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여기가…… 태초의 위상이 봉인 되어 있는 곳인가.”
알렉은 신기한 듯 동굴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놀랄 필욘 없어. 고블린 성채 아래에도 위상이 갇혀 있는데.”
“……뭐?”
“그건 그렇고 지금부턴 무슨 일이 있어도 일곱 뱀의 영역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마라. 우(无)의 요새와는 비교도 안 되는 영력의 독기가 가득하니까.”
어리둥절하는 알렉을 뒤로한 채 남궁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계시자들은 각자의 힘을 최대한 끌어 올려 갈무리해라. 위상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을 거니까.”
요새 때와는 달리 계시자들의 힘까지 요구하는 남궁의 말에, 사람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전에 왔을 때 마물은 없었다. 위상들이 따로 손을 쓴 게 아니라면 가는 동안 다른 위험은 없을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인원을 모은 거지?”
“문제는 우(无) 그 자체니까. 가장 큰 문제가 있는데 자잘한 것까지 신경 쓸 필욘 없지.”
“흐음…… 솔직히 당신이 고전할 정도의 상대라면 우리가 과연 도움이 될지 의문인걸.”
록산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연계 능력자인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동굴 속의 위압감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위상을 상대한다는 것은 힘으로 찍어 누른다는 게 아냐. 신을 상대로 싸워서 이긴다? 그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지.”
“하지만 당신은 그걸 하려는 거잖아.”
“승자는 다윗이었으니까.”
남궁은 그녀를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은총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때였다.
동굴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각자의 무기를 꺼내며 사방을 주시했다.
[겁먹을 필요 없다. 레오릭, 오랜만에 만나는군.]
[반가운 얼굴은 또 있지. 보이는가? 그가 파라곤을 길들였다.]
[과연…… 내 사슬을 가질 만한 자로군.]
화아아악―――!!
그 순간, 어둠이 걷히고 미라처럼 붕대를 감은 우(无)의 모습이 나타났다.
“놈의 눈을 보지 마. 현혹된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마치 도려낸 것처럼 아무것도 없었고 칠흑 같은 구멍은 당장에라도 빨려 들어 갈 것같이 보였다.
[걱정 마라. 나는 내가 흥미를 보인 자에게만 관심을 주니까. 어린아이도 재밌는 장난감을 좋아하지 재미없는 장난감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재미없는 장난감? 그냥 넘겨듣기엔 거슬리는 소린데.”
[그래?]
그때였다.
미카엘의 머리가 사라졌다.
“……!!!”
머리가 잘린 몸뚱이는 버둥거리며 양팔로 잘린 목을 더듬었다. 표정은 볼 수 없지만, 허둥대는 그의 몸에서 그의 당혹감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시끄러운 녀석이로군. 죽이진 않았으니 조용히 하고 있거라.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다시 붙여주지 않을 테니.]
우(无)의 말에 미카엘의 몸이 구석에 주저앉았다.
“봉인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데 힘을 쓸 수 있는 건가?”
[이런 걸 가지고 힘이라고 말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 기껏해야 유치한 장난에 불과한걸.]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들떠 보였다.
[내 정신 보게. 너무 오랜만에 손님들이 찾아와서 대접을 소홀히 했군.]
탁―
그가 낡은 붕대로 칭칭 감은 손가락을 튕기자 그들의 앞에 작은 찻잔이 나타났다.
[위용수(偉容水)라고 한다. 마시면 위상들이 내린 힘을 강화시켜 줄 거다. 계시자가 아닌 자들은 가지고 있는 재능들을 상승시켜 줄 것이고.]
일행은 앞에 놓인 낡은 찻잔을 바라보다 난감한 표정으로 남궁에게 고개를 돌렸다.
“예전하고는 많이 달라졌군. 손님 대접도 할 줄 아는 걸 보니 말이야.”
걱정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남궁은 그가 건넨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몸 안에서 은은하게 풍겨져 나오는 기운에서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마셔도 된다. 태초의 위상이 고작 이런 사소한 걸로 우리의 목숨을 빼앗진 않을 테니까.”
그의 말에 사람들은 저마다 찻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아 참, 말하는 걸 깜빡했군. 그 안에 들어 있는 힘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하게 만들려면 지금부터 기운을 다스려야 할 거다.]
남궁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결국 자신과 대화를 나눌 시간을 만들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었으니까.
“모두 가부좌를 틀고 힘을 갈무리하도록 해.”
“하지만…….”
“걱정되면 빨리 끝내라.”
알렉은 우(无)를 슬쩍 보고는 벽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머리가 없는 미카엘의 몸만이 덩그러니 남은 상태에서, 남궁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 않으십니까?”
“마시지 않았으니까.”
“우(无)의 힘은 변곡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블랙 루트로 인해 침식된 독들을 몸 안에서 빼낼 수 있을 텐데요.”
“걱정 말게. 충분히 살 만큼 살았으니까. 나는 앞으로 살 미래보다 지금이 더 중요하거든. 나는 위상을 믿지 않아.”
치익―
남기철은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태워 입에 물면서 말했다.
“그런데 가장 오래 된 위상? 구렁이도 그런 구렁이가 없을 텐데. 어찌 맘 편히 내 실속을 챙기나.”
[클클…… 블랙 루트의 주인다운 태도로군. 뭐, 마음대로 해라. 다른 녀석들과 달리 카니발의 내면을 알고 있는 자이니 그냥 있어도 무관하겠지.]
“왜 이렇게 너그러워진 거지? 처음 나를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날 이용하려고 안달이었는데.”
