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솔직히 놀랍군. 이런 바보 같은 경매가 통할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야.]
“바보 같다는 걸 알고 하는 거니까. 스스로 바보가 아니라고 위안하면서.”
남궁은 위상들이 꺼내 놓은 보구들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습지. 바보가 했든 바보가 아닌 자가 했든 결국은 행동은 바보 같은 짓인데 말이지.”
[그래서 누굴 뽑을 것이냐.]
요르는 남궁의 결정을 기대하는 듯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신전을 지을 위상은 사실 처음부터 결정해 뒀었어. 내 답은 이거야.”
남궁이 고른 유물을 보며 요르는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넌 이 녀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내가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카니발을 공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유용한 위상이 누군가 하는 것이니까.”
[흐음…….]
“그리고 다른 계시자들과 달리 녀석은 자신의 위상에게 당당히 발언할 자격이 있으니까.”
[그렇군.]
요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보고…… 만신전을 마무리하라고?”
“그래. 뭐, 마무리라고 해도 사실 만신전의 보상을 따로 얻을 순 없을 거다. 다만 ‘해와 달의 관망자’의 신전을 소환할 수는 있지. 네 힘이 더 강해질 거고 더 나아가서 너를 따르는 성도들도 모을 수 있다.”
해와 달이 조각되어 있는 완성 된 유물을 바라보며 알렉 트라만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네가 하는 건 어때? 솔직히 너야말로 만신전의 진짜 우승자잖아.”
“위상의 힘은 저마다 특색이 있다. 일곱 뱀의 힘은 강력하지만 많다고 해서 좋은 건 아냐. 하지만 네 힘은 다르지.”
남궁은 알렉을 바라봤다.
“위상이 네게 두 번째 혜택을 부여했을 거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네가 위상에게 부탁이라도 한 거냐.”
“부탁…… 은 아니지만 좋게 좋게 해결했지.”
“그렇게 말하니 더 무서운데.”
알렉은 그의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얻은 두 번째 능력, 광월(光月). 능력을 복사해서 일정 시간 동안 다수에게 부여할 수 있는 힘이지. 맞나?”
“잘 아는군.”
“신전을 세워서 성도를 모으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들도 너의 광월과 비슷한 힘을 쓸 수 있게 되겠지.”
“아마도 그렇겠지.”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광월은 일반인도 능력자로 만들어 준다. 지금 우리에겐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적어. 광월의 힘을 가진 너와 네 성도들로 일반인들도 전투원으로 만드는 거지.”
“너무 위험한 일 아닐까?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갑자기 전투라니.”
남궁은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전생엔 그랬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싸워야 할 만큼 끔찍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내가 말하는 일반인은 군인과 같이 훈련을 받은 자들 중 능력이 없는 자들을 말하는 거다.”
“으흠…….”
“박효주의 염동력이라든지 소민이의 마법과 같이 계시자 고유의 특성이 아닌 이상 광월을 통해 복사할 수 있을 거야.”
“일종의 능력자 부대를 만들자는 거군.”
“맞아. 가이나스를 공략할 때도 그렇지만 참악부대와 같이 고도의 훈련을 받은 병사들도 협회의 능력자들로 구성된 부대에 비하면 확실히 떨어져. 전투 경험이나 신체 능력은 그들이 월등히 나을 텐데도 말이지.”
“무슨 말인지 이제 이해가 가는 군. 좋아. 네 말대로 신전을 소환 하도록 하도록 하지.”
“인원을 모으는 건 네게 맡기겠어.”
태양목과 월안을 가진 알렉은 자신 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소민이랑 아직 얘기를 안 한다고? 아빠가 돼서 계속 피해서야 쓰겠나.”
“……딱히 피하는 건 아닌데. 할 일이 많아 어쩌다 보니 미뤄진 것뿐이야.”
“그게 피한 거지.”
남궁은 놀리는 알렉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 들어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어떻게 안 거야?”
“록산느에게 들었다. 가이나스전의 참전을 위해서 만났었는데 거절당했지.”
“아아…….”
