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내 계시자가 되겠느냐.]
“조건이 있어요.”
소민은 우(无)를 바라봤다.
놀랍게도, 그의 눈동자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영혼의 보호뿐만 아니라 세계수의 비호와 페어리 퀸의 은총까지…… 이거 볼수록 놀라운걸. 회귀를 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라니. 따지고 보면 너보다 더 대단한 아이 아니더냐.]
“당연하지. 내 딸인데.”
[이런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온실 속 화초처럼 키우는군. 아무리 대단한 맹수라도 목줄을 차고 있으면 싸우는 법을 잊고 만다.]
스으으윽…….
우(无)는 소민에게 다가갔다.
[걱정 마라. 나의 계시자가 된다면 내가 너에게 싸우는 법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마.]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쓸며 말했다.
[어줍잖은 위상들 따위는 넘보지도 못할 강함을 네게 주마.]
“봉인된 주제에 별로 믿음이 가진 않네요.”
[……조건이 무엇이냐.]
“제가 계시자가 되면 위상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위상의 혜택? 계시자의 혜택이 아니고?]
“무곡(武曲)의 밤.”
순간 우(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아…… 그렇군. 네가 아니라 네 어미가 알려준 것이로군?]
‘수아가?’
남궁은 그의 말에 딸을 바라봤다.
[기이한 일이로군. 사상 마법이 완성되면 대부분 흡수된 영혼은 사라지게 마련인데…… 아하, 네가 가진 세계수의 은총은 단순한 게 아니었어. 세계수의 여왕과 네 어미가 합쳐진 것이로군.]
우(无)는 마치 즐거운 장난감을 살피는 것처럼 소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클클…… 꼬마야. 조금 전에 네가 네 아비에게 했던 질문이 이제 이해가 가는구나. 이 모든 게 네 어미가 시킨 일이지?]
“궁금하면 계약을 맺으면 되죠. 제 안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요.”
[그것도 네 어미가 한 말이더냐?]
어린아이답지 않은 당당함이었지만 소민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는 못했다.
[정녕 그것을 원하느냐. 무곡의 밤을 일으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양날의 검이니라. 위상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너희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렇지 않게 되도록 당신이 우리를 지켜야죠.”
[뭐? 내가?]
“그럼 하나뿐인 자신의 계시자를 죽도록 그냥 둘 거예요? 저기 보세요. 당신의 계시자들이 지금 어떤 꼴인지. 수많은 카니발이 지났지만 계시자가 영혼 병사가 되어 떠도는 위상은 당신뿐일걸요.”
소민은 말했다.
“영혼 병사를 또 하나 추가하는 건 평생 놀림거리가 될 일이겠죠.”
[클클…… 낚을 생각 하지 마라. 그 정도 도발에 내가 움직일 듯싶으냐.]
“당신이 직접 하라는 게 아니에요. 제가 할 거예요. 당신은 저를 강하게 만들어 주기만 하면 돼요.”
[얼마나 강해지길 원하느냐.]
소민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물음에 답했다.
“란(亂)을 이길 수 있을 만큼.”
* * *
“신과 한판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한 것과 너무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요.”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생각대로 흘러가서 문제인 거지.]
대답을 하지 않는 남궁을 대신해서 레오릭이 명훈의 말에 대답했다.
[란의 보고와 달리 요새 안에 태초급의 무구가 없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모든 게 그의 계획 아래 있었다는 것을 말이야.]
레오릭은 남궁을 바라봤다.
[너무 심려하지 마라. 그가 카니발을 종결시키고자 하는 생각은 진실이니까. 자네 딸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을 거야.]
“놈은 왜 이 반지를 원하는 걸까.”
생각에 잠겨 있던 남궁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바라봤다.
“가짜 요새라도 놈의 힘이 남아 있었고, 파라곤까지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쉽게 이 반지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기도 해.”
▶ 반경 500m 안 모든 존재들의 속성을 반전시킨다.
그는 반지의 설명을 읽었다.
‘속성을 반전시킨다는 것이 무엇일까.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어.’
툭―
순간 남궁이 알렉과 명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반지를 발동하는 순간, 두 사람은 마치 시야가 역전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 무슨……?!”
알렉은 몸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남궁을 바라봤다.
“요새에서 얻은 반지를 사용했다. 어떻게 되는지 빠짐없이 내게 말해봐.”
“제길…… 그런 건 말이라도 하고 시작하라고.”
남궁의 말에 알렉은 인상을 찡그렸다.
“……힘이 사라졌습니다.”
“무슨 뜻이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게 반대가 되었습니다. 검술이 기억나지 않고 마법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법?”
명훈이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츠즈즈즈…….
뭔가 타오르는 작은 불꽃이 일어났지만 이내 곧 맥없이 사라져 버렸다.
“머릿속으로는 마법의 공식이 생각나는데 몸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마력이 없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해와 달의 관망자에게서 받은 힘을 쓸 수가 없어. 정확히는 그 힘을 끌어내는 방법이 기억나지 않는다.”