[너는 충분히 잘 해주었으니까. 내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카니발을 엉망으로 만들어줬거든.]
“그게 끝은 아닌 것 같은데.”
우(无)는 얼굴을 가린 붕대를 걷었다.
[그리고 다시 날 찾아왔으니까.]
“…….”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널 풀어주는 건 안 된다.”
[그렇다면 너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겠군.]
우(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지만, 대가를 치른다는 건 그만한 뭔가를 얻은 뒤라는 뜻이겠지.”
[클클…… 내가 먼저 성의를 보이라는 말이로군.]
“잘 알면서.”
[대리자 일족을 새로이 새우는 것은 사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너를 대리자 일족의 수장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어째서지?”
[너는 내 힘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너는 대리자 일족이 어찌 탄생되었는지 아느냐.]
남궁은 그를 바라봤다.
[무언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 죽음 속에서 변화를 일으킨다. 그렇기에 시초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설마……?”
남기철이 그의 뜻을 알아차린 듯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리자 일족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 일족들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뜻인가.”
[맞다. 수장과 수장이 선택한 정해진 인원만이 오직 방주 안에서 소멸을 피할 수 있지.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대리자 일족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류 멸망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그건 카니발을 실패하는 것과 다를 바 없잖아!”
[멸망과 생존은 명백히 다르다. 방주에 탄 자들은 인류를 이어갈 것이고, 뿐만 아니라 카니발로 인해 죽임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팔각 전쟁이란 것을 만들어서 대리자 일족들끼리 또 싸우게 만들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괴롭힐 생각뿐이군.”
[기회를 주는 것일 뿐이다. 과거의 위상들이 현실에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너희 인류는 그 전에도 카니발에 참가했었고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그로 인해 끝없는 발전을 이루었지.]
우(无)는 앉아 있는 일행 중에서 소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알 거다. 내 힘을 받아낼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꽈악―
남궁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인류를 희생시키지 않고 대리자 일족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게 뭐지?”
[저 아이가 내 계시자가 되는 것이다. 대리자 일족은 계시자와 필연적인 존재. 새로운 계시자가 탄생한다면 대리자 일족 역시 추가되어야 하겠지.]
그는 다시 남궁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카니발의 규율에 의한 것이니 다른 희생 없이도 가능하다.]
“헛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군. 희생이 없어? 지금 누굴 네놈의 계시자로 만들겠다고 하면서 희생이 없다는 소리를 하느냐!!”
남기철은 우(无)를 향해 일갈을 내질렀다.
[블랙 루트의 힘을 가진 자여. 너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역정을 내는 것도 이해는 가나, 넘어가 주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이다.]
우득―
순간 남기철의 팔목이 그대로 꺾였다.
빠드득…….
질 수 없다는 듯 그는 비명을 지르는 것 대신 이를 꽉 깨물었다.
[놀라는 척할 필요 없다. 네 딸이 이번 일의 열쇠가 된다는 건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잖느냐. 그리고 대략 눈치챘을 것이다. 내 요새라고 찾아간 곳에 왜 오리진의 무구가 없었는지.]
남궁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보였다.
“요새 자체가 거짓이었군.”
[맞아. 나 역시 네가 봉인을 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것을 네가 가져오게 만들었지.]
우는 자신의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봉인의 해제가 아닌 그 반지를 내게 돌려주는 것뿐이다. 그럼 나는 네 딸을 내 계시자로 받아들여 새로운 대리자 일족을 만들겠다.]
“……저 미친 소리를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겠지? 지금 소민이를 계시자로 만들려는 게냐?”
[왜 나를 의심하지? 너와 함께하고 있는 레오릭과 파라곤 역시 나의 계시자였다. 그들은 나와 함께 카니발을 파괴하려 했고 위상을 몰아내려 싸웠다. 위상들 중에서 꼽자면 나만큼 인간의 편에 선 자도 없을 터인데.]
생각에 잠겼던 남궁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뿐만 아니라 저 아이가 나의 계시자가 된다면 진짜 요새를 열 수 있게 된다. 그곳엔 오리진의 무구뿐만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값진 보구들이 있다.]
“나 참, 웃기네? 정작 나를 놔두고 왜 두 사람이 하냐 마냐 결정하는 거예요?”
그때였다.
가부좌를 틀고 있던 사람들 중 가장 먼저 소민이가 일어나며 남궁을 향해 걸어왔다.
“남 소령님의 말씀처럼 쓸데없는 소리였다.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알아. 할아버지가 다 나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
“……뭐?”
“내 안에 누가 있는지 잊었어? 엄마가 얘기해 줬어. 조금 놀라긴 했지만 난 좋은데?”
“크, 크흠…….”
남기철은 소민의 말에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차는 잘 마셨어요. 맛은 없네요.”
그녀는 우(无)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당돌한 꼬마로군. 마음에 들어. 그래, 네 말이 맞구나. 당사자를 두고 제3자들끼리 왈가왈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우(无)는 소민을 향해 말했다.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나의 계시자가 될 생각이 있느냐.]
순간 소민은 팔짱을 끼며 그를 바라봤다.
“그건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죠.”
[……뭐?]
“대리자 일족을 새로 만드는 건 아빠가 원하는 거지 내가 바라는 게 아니거든요.”
[크, 크하하하!]
그녀의 대답에 우(无)는 크게 웃었다.
[볼수록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자, 잠깐! 소민아. 너 지금 허락도 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허락 맡았어.”
남궁은 예상치 못한 딸의 대답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누구에게?”
“엄마한테.”
소민은 싱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아빠, 엄마가 무서워? 신이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