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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화 (218/270)

218화

“남궁 씨!!!”

박효주가 그를 보자 반가운 듯 소리쳤다.

“아직 할 일이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마무리 짓고 난 뒤에 얘기 하도록 하지.”

“네?”

“잘해봐. 호준이 다음으로 기사에 나올 사람은 아마도 네가 될 테니까.”

“자, 잠시만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사라지는 남궁을 향해 박효주는 다급히 소리쳤다.

[어딜 가느냐……!!!]

그리고 그건 여왕도 마찬가지였다.

“보주는 이미 건네줬다. 어차피 우레왕이 살아 있었다면 가지고 올 수 없었던 보주야. 어쩌면 네게는 지금 상황이 더 나은 것일지도 모르지. 안 그래?”

[…….]

무슨 뜻인지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그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왕만은 그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내려놓아라.]

그녀의 말에 박효주는 품에 잠들어 있는 작은 소년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쩌적…… 쩌저적…….

바닥에서 사각형의 얼음이 솟아나더니 마치 침대처럼 잠들어 있는 아이를 천천히 떠받들었다.

[드루이드인가? 보주를 부술 수 있는 것을 보니 정령을 다룰 수 있나 보군. 아직 8번째 문밖에 되지 않을진대…… 인간이 상급 정령을 다룰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한 일이야.]

여왕은 박효주와 록산느에게 말했다.

“드루이드는 그녀입니다. 저는 그저 운이 좋아서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된 것뿐이죠. 그녀의 힘이 없었다면 이 정도의 정령을 다루는 것은 무립니다.”

[그래? 하지만 설령 도움을 받았다고 한들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웬만한 드루이드보다 뛰어나다 할 수 있지.]

박효주는 여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 상황이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유를 불문하고 그저 죽여야 할 목표에 불과했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마물이라고만 여겼던 여왕과 대화를 나누자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오히려 사람 같아.’

보주 안에서 꺼낸 여왕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무엇을 때문에 우리는 싸워야 하는 거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뒤로한 채 박효주는 여왕에게 말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당신은 8번째 문의 보스로서 우리를 죽여야 하는 겁니까.”

[그렇다. 머릿속에서 계속하여 인간을 죽이라는 명령이 들려온다. 아마도 위상들이 내게 걸어 놓은 주박이겠지. 하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다. 나는 우레왕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너희들을 섬멸할 것이다.]

“남궁 씨가 했던 말을 들었어요. 시간이 지나 문이 계속 열리면 문의 난이도에 비해 하위의 던전들은 소멸하게 된다고.”

[그래서?]

“그의 말대로라면 우레왕은 결국 죽게 되겠죠. 물론, 우리가 한 살해를 정당화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좀 더 나은 결과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더 나은 결과? 우습지도 않은 소리로군.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네놈들이 더 나은 결과를 내게 주겠다고?]

“모든 것을 빼앗은 건 아니죠. 저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남아 있으니까.”

박효주는 남궁이 남긴 우레왕의 보주를 집어 들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보주 안에 있던 아이는 죽어가고 있고 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 보주라는 것.”

“하지만 보주는 미완의 것이야. 다시 우레의 힘을 채워 넣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연력이 필요해.”

박효주에게서 건네받은 보주를 살피며 록산느가 말했다.

“가이나스.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유감이지만 그래도 당신은 아주 조금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어. 전생의 만남보다는 말이야.”

[전생? 너도 그 헛소리인가.]

“헛소리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 헛소리를 믿기로 했다.”

[어떤 얘기지?]

“내가 너의 아이를 죽였다고 하더군. 정령력만이 유일하게 우레왕과 눈꽃 여왕의 자식을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인 거지.”

솨아아아악―――

그 순간 여왕의 분노가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명훈과 호준은 당장에라도 얼어 붙을 것 같은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 말은 반대로 오직 정령력만이 너의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이기도 해. 운이 좋다는 건 그런 의미야. 여기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드루이드가 있거든.”

록산느가 들고 있던 보주에 힘을 주었다.

투드득…….

그러자 놀랍게도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꽃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퉁…… 퉁…… 퉁…….

여왕의 아이가 꽃잎의 온기를 머금자 멈춰 있던 숨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다. 고작 인간 드루이드가…….]

“고작 인간이 아냐. 종을 따지기 전에 이 힘은 평생을 드루이드의 길을 걸었던 자의 생명인 거니까.”

쿠후란이 남긴 【드루이드의 눈물】 속에 담긴 힘은 그 힘을 사용하는 록산느의 가슴도 울리게 만들었다.

‘이러면 되는 거죠? 당신의 생명을 가장 값지게 사용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의 힘을 가장 먼저 사용한 곳이 마물의 아이를 구하는 일이라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었지만, 록산느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진정한 드루이드의 길을 걷는 것임을 깨달았다.

“우레와 빙결. 대단한 힘이지만 아이에겐 오히려 독이지. 너무 위대한 부모를 둔 덕에 이 작은 몸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강한 힘이었어.”

