 저런 인간이 뭐가 좋다고.”
록산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박효주는 남궁이 있다는 말 한마디에 기운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당신 생각은? 남궁 저 고약한 인간은 이 잔혹한 결정을 우리보고 하라며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해.”
박효주는 금이 간 보주의 틈 안으로 보이는 작은 생명체를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록산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물어볼 생각입니다.”
“물어봐? 누구에게?”
“누구긴요. 당연히 여왕에게죠.”
까드드득……!!
박효주는 있는 힘껏 보주에 박아 넣은 단검을 비틀었다.
* * *
쾅― 쾅―!! 카가가강―――!!
“형님, 이거 안 되겠는데요? 도무지 부서질 기미가 안 보인다고요.”
“조금 더 힘내봐!!”
“그게 말은 쉽지만…… 우리 망한 것 같은데요? 크큭.”
“야,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냐.”
호기롭게 여왕의 앞을 가로막은 두 사람은 보기 좋게 얼음 감옥에 나란히 갇혀 있었다.
있는 힘껏 기둥들을 두들겨봤지만 흠집 하나 나지 않는 감옥을 보며 두 사람은 쓴웃음을 지었다.
“형님이 이걸 보면 난리 나겠군.”
“하하, 그래도 시간은 벌었잖습니까. 효주 씨가 보주를 부수면 끝나는 일이니까. 그래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다행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요즘 너무 믿고 맡겼지? 너희들은 이번 문이 닫히면 내가 직접 훈련시켜 줄 테니 기다려라.”
“……!!!”
“……!!!”
사각형으로 된 얼음 감옥 위에서 들리는 남궁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혀, 형님?”
명훈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하, 하하…… 기둥이 있어서 고마워해야 하나.”
서걱―
호준의 속삭임에 대답 대신 남궁의 검이 깔끔하게 얼음 감옥을 갈라 버렸다.
“…….”
부서진 기둥들을 바라보며 명훈과 호준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놈들은 내 먹잇감이다. 천칭을 완성시키고 남아 있는 버러지들은 쓸어버릴 제물 말이다.]
“그래? 천칭을 기울게 할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지 왜 감옥에 넣어두는 거지?”
“혀, 형님. 그건 좀…….”
남궁은 부서진 감옥에서 명훈의 뒷덜미를 잡아 여왕의 앞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이 녀석들의 목숨을 원한다는 거지? 해봐. 녀석들을 죽이고 어서 천칭을 움직여 봐.”
“혀, 형님!!!”
화들짝 놀라는 명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궁이 목을 꺾자, 그는 마치 인형처럼 맥없이 흔들렸다.
“너는 정말로 천칭을 움직이고 싶은가? 그래서 이곳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멸살하고자 하는 거냐.”
[…….]
“문의 보스로 선택받는 것은 강제적인 것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데 카니발의 참가자가 된 것처럼 말이야.”
남궁은 여왕을 바라봤다.
“내가 우레왕을 죽였다.”
[네놈이……!!]
여왕은 남궁을 노려보며 바득! 이를 갈았다.
“복수하고 싶은가? 글쎄, 내 생각에 너는 우레왕의 죽음을 복수하러 온 것도, 문의 보스로서 싸우고자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퉁―
그 순간, 그는 품 안에서 우레왕의 보주를 꺼내어 그녀의 앞에 던졌다.
“당신도 알 거야. 던전은 일정 수의 문이 열리고 난 뒤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공략을 하든 하지 않든 우레왕은 소멸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네가 그를 죽인 것이 잘한 짓이란 말이더냐.]
“아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좀 더 나은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남궁은 한 차례 호흡을 가지며 말을 이어갔다.
“우린 전생에 너를 죽이고 승리했었다. 하지만 그 승리는 썩 내키지 않은 일이었지. 생각보다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으니까.”
[흥, 인간의 목숨이 그리 아까운가?]
“인간의 목숨만큼 너희들의 목숨도 중요하니까.”
[……뭐?]
“그리고 지금, 나 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더 있는 모양이야.”
남궁은 다가오는 박효주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