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크르르르…….]
위상의 혜택으로 들뜬 현실과 달리 비룡계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칸의 둘째 아들, 무란. 굳이 네가 뭘 해야 할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잘 알겠지.”
“정말로 엘더 드래곤을 길들였다니…….”
무란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엘더 드래곤을 바라보며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영혼샘에서 일어났던 전투에 대해선 잘 알 거다. 네 아버지인 무칸과 형인 무하드는 죽었다. 사실 수장이 죽은 상황의 대리자 일족은 팔각 전쟁에서 자동적으로 패배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남궁은 무란의 허리에 채워져 있는 비룡족의 보구를 바라봤다.
“보구를 남겨둔 것도 모자라 그것이 이곳에 남아 있는 두 마리의 엘더 드래곤들과 연결되어 있을 줄은 몰랐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비룡족의 수장이란 이름으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무란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딸의 또래로 보이는 아이에게 두려움을 느낄 리 없었으니까.
단지 그 소년의 뒤에 서 있는 2마리의 드래곤이 거슬릴 뿐이었다.
“보아하니 비룡계의 진짜 주인은 너희 둘인가 보군. 그래, 너희들 중 누굴 죽이면 비룡족의 패배가 확정되는 거지?”
[……건방진 놈.]
남궁의 말에 거대한 이빨을 드리우며 분노를 표출하는 드래곤의 비늘은 흰색이었다.
“화이트 드래곤 비겐, 그리고 수정 드래곤 레란. 너희들은 윌무스와 달리 이성을 잃지 않은 모양이로군. 듣기론 너희 모두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고 하던데…… 윌무스의 욕망이 너희보다 더 컸던 모양이지?”
[그걸 누구에게 들은 거지?]
“누구긴 누구야. 윌무스에게 직접 들었지.”
그의 대답에 레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남궁을 바라봤다.
[웃기지 마! 그는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네가 그와 대화를 나눴다고?]
“이상한 일이군. 그럼 너희는 이성을 잃고 노쇠한 드래곤을 비룡족이 각종 보구를 써서 사역하는 걸 그냥 둔 건가? 드래곤은 종족애도 없나?”
[닥쳐!!! 그는 어차피 이곳에 머문다 한들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였어. 그렇게라도 종족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령술에 길들여져 영혼 병사가 되었으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지. 도움이라곤 하나도 되지 않는 쓰레기 같은.]
[크르르르르…….]
남궁의 뒤에 서 있던 윌무스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엘더 드래곤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저것 봐라. 무란, 쓸데없는 욕망에 빠져 이성을 잃고 살던 괴물은 이제 육신마저 잃고 영혼까지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하나 우린 다르다. 팔각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룡족이 다른 일족에 비해 약하다 평가되었던 것은 우리가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풉.”
그 순간 남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우습지?]
“너희들의 말이 재밌잖아. 그 말은 내가 듣기엔, 결국 비룡족은 들러리고 비룡계의 주인이 너희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것 같은데.”
남궁은 무란을 바라봤다.
“이봐, 지금 네가 여기서 하는 게 뭐지?”
“……뭐?”
“내 눈엔 그저 용의 비호를 대가로 자신의 의지도 지키지 못한 채 끌려 다니고 있는 것뿐으로 보이는데. 너는 지금 네 의지로 이곳에 나온 게 맞긴 한가?”
[닥쳐라!!]
[헛소리를 하고 있구나! 감히 비룡족을 죽이러 온 주제에 누구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냐!!!]
두 마리의 용들은 당장에라도 남궁에게 달려들 듯 소리쳤다.
“말은 바로 하지? 나는 비룡족을 멸족시키러 온 게 아냐. 그저 패배 선언을 받으러 온 것뿐이다.”
콰앙―!!
그 순간 비겐이 눈짓을 주자 레란이 거대한 발로 남궁의 앞을 내리쳤다.
[그게 뭐가 다르다는 거지?]
“다르고말고. 너희야말로 지금 비룡족을 이 세상에서 없애려 하는 것이니까.”
[뭐?]
“비룡족의 수장인 무칸이 죽고 난 뒤에도 팔각 전쟁의 패배 선언이 인정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수장의 자리를 이을 후대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지.”
남궁은 무란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제 보니 무칸 자체가 비룡족의 수장이 아닌 모양이야. 그렇다면 무란, 널 죽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그는 무란의 뒤에 있는 두 마리의 드래곤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신 너희 둘을 죽이겠다. 그것이 비룡족의 패배를 진정으로 인정받는 방법일 테니까.”
[……놈!!!]
투둑―!! 투두두둑―!!!!
순간 내려찍은 레란의 발아래에서 자줏빛의 수정들이 솟아났다.
[죽여 버리겠…….]
퍼억―!!
하지만 그의 수정들이 남궁을 향해 날아가기도 전에 거대한 꼬리가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컥!!]
레란의 몸이 휘청거렸다.
[조심해!!!]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던 레란이 비겐의 외침에 고개를 들자, 순간 작살과 같은 꼬리의 가시가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안 돼!!!]
레란의 머리를 꿰뚫은 꼬리는 다름 아닌 윌무스의 것이었다.
[너희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
그때였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비겐은 윌무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역된 영혼이…… 말을 해?]
“어떻게 맺어졌느냐에 따라 다르지. 사역일지 계약일지 말이야.”
