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가지 마라.]
남궁은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의 방이 아닌 낯선 공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낯설지 않은 공간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좀 자보려고 하는데 사람을 이런 식으로 깨우다니. 내가 얼마 만에 침대에 누워 보는 건지 너도 알 텐데.”
아무것도 없는 칠흑의 방에 자신을 초대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요르.”
[숙면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신체의 회복은 포션으로도 충분하다. 원한다면 최상급으로 하나 사 주마.]
“내가 필요한 건 육체의 회복이 아니라 정신의 회복이야. 세계 최강자의 회복은 인류의 존망과 직결 된 문제라고. 적어도 보상은 레전더리급은 돼야지.”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이제 좀 살 만한가 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그를 보며 남궁은 피식 웃었다.
“찾아온 이유가 뭐야?”
[방금 말했잖느냐. 가지 마라.]
“어디를?”
[어디긴 어디야. 우(无)의 요새를 말하는 거지.]
다 알면서 굳이 자신에게 다시 한 번 콕 집어서 말하게 시키는 남궁의 짓궂음에 요르는 혀를 쯧― 하고 차며 말했다.
[란(亂)을 만났지? 빌어먹을 위상놈…… 조용히 탑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쓸데없이 나서긴.]
“넌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놈이 마음만 먹으면 봉인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거.”
[뭐…… 그거야 위상이니까.]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규율이니까. 태초의 위상은 위험한 존재다. 우리들조차 쉽사리 조율할 수 없는 자들이야. 그들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좋아.]
“하지만 넌 카니발이 사라지길 바라잖아.”
[내가?]
요르는 남궁의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카니발은 거대한 역사다. 인간뿐만 아니라 수 없이 많은 차원의 생명들이 발전하고 진화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나는 카니발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나를 돕는 거지? 너도 알 텐데. 나는 너희 위상들에게 검을 겨누고자 하는 것을.”
[물론 잘 알지. 지금껏 네 녀석이 해온 것들을 보면 이제는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니까.]
요르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카니발은 최악의 침공일 뿐이지만, 차원의 개념에서 본다면 카니발은 하나의 흐름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나를 돕지?”
[내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은 카니발이 아닌 우리 위상들이니까. 또한 네가 검을 겨누는 것도 카니발 자체가 아닌 위상이고.]
“내가 너희들을 없앤다 한들 카니발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로군.”
[맞아. 일전에 말했듯이 인간의 역사에 전해지는 신들 역시 과거의 위상들이니까. 그들이 남아 있다는 건 카니발은 계속해서 반복되어 왔다는 증거이자 그로 인해 너희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카니발로 인해 인류가 발전해? 웃기지 말라 그래.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서로의 생각의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나의 입장을 얘기했을 뿐이지.]
“뭐…… 그래. 위상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만큼은 공통된 생각이니까. 물론 그 명단에 너도 들어가 있다는 것을 잊진 않았겠지?”
[당연하지. 하고 싶은 짓은 원 없이 해보거라. 하지만 나는 쉽게 죽어주지 않을 거다. 어쩌면 내가 건방진 널 죽일 수도 있겠지.]
“그것도 재밌겠군. 일곱 뱀의 주인의 힘이 얼마나 강할지 항상 궁금했거든.”
[미친놈.]
요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쩐지 기분 좋은 듯 웃어 넘겼다.
[너랑 붙을 생각에 즐거워서 말이 다른 곳으로 샜군. 정작 해야 할 말은 따로 있는데 말이야.]
“우(无)의 요새에 가지 말라는 말? 그건 지금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야.”
[너는 란(亂)에게 놈의 요새에 무엇이 있는지 들었느냐.]
“위상을 강신시킬 수 있는 도구가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천외(天外)의 망토를 말하는 것일 테지. 란과 우가 태어나며 만들어진 2개의 무구.]
“잘 아는군.”
[한데 녀석이 그런 얘기는 하지 않더냐? 그 망토를 두르게 되면 다시는 벗을 수 없게 된다고 말야.]
“다시 벗을 수 없다는 뜻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다. 천외의 망토를 두르게 되면 위상의 힘을 몸 안에 담을 수 있지. 그 상태에서 망토를 계속 두르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몸 안에 계속해서 신력을 담아 둬야겠지.”
[무구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낡게 된다. 태초의 유물이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지. 아니, 오히려 그토록 오래된 망토는 한순간에 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아.]
요르는 남궁을 가리켰다.
[몸 안의 신력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만약 네 몸을 보호해 주던 망토가 사라진다면?]
“…….”
[표정을 보아하니 충분히 이해를 한 모양이로군. 그래, 망토는 그야말로 서서히 심지가 타들어가는 시한 폭탄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네게 내가 힘을 빌려 주겠냔 말이다.]
“상관없어. 요새의 문을 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면 해야지.”
[멍청한…… 네가 아무리 내 계시자라 하더라도 일곱 뱀의 힘을 빌리게 되면 그 힘은 결국 네 목숨을 노릴 것이다.]
“그 전에 팔각 전쟁의 보상을 얻으면 된다. 위상의 힘을 얻게 되면 위상의 힘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
[도박을 하려는 것이로군.]
남궁은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모든 게 내게는 도박이었어.”
[그럼 그것도 알겠네. 너는 우(无)의 요새의 문을 열 수 있을지 몰라도 그의 힘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야.]
