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 팔각전의 왕관을 획득하였습니다.
▶ 소유자는 왕관을 사용 시 승자의 혜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왕관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혜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전신을 감싸던 마법진이 사라지자 남궁은 자신의 손 위에 남겨진 왕관을 바라봤다.
“당장 위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었나?”
[마지막 선택을 주는 것이지. 왕관을 쓰게 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니까.]
“이런 것에는 또 쓸데없이 친절하군.”
[글쎄, 이게 과연 친절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오히려 한 번 더 시험을 들게 하는 질 나쁜 장난처럼 보이는데.]
“위상인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우습지 않아?”
요르는 남궁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이니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왕관을 쓰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 나는 이런 짓을 좋아하지 않아.]
“그런가.”
남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고민을 할 문제가 아니라서 별 감흥이 없는데.”
[의식을 치르기 직전에 네가 했던 말 말이다.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우(无)를 사냥한다는 것은 우리 위상들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야.]
“못할 것도 없지. 네 말대로 카니발이 끝난다 한들 우리들은 대리자 일족으로서 계속해서 이 빌어먹을 축제에 끌려다니게 될 거야. 그것을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대리자 일족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네 딸이 위험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우(无)의 계시자니까.]
“알아. 하지만 수아가 아무런 이유 없이 소민이를 놈의 계시자로 만들 리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인류를 대리자 일족으로 만들어 카니발을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놈의 계시자가 필요하니까.]
그의 말대로 우(无)의 계시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소민이가 유일했다.
[네가 아무리 대리자 일족의 수장이 되고자 원한들 네 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어.]
“알고 있어.”
[뭔가…… 계획이 있는 거로군? 그래, 내게 말해줄 수는 없느냐. 이곳은 설령 우(无)라 할지라도 들 을 수 없는 공간인데.]
“널 믿을 수 없는데.”
[크크큭.]
요르는 남궁의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여간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가거라. 더 이상 네게는 카니발이 중요한 게 아니겠군. 앞으로 있을 위상전을 준비해야 할 테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육방 다리의 연결자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녀석이다. 녀석의 주위에 떠다니는 6개의 손을 봤겠지?]
남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손에 쥐고 있는 무구들은 제각기 다르다. 그리고 각각의 무구는 그것들만으로도 위상에 버금가는 힘을 낼 수 있어. 즉 녀석을 상대하는 것은 어쩌면 6명의 위상을 상대하는 것과 같은 의미기도 하단 뜻이다.]
요르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그에게 경고했다.
[우습게 넘겼지만 녀석은 강하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마물들처럼 여겼다가는 큰코다칠 거야.]
“명심하지.”
[남궁.]
“……?”
[나는 네가 싫지 않다. 하지만 위상들을 죽이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류를 만든 내가 후회 하는 것과 카니발의 존속은 다른 의미니까.]
“나도 네가 싫지 않다. 인간을 낙원에서 떨어뜨린 뱀이라…… 그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솔직히 놀랐거든.”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인간이 카니발에 고통받을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인간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겠지. 너는 후회 한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고마운 일일인걸.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었기에 수아를 만났고 소민이가 태어난 거니까.”
[혹시…… 위상이 되려는 이유가 카니발을 종결시키려는 것 외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
“다른 꿍꿍이?”
[가령 네 아내를 되살리거나 하는 생각 말이다.]
남궁은 요르의 말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봤다.
“위상이 되면 그런 것도 할 수 있나?”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불멸자인 신보다 어째서 필멸자들이 더 중요한 것인지 아느냐.]
“왜지?”
[그들은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가 아내를 되살린다 한들 그녀가 진짜 네가 알던 그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영혼이 존재하는데도?”
[그 영혼조차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지? 신이자 전능한 우리도 전지하진 않다. 불멸자인 위상도 소멸할 수 있으니 소멸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우리도 모른다.]
“평행세계. 회귀를 한 이 세계부터 원래 내가 있었던 세계인지 아니면 퀘스트로 인해 파생된 새로운 세계인지 모르는 것처럼.”
[맞아. 이곳에 존재하는 우리는 유일하고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더 큰 세계로 본다면 한낱 부속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잘 아네. 나 역시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을 죽이는 것이 진짜 결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네가 생각한 것이 우(无)를 죽이는 것이냐. 인간을 자유케 하는 것?]
그 순간 남궁은 고개를 저었다.