남궁의 대답에 비겐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윌무스…… 진정하시죠. 같은 드래곤으로서 나는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같은? 네놈들은 나를 비룡족에 팔아먹었잖느냐. 그런 주제에 같다는 말을 입에 담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더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생전에 당신은 이성을 잃은 괴물이 되었으니까요. 비룡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비룡계를 위해서라…… 그럼 너는 지금 비룡계를 위해서 나와 대적하려는 것인가?]
[우리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이번 팔각 전쟁이야말로 우리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기회였다는 걸 당신도 잘 알잖습니까.]
[왜? 어째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지?]
[……네?]
[내가 이성을 잃어 비룡족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겠지.]
퍼억―!!!
윌무스의 꼬리가 비겐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조금 전 레란과 달리 꼬리가 비겐을 꿰뚫기 바로 직전, 새하얀 막이 그를 가로막았다.
[나는 허약한 수정과는 다릅니다. 당신의 어둠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을 가진 드래곤이란 말입니다!]
[그럴 리가. 내 어둠에 반하여 태어난 드래곤은 네가 아니라 네 애비겠지. 이제 막 엘더 드래곤의 반열에 오른 네놈이 나를 상대한다고?]
[욕망에 찌들어서 이성조차 잃어버린 작자가……!!]
[그렇기에 엘더(Elader)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떤 드래곤보다 욕망에 이끌린 자들이니까. 너희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우리가? 우린 당신 같은 하찮은 욕망에 찌든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비룡계를 위해…….]
콰앙―!!!
그 순간 윌무스의 이빨이 비겐의 목을 물었다.
그를 보호하던 새하얀 방벽은 윌무스의 이빨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부서졌다.
[네 애비도 믿지 않을 소리를 하는구나! 네놈들이 비룡계를 위해 이 짓을 벌였다고?]
[크윽……!!!]
[크큭, 솔직히 말해라. 너희들이야말로 비룡계가 사라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더냐.]
[무, 무슨…….]
콰직―!!!
[크아아아악!!!]
비겐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윌무스의 두꺼운 이빨이 서서히 그의 비늘을 뚫고 살점 안으로 파고들었다.
[용의 환생.]
[…….]
[네놈들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비겐은 윌무스의 말을 부정했지만 떨리는 목소리 속에서 그의 당혹감을 감출 순 없었다.
[아마도 네 애비에게 들은 거겠지. 용의 환생은 비룡계에 오직 단 한 마리의 드래곤이 살아남았을 때 시전 할 수 있는 비원(悲願)이니까.]
윌무스는 말했다.
[진정으로 팔각 전쟁을 이길 생각이었느냐? 내 눈엔 너야말로 혼자서 미래로 도망칠 꿍꿍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억측이야! 당신이 사라져도 아직 2마리의 드래곤이 남아 있잖소!! 그리고 지금 비룡계를 지키기 위해 모였고!]
[글쎄? 그 수정 녀석은 아무것도 모를걸. 놈은 이제 막 엘더의 칭호를 받았으니까.]
비겐의 말에 윌무스는 코웃음을 쳤다.
[제대로 이용당한 것일 테지. 네 녀석이 레렌에게 눈짓을 주는 것을 봤다. 어째서 네가 직접 나서지 않고 놈을 시킨 거지?]
[크, 크윽…….]
우드득―.
윌무스의 이빨이 깊게 파고들수록 비겐은 고통에 발버둥조차 치지 못했다.
[이유야 하나뿐이지. 우리에게 죽임을 당하길 바랐던 거야. 오히려 우리가 찾 오길 너는 바랐겠지.]
[우, 웃기지 마……!!!]
콰아앙―――!!!
비겐이 몸을 틀며 윌무스의 공격을 뿌리쳤다.
[퉷―]
뜯겨져 나간 비겐의 살점들이 핏물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이봐, 거기 비룡족의 애송아. 잘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다. 정말 저 녀석을 믿어도 되는지 말이야.]
무란은 윌무스의 경고에 어찌할 바를 몰라 둘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이성을 잃은 것도 모자라 영혼 병사가 되어 영혼마저 사역된 자를 믿을 것 같으냐!]
[영혼 병사가 되었기에 잃었던 이성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때론 뭔가를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얻는 길일 때도 있다. 비록 육신을 잃었지만 대신 진실을 알게 되었거든.]
[…….]
무란은 그의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고민할 일까지는 아니다.”
그 순간 남궁이 그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는 팔각 전쟁을 마무리 지을 거다. 그러기 위해선 너희들의 패배가 필요하고. 그러니 나는 저 녀석을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일 거다.”
무란의 눈빛이 떨렸다.
“너는 저 녀석을 도와 나와 싸울지, 아니면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일지 결정하면 된다.”
“나, 나는…….”
“요정, 나가, 해인, 노움, 거인…… 많은 일족들처럼 후일을 도모할 것인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인지.”
[닥쳐……!!!]
그 순간, 비겐이 남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비겐의 이빨이 그에게 닿기 전에 그의 검이 먼저 비겐의 목을 베었다.
카강……! 카가가강…… ·!!!
검이 비늘에 튕길 때마다 날카로운 불꽃이 일었다.
[……!!!]
맹렬한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궁은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크클, 나의 용핵을 먹어치운 자다. 그런 공격에 쉽게 당할 리가 없지.]
윌무스는 당혹스러워하는 비겐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비겐.”
남궁은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너희들의 용핵도 받아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