“솔직히 사람들이 이번 눈꽃 여왕 섬멸전을 두고 말이 많아. 계시자들이 하나같이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말이야. 사실 네가 지시한 건데 말이지.”
“앞으로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질 거야. 계시자 없이 싸우게 될 일이 더 많아지겠지. 그를 위한 준비지만…… 일일이 설명을 할 순 없어.”
“맞아. 결국 결과로 보여주면 되는 일이니까.”
알렉은 성물을 품 안에 집어넣으며 일어섰다.
방을 나서려던 그가 뭔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돌려 남궁을 바라봤다.
“그런데 말이야. 에리카가 묘한 이야기를 하더군.”
“뭔데?”
“나뿐만 아니라 모든 계시자들이 다음에 얻어야 할 혜택들을 얻게 되었지. 새로운 힘을 얻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만큼 불안한 일이기도 해.”
“예지 능력을 쓸데없는 데 쓰는군.”
“아니. 이건 내 추측이야. 예지 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거니까.”
알렉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에리카가 뭐라고 하던?”
“앞으로 있을 카니발은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르게 펼쳐질 거라고 했다.”
“그래. 분명 그렇겠지.”
“그리고…….”
“빌어먹을 축제가 끝날 거다.”
“카니발이 막을 내릴 것이라고.”
동시에 같은 말을 하자 두 사람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정말이냐.”
“그래. 너무 오랫동안 놀았어. 이제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니까. 에리카의 예지도 쓸 만하군. 하지만 설레발치진 말라고 해.”
“명심하지.”
알렉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복도를 걸어갔다.
“어? 언제 오셨습니까. 제게 말씀이라도 주시지 그랬습니까.”
그리고 알렉은 복도 끝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명훈과 마주쳤다.
“그러는 넌?”
“조금 전에 눈꽃 여왕의 아이가 깨어났습니다. 그래서 보고드리려고요.”
“고생이 많군.”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원래대로 해. 어울리지 않게 무슨 존대냐.”
“명색이 협회 회장인데 이제 계시자에게 그럴 순 없죠. 게다가 제 검술 스승이지 않습니까.”
알렉은 명훈의 말에 피식 웃었다.
“스승은 무슨…… 그래, 검은 계속해서 갈고닦고 있는가? 보아하니 내 검을 해먹은 다음에 새로운 검을 얻었던데.”
“하하…… 덕분에 조금 나아졌습니다. 사냥엔 참가하고 있긴 하지만 눈꽃 여왕의 처우 때문에 일이 많아서 지금은 놓고 있습니다.”
“권력 욕심이 있어 정계라도 진출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훈련을 놓지 마라. 전사가 검을 들어야지. 펜을 잡는 순간 녹슨다.”
“명심하겠습니다.”
“넌 남궁이 가장 신뢰하는 동료 중 하나잖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네가 그의 옆을 지켜야 한다.”
“형님을 지켜요? 저 같은 건 형님께 오히려 방해만 될걸요.”
명훈은 그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여튼, 녀석의 옆에 항상 붙어 있어. 가족보다 더 자주 말이야. 딸에게 그 역할을 넘기지 말고.”
“가족보다 더요?”
명훈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알렉을 바라봤지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낮은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뭐지?”
평상시와 다른 그의 모습에 명훈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만약 고개를 돌린 알렉의 얼굴을 그가 보았다면, 그렇게 그를 그냥 놓아 주진 않았을 것이다.
“…….”
성채를 나온 알렉은 주위를 바라봤다.
탑과 연결되어 있는 이곳은 이제 하나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남궁, 에리카의 예언은 그저 축제가 곧 끝난다는 것이 아니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는 멈춰 섰던 걸음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네 목숨으로 카니발이 끝난다는 것이었지.’
계시자의 힘은 위대하지만 전능하지 않다.
그건 자신을 봐도 알 수 있었다.
‘부디 그녀의 예지가 틀리길.’
그렇기에 알렉은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다.
* * *
▶ 광명의 날이 시작됩니다.
▶ 앞으로 열릴 3개의 문에서 소환될 마물들의 힘이 약화됩니다.