“명훈이는 검술 대신 마법이 떠오른다는데. 그럼 너는 뭐가 떠오르지?”
알렉은 어쩐지 대답하기 싫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사령술.”
남궁은 그의 대답에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크…… 크큭.”
터져 나오는 웃음에 알렉의 얼굴이 붉어졌고 남궁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미안, 미안. 부러웠던 거냐.”
“미친. 부럽긴 누가 부러워? 반지에 속성이 반전된다면서? 그건 상성의 속성으로 변한다는 뜻이잖아. 부러운 게 아니라 제일 싫어하는 놈의 속성인 거지!”
“글쎄요. 전 딱히 마법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오히려 제가 가지지 못한 부분이라 부러웠던 것도 맞고요.”
“닥쳐줄래?”
알렉이 명훈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우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피식 웃고 말았다.
“뭐, 결핍된 힘을 가지게 해주는 거든 상반된 힘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든 결국 결과는 비슷하지 않을까요?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니까.”
두 사람의 얘기를 듣던 도중 박효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
“네.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좋든 싫든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죠.”
남궁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无)가 했던 말 때문에 그러는가?”
위용수(偉容水)를 마시고 일종의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던 그들과 달리 우(无)가 했던 이야기를 들었던 남기철이 남궁에게 물었다.
“네. 녀석이 원한 조건은 이 반지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녀석이 이 반지를 가지고 과연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건지를 알아내야 할 겁니다. 그게 놈을 컨트롤할 수 있는 열쇠가 될 테니까.”
“봉인을 풀기 위함은 아닐까요? 우(无)가 자신의 힘을 반전시킨다면 그건 역시 란(亂)의 힘이 될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봉인도 힘을 잃는 게 아닐지.”
“아마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일이겠지. 하지만 글쎄…… 거기서 끝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야.”
“왜죠?”
“일단 그렇게 쉽게 봉인이 풀리도록 란(亂)이 보고만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거든. 우(无)가 풀려 나오는 건 녀석에게도 달가운 일이 아닐 텐데.”
“순조롭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는 거군요.”
“맞아. 탑에서 봤듯이 봉인은 그저 놈들의 육체를 잡아둔 것일 뿐.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그럼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걸까요?”
“글쎄…….”
남궁은 아직 자신이 놓치고 있는 한 가지가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아의 결정이 틀리지 않다면 우(无)의 힘이 우리에게 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소민이가 놈의 계시자가 된 이후인데…….’
남궁은 동굴 속을 훑어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적막감은 오히려 더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보고만 있다…….”
그는 박효주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처음부터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슨 뜻이죠?”
“나는 지금껏 란(亂)과 우(无)를 항상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봤었다. 둘은 당연히 적대 관계라고 말이야.”
“으흠, 그런데요?”
“그냥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면?”
“우(无)의 봉인이 풀리는 것이 오히려 그가 원하는 일이라는 건가요?”
“맞아.”
박효주는 남궁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정황상 그런 가정도 해볼 수 있긴 하겠지만 우(无)의 봉인이 풀리는 것이 란(亂)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잖아요.”
“동감입니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움직이지 마라. 형님께서 항상 말씀하시던 거니까요.”
“그럼 물어봐야겠군.”
“누구에게요?”
“보고만 있는 건 란(亂)만이 아닐 테지. 그 둘은 그렇다 쳐도 녀석이 풀려나면 난감한 놈들은 또 있으니까. 안 그래?”
“……!!”
순간 그들의 앞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네 녀석에겐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구나. 괜한 걱정을 했어. 내 힘을 이리 아무렇지 않게 쓸 줄이야. 조금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맛도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
요르의 등장에 사람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괜찮나? 공간을 만들지 않고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도.”
[상관없다. 여기서 공간을 만들어 봐야 우(无)가 모를 리 없고. 란이 갇혀 있는 탑이야 녀석의 힘으로 채워져 들어갈 수 없지만 이곳은 다르니까. 란의 힘은 우리와 같은 결을 가지니 오히려 편하지.]
“내가 걱정하는 건 우리의 대화를 녀석이 듣는 게 아닐까 하는 거야.”
요르는 남궁의 말에 피식 웃었다.
[여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뭘 하는지 그들은 다 알고 있을걸. 우리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는 걸지도.]
“어때?”
[뭐…… 네 생각이 틀리진 않다. 어쩌면 란(亂)도 우(无)가 봉인을 풀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지.]
“어째서?”
[우(无)가 자신을 풀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봉인을 풀 수 있는 사슬을 가진 네가 전혀 동참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말이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 둘은 서로 적대 관계가 아닌가?”
남궁은 요르에게서 아직 풀지 못한 마지막 조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적대 관계지. 아주 찢어 죽일 만큼 서로를 미워하는 관계.]
요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 둘은 서로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우리들이 우(无)뿐만 아니라 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란(亂)까지 봉인한 이유는 그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순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마치 엿들을 수 없도록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그의 입모양을 남궁은 읽어낼 수 있었다.
[그 둘은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