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거다. 누구 때문에 문에서 소환되어야 할 마물들이 사라졌기 때문이지.]
그림자 회랑에 모인 위상들은 전과 달리 자신의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더 이상 모습을 감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당한 시험이었다. 위상이 내릴 혜택을 포기하고 시험을 치른 것이니까.]
[시험이 문제라 하는 게 아니야. 그 시험에 소환된 마물의 수가 문제지.]
[일곱 뱀의 화신들 중 남은 여섯을 모두 시험에 소환하다니. 제정신인가? 그건 7개의 문을 앞당기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요르는 빗발치는 불만에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규율을 위반한 것이 있는가? 내 계시자는 제대로 시험을 치렀고 시험에 통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뭐? 원한다면 너희들도 계시자들에게 시험을 치르라 하면 될 것 아니냐. 하긴, 살아 돌아올 자가 과연 몇이나 될지 모르겠군.]
[큭…….]
위상들은 그의 대답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무언가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내 계시자는 위험에 도전했고 살아 돌아 왔으니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너로 인해 축제는 엉망이 되었다. 시험을 통해 사라진 마물들을 제외하고 순서를 다시 짜게 되면 난이도가 너무 높아진다.]
[그래, 당장 다음 문의 보스는 흑룡이 되었다. 우로보로스를 사냥하고 얻을 수 있는 열다섯 자루의 독칼로만 죽일 수 있는 마물 말이다.]
[허나 시험으로 인해 우로보로스는 사라졌지만 독칼은 남아 있지 않아. 당장 다음 문을 어떻게 처리 할 거지?]
[너는 네 계시자의 편의를 위해 카니발에 참가자들을 모두 위험에 빠뜨린 것이라고!]
피식―
요르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위상들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뭐, 뭐가 웃기지?]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라. 문을 우리의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것이 아냐. 흑룡을 상대할 방법 없이 문이 열리게 되면 난리가 날 거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지 않나?]
[……뭐?]
[너희들 도대체 카니발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요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홀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자고로 축제란 말이지…….]
화르륵……!!!
그의 앞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끌벅적 난리를 피울수록 즐거운 법이란 말이다.]
위상들은 검은 연기와 함께 나타난 한 사람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렇게 생겼군. 얼굴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이지만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겠어. 새삼스럽게 인사를 할 필욘 없겠지?”
[네놈…….]
[그림자 회랑의 위상은 이제 개나 줘야겠군. 심심하면 인간이 찾아오다니 말이야.]
위상들은 손을 흔드는 남궁을 바라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무슨 일로 또 이곳에 온 거지?]
“도움을 주려고. 보아하니 나 때문에 골치 아파 하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위상이 인간에게 도움을 받는다? 가당치도 않는 소리를 하는군.]
“너희들은 카니발의 승자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카니발을 무사히 완수하는 것도 사명이잖아. 이대로 참가자들을 모두 죽일 셈인가?”
[이게 다 네놈이……!!]
[잠깐, 그의 이야기를 들어나 보죠. 솔직히 말해 우리들의 계시자 중 그와 척을 둘 사람은 더 이상 없으니까요. 굳이 싸움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면 함께 살길을 모색해야지요.]
남궁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두둔해 준 여인의 주위로 향긋한 풀내음이 가득했다.
“기회를 주어서 고맙군. 가시덩굴의 미망인이여.”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왕좌는 놓쳤지만 당신 덕분에 그녀가 섭리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까요.]
“그럼. 왕좌까지 욕심을 부린다면 그거야말로 자연의 섭리를 어기는 짓이지.]
미망인은 남궁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 계획은 뭐지?]
“나의 시험으로 인해 카니발의 순서가 바뀌었다. 그로 인해 소환 될 마물들도 강해졌지. 너희들의 말대로 지금 상황에서 문의 보스와 대적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자는 소수에 불과해.”
[눈꽃의 여왕을 포섭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힘은 강합니다. 적어도 두세 개의 문을 지나는 동안은 무리 없겠죠.]
“당신이 안갯속의 길잡이인가?”
[웨이나라고 부르십시오.]
[자, 잠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인간에게 진명을 얘기하다니!!]
[뭐 어떻습니까. 그는 단순한 위상의 계시자가 아닙니다. 카니발을 주도하는 등불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몇몇의 위상들이 탄식을 터뜨렸다.
[등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같잖은 인간에게 말도 안 되는 명예를 주는군…….]
미풍의 어머니는 여전히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지만 남궁과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나 들어보지.]
“별것 아니다. 무기가 없다면 무기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면 되는 것이니까.”
쿵―
남궁은 위상들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 성물을 내려놓았다.
“너희들의 힘을 좀 빌리마.”
[이 새끼…… 지금 우리를 이용해서 문의 보스를 사냥하겠다는 것이냐.]
“애초에 그러기 위한 만신전이 아니었던가? 카니발에 참가한 인간들을 도와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냐? 설마 강림해서 깽판이라도 놓고 싶어서 신전을 세우라고 한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그래야지. 나야 그렇다 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위상들인데. 나는 이제부터 신전을 세울 것이다. 위상의 힘이 강림하게 된다면 적어도 우로보로스의 독칼보다 낫겠지.”
[신전을…… 세운다고?]
[글쎄요. 만신전은 당신 때문에 엉망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규율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만신전의 우승자 이외에 다른 위상의 신전을 세우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아실 텐데요.]
남궁은 그들의 말에 피식 웃었다.
