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오셨습니까. 비룡계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이로써 모든 일족들이 마무리되었군요.]
“아직 끝난 건 아니야. 엘더 드래곤의 재료를 모두 받았을 때 비룡족의 패배 선언도 완료되는 거니까.”
[흐음…… 시간 벌기입니까?]
비룡계에서 돌아온 남궁이 온 곳은 다름 아닌 야차계였다.
차원문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건 규류가 아니라 현류였다.
“뭐, 너희도 결정할 시간이 필요 할 테니까.”
[역시…… 그렇습니까.]
현류는 남궁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가 문제겠군요. 악마족은 요정족의 빈자리를 얻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팔각 전쟁의 승리니까요.]
“그래. 그렇기 때문에 결정은 규류의 몫이겠지.”
[그를 불러 드릴까요?]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혼을 좀 내줄 일도 있고.”
[혼이요?]
“녀석에게 분명 비룡계에 가서 먼저 협의를 하도록 말하라고 했는데…… 나를 반기던 건 엘더 드래곤들이더군.”
우우웅…….
남궁의 손바닥에 영롱한 기운이 느껴졌다.
“덕분에 레란의 용핵을 먹긴 했지만…… 그들과 싸우게 되었다는 건 규류 녀석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말이겠지.”
[하하, 너무 혼내진 마십시오. 그럴 줄 알고 벌써부터 난리를 치고 있거든요.]
“……흠?”
* * *
[죄송합니다!!!]
홀 안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규류의 목소리.
남궁은 무릎을 꿇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하냐?”
[주어진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남궁 님께서 직접 움직이게 만들다니…… 무능력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콰앙―!!
이마를 바닥에 내려찍으며 절을 하는 그의 앞에는 단도가 놓여 있었다.
[그 죗값을 지금 치르겠…… 켁!!]
퍽!!!
남궁이 규류의 뒤통수를 밟았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그의 얼굴이 찌그러지며 괴상한 비명을 내뱉었다.
“드라마 찍냐? 요즘 한가하지?”
[하, 하하…… 죄송합니다.]
“시킨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시키지도 않은 짓 하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규류는 주르륵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아 내며 씨익 웃었다.
“무휘는?”
[안뜰에 계십니다.]
“따라와. 함께 그를 만나러 가자.”
[찾으러 올 필요 없네. 무슨 소란인가 했더니 규류, 네 녀석은 거인족의 수장 자리에 있으면서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구나.]
[하하, 아버님. 제가 철이 들면 야차계가 무슨 재미로 있겠습니까요.]
무휘의 등장에 규류는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좋아 보이는군.”
빈말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무휘는 원래도 대단한 체격이었지만 처음보다 몸집이 2배는 더 커진 것 같았다.
그야말로 거대한 산을 앞에 두고 있는 기분.
[모두 자네 덕분이지. 내가 느끼기에도 전성기 시절보다 더 높은 수준이라 생각되거든.]
“폐관 수련의 성과가 있었나 보지?”
[물론이지. 궁금하면 시험해 보는 것도 좋겠지. 내 역량을 받아낼 사람은 자네뿐이고 말이야.]
“난 축하를 하는 게 아닌데? 이왕이면 그 수련을 팔각 전쟁 시작 전에 끝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 부자가 쌍으로 도움이 안 되는군.”
남궁의 말에 무휘가 머쓱한 듯 웃었다.
[전쟁에 대한 건 알고 있었네. 수련 도중에 나올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그 전쟁은 자네의 것이잖나.]
“그럼?”
[더 큰 전쟁에 힘을 쓰기 위함이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네가 잘 알고 있을 테고.]
“대리자 일족으로서 할 말은 아니군.”
[하하, 시시한 얘기는 두고, 오랜만에 왔으니 회포나 푸는 게 어떤가.]
“술은 나중에. 이야기를 마친 뒤에 해도 충분해.”
남궁의 말에 무휘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피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잖아.”
[알다마다. 다만 고약한 일이라는 것도 알지. 그래서 자네와 술 한잔 기울이고 나서 하고 싶었을 뿐이지.]
“술을 마시는 건 일이 끝나고 난 뒤에도 충분해.”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이 모두 모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무휘의 말에 규류는 떨리는 눈빛으로 남궁을 바라봤다.
[걱정 마십시오. 저는 이미 마음을 먹었습니다. 절대로 남궁 님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제게 팔각 전쟁의 왕좌를 내어주십시오.]
익살스러웠던 조금 전의 모습과 달리, 규류는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그리하여 제 목숨을 바쳐서……!]
“누가 너보고 죽으래?
그 순간 남궁은 피식 웃었다.
[……네? 서, 설마? 카를로스? 그놈은 절대로 안 됩니다!! 놈이 위상의 힘을 얻게 되면 오히려 남궁 님을 죽이려 들 거라고요!!]
[걱정 마라. 그럴 일 없으니까.]
그때였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틈 속에서 나타난 카를로스의 모습에 무휘는 인상을 찡그렸다.
[감히 허락도 받지 않고 내 계(界)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건방진 녀석이로군.]
[너무 그렇게 고깝게 보진 마라. 나는 무량이 있던 시절부터 살았던 자니까. 대리자 일족으로선 너보다 훨씬 더 선배라고.]
[선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탑에 갇혀 제 몸 하나 간신히 빠져나온 주제에.]
규류의 말에 카를로스가 입술을 씰룩였다.
[그만해라.]
하지만 오히려 그를 막은 것은 무휘였다.