록산느는 잠들어 있는 아이의 이마를 짚어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찌르는 우레와 얼리는 빙결. 그 어떤 힘도 아이의 숨결에 도움이 되지 않아. 정령술의 온기로 간신히 혈맥을 다시 이어놨지만 금방 다시 끊어지겠지.”

아이가 들어 있던 보주는 그를 봉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호흡기를 달아 놓은 것처럼 위태로운 호흡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아이를 살리 는데 가장 시급한 건 우레의 힘을 다루는 거야. 그리고 그건 이 우레왕의 구슬로 해결할 수 있어. 아마도 이건 왕의 심장과 같은 것이었겠지. 그의 죽음이 없다면 얻을 수 없는…….”

[그렇다고 해서 왕의 살해가 정당화될 순 없다.]

“물론이야. 남궁이 우레왕을 죽인 것이 잘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냐. 단지 태엽이 맞물린 것처럼,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지.”

우우우웅…….

그녀의 손에 들린 우레왕의 구슬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때? 인간과 협상을 해보는 것은.”

[나는 문의 보스다. 원하든 원치 않든 너희들과 싸워야 할 운명이야.]

“설령 그렇다 한들 그 싸움이 꼭 지금일 필요는 없잖아. 남궁에게 들었다. 문의 보스를 공략하지 못해도 시간이 흐르면 다음 문이 열린다고 말이야. 어차피 카니발은 계속해서 이어질 테니까.”

록산느는 여왕을 바라봤다.

“아이가 클 때까지의 시간은 충분할걸.”

[……왕의 구슬을 다룰 수 있는가.]

“아마도.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낸다. 그렇기 위한 희생을 안고 나도 이곳에 온 거니까.”

여왕은 그녀의 말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들고 있던 천칭이 사라지고 매섭게 몰아치던 눈보라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믿어보겠다. 인간을.]

록산느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마물.

카니발이 시작된 이래, 아니, 처음으로 두 종족간의 협정이 맺어 진 것이다.

그것은 전생을 통틀어서까지도 최초인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 * *

 8번째 문의 보스인 눈꽃 여왕, 가이나스는 현재 남극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녀가 소환한 골렘들이 주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협회는 이후 여왕의 침공이 없을 것이라 발표하였으나 각국의 시민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몇몇 국가들은 협회에 안전 대책을 요구한 상황입니다.

“당분간은 소란스럽겠습니다.”

“예상했던 일입니다. 당연한 결과죠.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니까요.”

“뉴스들 중 이번 8번째 문의 결과에 대해 우호적인 이야기는 없네요. 아, 아닌가? 한 곳 있긴 하네요. 국경일보였나?”

비서실장은 패드의 스크롤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희 기자군요. 그러고 보니 이분은 항상 남궁 님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만 쓰는 것 같습니다. 언제 한번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좋겠네요. 언론도 중요한 수단이니까요.”

“뭐, 그건 청와대에서 알아서 해주십시오.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문제없이 진행하도록 하죠.”

“그나저나 눈꽃 여왕의 일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 물어봐도 되겠나?”

“현재 협회에서 파견된 인원들이 남극에 기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록산느가 여왕의 한기를 최대한 억제 중이고요.”

서재욱 총리의 물음에 박효주가 기다렸다는 듯 남궁을 대신해 대답했다.

“여왕의 아이는 임시 기지 안 집중 치료실에서 보호 중입니다. 협회 소속의 정령술사들이 아이의 치료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아마 곧 깨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가 깨어난 뒤에는 어찌할 생각인가.”

“여왕이 바라는 건 아이의 안전일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죠. 이를 위해 그녀는 저희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남궁은 그의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눈꽃의 여왕은 그 자체가 뛰어난 정령이기도 하지만, 그와 별개로 대단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도움을 받는다면 앞으로 남은 문들을 막는 데 꽤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말은…… 마물과 함께 싸우겠다는 뜻인가?”

총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대답에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마물이 아니다.]

그때였다.

그들의 앞에 새하얀 눈꽃 하나가 피어오르더니 서서히 여왕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남극에서 봤을 때의 거대한 모습과 달리 인간의 크기와 비슷하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지는 위압감은 다르지 않았다.

[첫 번째 문의 보스인 고블린조차 성채를 지을 정도로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지언대, 어찌 나를 한낱 마물로 치부할 수 있는 거지?]

여왕은 총리를 바라봤다.

“크흠…… 무례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총리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등장에 무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우레왕의 죽음은 그렇다 쳐도 그대들이 아이를 보호해 주고 있음엔 감사한다. 아이의 치유가 끝날 때까지 문의 마물들을 막는 것을 나 역시 도울 것이다. 아마…… 다음 차례는 뱀의 화신이었을 텐데.]

여왕은 남궁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문의 순서가 바뀌게 될 테지.]

“맞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문의 순서가 바뀐다는 건 처음 정해졌던 카니발의 규율이 바뀐다는 뜻이니까.]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상들이 개입하게 된다는 뜻이다.]

퉁―

그때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효주가 여왕의 앞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이건…….]

그것을 본 순간 여왕의 눈빛이 가볍게 떨렸다.

“바라던 바야.”

만신전(萬神殿) 때 흩어졌던 위상의 성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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