“…….”
[결국 네 딸이 우(无)의 힘을 이어 받아야 할 것이다. 너는 그토록 살리고자 했던 딸의 목숨을 가지고도 도박을 할 생각이냐.]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냐.”
[정신 차려!!]
콰아아아앙―――!!!
그 순간 요르가 거칠게 남궁의 뺨을 때렸다.
고작 뺨을 후려치는 것뿐이었지만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폭음이 울렸다.
[뭐가 상관을 하지 말라는 말이냐! 위상의 힘도 감당하기 어려운 인간이 태초의 위상을 상대하겠다고? 아무리 그녀가 영혼의 힘을 가진 사상마력을 가졌다 해도 감당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다.]
“너는 내가 내 딸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할 인간이라 생각하는가?”
[……뭐?]
남궁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无)를 찾기 위해 소민이의 힘이 필요해. 그래서 소민이와 함께 요새를 가려고 하지만 거기까지다. 나머지는 내가 할 거다.”
[그건 그것대로 미친 소리군. 도대체 네 생각이 뭔지 알 수가 없어.]
“적어도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지는 죽지 않을 테니 걱정 마.”
[쯧쯧…….]
요르는 그를 향해 혀를 찼다.
“날 찾아온 건 가지 말라고 말리려고 그런 게 아니라 힘을 빌려주기 위해서 온 거지?”
[흥, 고얀 것.]
요르는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는 남궁에 입술을 삐쭉거리며 목에 걸고 있던 작은 펜던트를 뜯어 그에게 건넸다.
[망토를 얻게 되면 그 안에 들어있는 액체를 먹도록 해라. 그렇게 되면 일곱 뱀의 힘을 쓸 수 있게 될 거다.]
“고맙군.”
[고마워할 필요 없어. 싸우는 것보다 더 곤욕스러운 일을 해야 할 네게 주는 선물인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잘 해낼 거다.”
[누가 그걸 걱정한데? 요새에 가는 것부터가 네게는 끔찍한 일이 될 거라서 그렇지.]
“……?”
[우(无)의 요새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블랙 루트를 열어야 가능하다. 그 방법은 네 아비가 알고 있겠지.]
그 순간 요르의 말처럼 남궁의 표정이 굳어졌다.
“……젠장.”
그는 펜던트를 주머니 안에 쑤셔 넣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남기철이라고 하네. 나를 들어 본 사람도 있을 것 같긴 한데…… 711부대를 창설한 게 나일세.”
협회에 마련되어 있는 홀 안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쇠를 긁는 듯한 거친 남기철의 목소리가 들리자 명훈은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쳤다.
“전설적인 인물을 이렇게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부족하지만 협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최명훈이라고 합니다.”
“박효주입니다.”
“강호준입니다.”
“김창환입니다.”
명훈이 인사를 하자 그의 뒤에 있던 세 사람이 나란히 인사를 했다.
“너희 둘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온 거야?”
“방금 협회장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전설적인 인물이라고요. 711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어찌 안올 수가 있겠습니까.”
“이하 동문.”
“주사인은 그럼 711이 아니냐. 걔는 알아서 자기 일 하고 있잖아. 어서 돌아가.”
남궁은 호준과 창환의 뒤통수를 한 대씩 후려치며 둘을 밀어냈다.
“시끄러운 녀석들…….”
두 사람을 쫓아내고 난 뒤 남궁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본 사람도 있을 테고 저 녀석들처럼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소개한 것처럼 과거 711을 이끌었던 남기철 소령님이시다. 이번 원정에 함께할 테니 다들 인사를 나누도록.”
남궁은 남기철의 옆에 서서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아마 이 넷은 잘 알 겁니다. 왼쪽부터 알렉 트라만, 록산느, 미카엘, 제렌. 모두 위상의 계시자들입니다.”
“반갑네.”
“잘 부탁드립니다.”
알렉이 그들을 대표해 남기철과 악수를 하며 웃었다.
‘흐음.’
남기철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흥미로운 듯 바라봤다. 확실히 해와 달의 관망자의 신전이 세워진 이후 알렉 트라만의 힘은 다른 계시자들보다 월등히 상승된 듯 보였다.
“배우이기 전에 저 역시 부대에 몸을 담았었습니다. 711의 대단함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과찬이로군. 그래 봐야 몸뚱이 하나 제대로 굴리기 어려운 늙은이에 불과하네.”
“남궁이 초빙을 했다면 그저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는 늙은이는 아니겠지요. 기대하겠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와 표정.
그리고 추켜세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종의 경고와 같은 속내에 남기철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보기 좋군.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아주 훌륭해 보이는구먼. 마치 패기 넘치는 신병 같은걸.”
“……네?”
“신병은 좀 굴려야 제맛인데 말이지.”
알렉 트라만은 남기철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궁을 바라봤다.
“조금 성취가 있었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뜻이다. 알렉, 너는 이번 원정 동안 남 소령님과 파트너를 해라.”
“……에엑?”
알렉은 괜히 남궁이 자신에게 심술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배울 게 분명 있을 거다.”
하지만 남기철의 능력을 알고 있는 남궁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처사였다.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사실 남기철이 가장 강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남궁은 아래를 내려다 봤다.
잠시 머뭇거리며 마른침을 삼킨 그는 남기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소민. 제 딸입니다.”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