[아버님?]
[그리 오래된 대리자 일족이라 생각 못 했습니다. 후대의 무례를 용서하시죠.]
[새삼스럽게 또 예의를 차릴 필욘 없어. 자네 아들의 말처럼 나는 패배자에 불과하니까.]
카를로스는 무휘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뭐, 그래도 자네의 모자란 아들이 비룡계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서로 퉁 치자고. 덕분에 여태 성체에서 죽치고 기다렸거든.]
[아…….]
규류는 그제야 일전에 요정계에서 남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죄, 죄송합…….]
“규류. 비룡계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숨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되지만, 앞으로 일족을 이끄는 수장이 되려면 스쳐 지나간 약속이라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알겠습니다. 하,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지 않습니까. 남궁 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건데.]
“아니라는데 왜 자꾸 혼자서 죽겠다는 거야?”
[그럼 누가 팔각 전쟁의 왕좌를 가질 겁니까? 누군가 한 명은 그 자리에 올라 힘을 양도해야 할 텐데요!]
“대리자 일족을 새로 만든다.”
[……네?]
남궁의 대답에 규류는 멍한 표정을 지었고, 이미 알고 있는 듯 카를로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남궁 님께서 대리자 일족이라도 되겠다는 겁니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요!!]
[자네의 뜻은 이해되지만…… 카니발의 참가자가 대리자 일족의 자격을 얻는다는 건 무리가 있지 않을까. 계약자라면 몰라도 말이야.]
[맞습니다. 애초에 팔각 전쟁 자체가 대리자 일족들의 싸움인걸요.]
규류는 무휘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자네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을 사람은 아니니…… 생각해 둔 방법이 있는 건가.]
“우(无)를 만날 거다.”
[…….]
무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리자 일족은 우(无)에게서 태어났다는 얘기를 페어리 퀸에게 들었다. 물론 너희들도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우를 통해서 새로운 대리자 일족을 만들 거다.”
[새로운 대리자 일족이라…… 원칙상으로는 가능한 일이지. 네 말대로 대리자들은 우(无)에게서 태어났으니까.]
[하지만 우(无)를 찾는 건 불가능하잖습니까. 그는 란의 동굴에 봉인되어 있으니까요. 위상이 관여 하지 않는 이상 어려울 텐데요.]
확실히 규류의 말대로 란의 동굴에 남궁이 들어갔던 것은 위상들이 퀘스트를 비틀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냐. 하지만 위상을 찾는 데 위상보다 더 확실한 존재가 있지.”
[그게 누굽니까?]
“위상의 계시자.”
쿵―
남궁은 전대 안에서 히드라의 창을 꺼내 그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위상과 계시자는 실과 바늘 같은 존재지. 아무리 우(无)가 봉인 되어 있다 해도 계시자는 자신의 위상의 존재를 찾아낼 수 있다.
우우우웅…….
마치 그의 말에 대답하듯 창날이 떨렸다.
“군주 레오릭. 과거 카니발의 승리자이자 우(无)의 계시자다.”
[끄응…….]
카를로스는 히드라의 창을 본 순간 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런 방법을 생각하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왜? 과거의 동료를 만나고 좋잖아?”
[아시면서 농담은…… 뭐, 배신자의 입장에서 말해 뭐 하겠습니까. 썩 유쾌한 재회는 아니겠군요.]
레오릭과 우(无)의 반역에서 도망쳤던 카를로스는 다시 그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원하지 않으면 떠나도 좋다. 하지만 레오릭을 통해 우(无)를 만나야 네 일족이 있는 탑의 상층부를 열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해.”
[……쳇, 떠나긴 어딜 떠납니까. 여기까지 저를 부른 것도 쓸데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니십니까?]
카를로스의 말에 그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도 남궁을 바라봤다.
“과연 일족의 수장답게 눈치가 있군. 규류 너도 본받도록 해.”
[칭찬은 됐고 할 일이나 얘기해주십시오.]
“할 일은 간단해. 지금부터 레오릭의 소환 의식을 진행할 거다. 그를 위해서 필요한 건 두 가지. 하나는 이 무기를 해체할 수 있는 뛰어난 무기 제작자와 꺼낸 영혼에 육체를 형성시킬 수 있는 술법사.”
[악마술이 필요한 이유로군요. 이렇게 시키실 일이 있으면서 떠나라고 잘도 말하셨군요.]
남궁은 피식 웃었다.
[그럼 무기를 해체할 제작자는요? 평범한 무기가 아닙니다. 웬만한 자들은 감당 못 할 텐데요.]
“걱정 마. 그래서 여기에 온 거니까.”
[……?]
카를로스는 남궁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무휘와 규류는 단박에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럼 제가 가서 누님을…….]
[준비 끝났습니다.]
그때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규류가 황급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검묘로 모시지요.]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연화가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남궁을 향해 고개 숙였다.
“좋아.”
연화는 그에게서 창을 받아 들었다.
“라테아. 잘 보고 있어. 아버지와의 재회니까.]
[기쁜 일이지만…… 괜찮을까? 아직 아버지의 유물을 하나 찾지 못했잖아. 유물이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를 소환해도…….]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대감도 기대감이었지만 사실 그보다는 걱정이 더 큰 모양이었다.
“괜찮아. 의식이 끝나기 전에 마지막 유물을 가져올 사람이 있으니까. 우리는 온전한 레오릭을 만날 수 있을 거다.”
[……그, 그게 누구지?]
남궁은 반색하며 되묻는 그녀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