▶ 해와 달의 관망자의 신전이 확인되었습니다.
▶ 광명의 날의 힘이 강력해집니다.
▶ 위상의 은총으로 인해 3개의 문이 열리는 동안 추가적인 혜택이 적용됩니다.
알렉 트라만이 런던에 신전을 세우자 새하얀 빛과 함께 전 세계인들에게 알림이 울렸다.
▶모든 던전에서 획득 가능한 재화의 양이 증가하며 획득 가능한 무구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 사냥한 마물에서 얻을 수 있는 헤드의 양이 증가합니다.
▶ 참가자 전원의 능력이 일부 상승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환호의 시대가 열립니다.
▶ 오후의 계절풍이 불어옵니다.
▶ 대장간의 열기가 피어오릅니다.
해와 달의 관망자를 시작으로 카니발을 주관하는 위상들의 혜택이 연이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 세계는 충만한 힘에 처음으로 축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환호를 터뜨렸다.
-알렉 트라만을 필두로 한 유니버스 클랜이 베를린에 생성된 던전 ‘거인의 발자국’에 도전한다고 알려졌습니다.
-3개의 문이 열리는 동안 전 세계의 90%에 달하는 던전이 모두 소멸될 것이라는 니나가와 에리카의 예지가 공표됨으로써, 시민들은 안도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정부는 위상의 혜택이 주어지는 동안 최대한 많은 헤드를 수집할 것이며 파괴된 도시의 복구를 약속했습니다.
-세계 연합 NSET의 재건팀이 각 도시마다 대피소를 건설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3개의 문이 끝난 이후 시작될 공습에 대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거인의 발자국이라…… 우리 때에도 있었던 던전인데 말이지. 꽤나 골치 아픈 던전을 맡았는걸.]
언론에서 보도되는 소식들을 듣던 라테아가 베를린 상공에서 찍힌 던전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름과 달리 던전 안에 소환되는 마물들은 노움 일족들이지. 너도 알 거야. 그 작은 괴물들 말이야. 개개인의 능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모이면 골치 아픈 족속들인 거.]
“뭐, 알렉이라면 별문제 없이 공략 할 수 있을 거야. 전생에도 성공했거든. 시기가 다르긴 하지만 신전의 혜택을 받고 있으니 부족한 부분은 채워지겠지.”
[공략을 했었다고? 그렇다면 거인의 발자국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뭔지도 알겠네?]
“당연하지.”
라테아는 남궁의 대답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걸 알면서 양보했다고? 정말 적을 알아서 키우는 스타일이라니까.]
“거인의 발자국에서 얻을 수 있는 노움의 세공 방패. 15번째 보스까지 그 방패를 뚫을 수 있는 마물은 없지.”
[그래. 던전에서 방어구가 나오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물건을 그렇게 쉽게 남에게 양보하다니.]
“그건 양보가 아냐. 축제의 마지막을 보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는 거지.”
[……자격?]
“카니발이잖아. 축제는 함께해야 즐거운 법인데 참가할 자격이 부족해서 함께할 수 없다면 아쉽지 않겠어?”
[그게 무슨 뜻이지?]
라테아는 남궁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든 위상의 혜택이 동시에 열린 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냐. 그건 단계별로 얻어야 할 위상의 혜택이 동시에 끝난다는 말과 같으니까.”
남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이야 강력할지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서 성장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사실 위상의 혜택은 늦게 받을수록 좋아. 문의 회차가 증가할수록 마물은 강해지니까.”
[그렇지. 10번째 문이 끝나면 마물의 기본 능력 자체가 월등하게 증강되니까. 하지만 그래서 혜택을 몰아 받아낸 거 아냐?]
라테아는 되물었다.
[후반에 혜택을 쓰는 게 좋다 해도 그건 살아남은 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남궁은 모니터를 끄며 말했다.
“개미에게 갑옷을 둘러준다고 코끼리를 이길 수 있을까? 난 일반인들을 강해지게 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냐.”
[그럼?]
툭―
그는 리모컨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강해지기 위해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