“김칫국 마시지 마. 신전을 세운다고 했지 너희들의 신전을 모두 세운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탑에 흩어진 유물들을 모두 모은 걸 보니 만신전의 우승자야 정해진 모양 같은데.]
“뭐, 마음만 먹으면 내가 신전을 소환할 수는 있는 게 사실이지.”
달그락―
남궁은 탁자에 놓여 있는 유물을 가볍게 두들겼다.
“하지만 일곱 뱀의 신전을 굳이 소환할 필요는 없지. 이미 나는 화신의 시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힘을 모두 얻었으니까.”
순간 위상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굳이 신전을 소환해서 얻을 수 있는 거라면 성도일 텐데…… 내 힘은 내가 가장 잘 다룬다. 어줍잖은 실력으로 일곱 뱀의 힘을 쓰는 건 오히려 독이지.”
[그럼?]
“아직 승자는 결정되지 않았다. 누구든 내가 모은 유물을 가져가기만 하면 그자가 승자가 되는 거니까.”
남궁은 흔들리는 그들의 눈빛을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신전을 소환할 위상을 일곱 뱀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명 중에서 고를 생각이다.”
[……!!]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보다 너희들이 잘 알겠지. 카니발의 우승자를 뽑지는 못해도, 무사히 카니발을 완수하면 다음 카니발에 혜택이 주어지니까. 기여도가 높은 위상일수록 다음을 노리기 유리하지.”
[요르. 쓸데없는 것까지 알려주었구나.]
[헛소리. 내가 알려준 게 아니다. 잊었나. 성물을 다 모았다는 건 녀석이 탑의 1층을 모두 돌아봤다는 뜻이라는 걸.]
“그의 말이 맞아. 카니발에 대한 건 라테아가 내게 알려줬다.”
[레오릭의 딸 말인가…….]
[고작 인간 따위가 별걸 다 알게 되었군. 귀찮은 일이야.]
위상들은 남궁의 말에 중얼거렸다.
[그래서? 너는 어떤 위상의 신전을 대륙에 세울 생각이지?]
“그걸 내게 물어보면 안 되지.”
[……뭐?]
“너희들이 내게 제시를 하는 거다. 다음 카니발의 승리를 위한 혜택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잖아? 이런 기회를 놓칠 생각이야?”
[풉―]
요르가 터뜨린 웃음에 위상들은 모두 그를 노려봤다.
“가시덩굴의 미망인과 일곱 뱀의 주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위상들은 아직 혜택을 시작하지 않았지. 문의 순서가 바뀐 마당에 굳이 너희들의 혜택도 순서대로 할 필욘 없잖아?”
남궁은 말했다.
“내 조건은 간단하다. 위상의 혜택을 다음 문이 열리기 전까지 모두 제공하는 것.”
[웃기지 마……!! 위상의 혜택을 동시에 열라고? 그거야말로 카니발을 엉망으로 만드는 짓이다!]
“너는…… 등 뒤에 불씨가 있는 걸 보니 아마 화롯불을 다루는 자인가 보지?”
[그, 그런데?]
“너는 하지 않아도 좋다. 다음 카니발의 우승을 노리는 것도 포기하는 게 좋겠지.”
[자, 잠깐……!!]
“다음. 또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얘기해라. 절대로 이건 강요가 아냐. 나는 원하는 자들에게만 기회를 제공할 생각이니까.”
[나는 하도록 하지.]
그때였다.
가장 먼저 손을 든 위상은 놀랍게도 해와 달의 관망자였다.
[낄낄, 그럴 줄 알았다니까.]
놀리는 요르를 무시하며 그는 남궁에게 말했다.
[나의 혜택인 ‘광명의 날’은 앞으로 열릴 3개의 문 동안 소환될 마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분명 너희들이 마물을 공략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
[뭘 선심 쓰듯 말하는 거야! 어차피 다음 혜택이 네 차례였잖아!]
[그래, 너야 아쉬울 것 없겠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반발에 남궁은 차갑게 웃었다. 아주 작은 손해라도 보지 않으려는 신들의 모습은 결코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이기기 위해서라면 멀쩡한 계시자도 바꾸려고 했던 위상다워.”
움찔―
남궁의 말에 그의 뺨이 씰룩였다.
“자, 해와 달의 관망자는 이 거래에 응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없다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만신전의 승리를 넘겨줄 수밖에.”
[자, 잠깐만……!]
[생각할 시간…… 아니, 나도 참가하겠다!!]
[나도!!]
위상들은 너도나도 손을 들며 남궁을 향해 소리쳤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인간에게 휘둘리고 있는 자신들이 얼마나 한심한지를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어차피 이번 카니발은 글렀어. 재수 없지만 놈의 말이 맞아.’
‘다음을 노리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공훈을 쌓는 게 중요해.’
‘어차피 차원은 많아. 이번 차원은 버리면 그만이니까. 언젠가 녀석에게 복수할 날은 분명 있다.’
위상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우리 위상들은…….]
짜증 나는 상황이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만신전에 참가하겠다.]
동시에 울리는 신의 목소리에 남궁은 썩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위상들이 혜택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만신전의 승자를 결정지을 거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위상의 혜택을 일괄적으로 시전하는 것은 만신전의 참가를 위한 기본 사항일 뿐이야.”
[……뭐?]
남궁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가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말해봐라. 가장 마음에 드는 자에게 신전의 기회를 줄 거다. 어차피 너희들도 이번 카니발은 버리는 패가 되었잖아?”
그가 검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흔들었다.
“그러니 아낌없이 쓰고 미련 없이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