“전 세계 인간보다 중요한 것이 내 딸이다. 내가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것도 내 딸이 우선이겠지. 잘 생각해 봐. 소민이를 놈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법이 과연 놈을 죽이는 것일까?”
[으흠……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 위상이 소멸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계시자도 타격을 입게 된다. 우(无)와 같이 특별한 위상의 소멸로 인한 반발력이라면 아무리 네 딸이라도 버티지 못할 터.]
요르는 턱을 감싸며 생각했지만 감이 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위상을 살려둔 채로 계시자를 바꾸는 것은 우(无)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 테고…….]
그는 답을 구하듯 남궁을 바라봤다.
“계시자를 바꾸지 못한다면 위상을 바꾸면 되겠지.”
[……뭐?]
순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곧 요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탑으로 간다.”
[자, 잠깐……! 이 미친놈아!! 네가 하려는 짓이 뭔지 알기나 하느냐! 네 딸을 구하려다 온 세상이 뒤집어질 수도 있다고!]
떠나려는 남궁을 붙잡으며 요르가 소리쳤다.
“그래서?”
[……뭐?]
“세상을 구하려고 우(无)의 계시자가 되어 소민이가 희생했다. 그렇다면 소민이를 구하기 위해 세상도 한 번은 희생을 해야지.”
[진심이냐?]
남궁은 요르를 향해 말했다.
“난 언제나 진심이다.”
남궁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탑, 그곳엔 란(亂)이 있었다.
[우(无)가 우(无)가 아니게 만드는 법…… 분명 태초의 위상이 하나가 된다면 새로운 위상이 되는 것이겠지. 하지만…….]
요르는 입술을 깨물며 남궁이 사라진 문을 바라봤다.
[그건 우(无) 역시 바라던 것이다. 남궁, 알겠느냐. 란과 우가 합쳐진다면…… 더 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 역시 자리를 떠났다.
[웨이나를 만나야겠어.]
안갯속의 길잡이가 침묵했던 것이 어쩌면 이것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 * *
[보고드립니다. 사이판에 소환된 마물들 중 절반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다수의 마물들이 죽음으로써 헤드가 쏟아졌습니다.]
창그랑―
바닥에 금으로 된 주화가 잔뜩 떨어졌다.
사실 실체가 없이 카운트만 되는 헤드였기에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주화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인간족은 더더욱 강한 무구들을 구입할 수 있게 될 테니 남은 마물들을 소탕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입니다.]
바닥에 떨어진 주화들이 마치 산처럼 급격하게 불어나더니 그 안에서 헤엄을 치던 규류가 남궁을 향해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정신 사나우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쌓여 있던 주화들이 사라지고 규류가 남궁의 앞에 섰다.
“마무리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이대로라면 일주일 안에 모든 마물들이 잡힐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라…… 알겠다.”
남궁은 성채의 문을 열어 2층으로 가는 탑의 문 앞에 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민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평범한 위상이 아니다 보니…… 우(无)의 힘을 계승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모양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지 아니면 볼모로 잡으려고 그러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어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규류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왔나.”
[대단하십니다. 결국 저도 저 녀석도 희생하지 않고 위상의 힘을 얻으셨으니 말이죠.]
악마족의 카를로스였다.
“그 표정은 뭐지? 오히려 내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 내 덕분에 너는 살 수 있었잖아.”
[네, 네. 그렇죠.]
[저거 딱 봐도 아쉬운 표정이네요. 저 새끼 위상의 힘을 가로채려고 했던 거 아닙니까?]
규류가 마치 일러바치는 아이처럼 남궁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런데 진짜 위상이 되실 생각입니까?]
카를로스는 남궁의 손에 들려 있는 왕관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육방 다리의 연결자가 위상전을 지목했다고 하던데…… 그는 공간을 뛰어넘는 존재입니다. 그 왕관을 쓰는 즉시 힘을 쓰기도 전에 놈의 검이 쥐도 새도 모르게 남궁 님을 찌를 겁니다.]
[뭐라는 거야? 그런 걸 내가 가만히 둘 것 같아?]
[네 녀석이 뭘 할 수 있는데? 야차 일족의 수장이 되니까 이제 뵈는 게 없지? 기껏해야 대리자 일족에 불과한 우리가 위상이 하는 일에 관여하겠다고?]
카를로스는 손을 저었다.
[아서라. 아서.]
[이게……!!]
“틀린 말은 아니지. 녀석들이 내가 천천히 강해지길 기다려 줄 리 없지. 위상전? 그건 판을 깔아놓고 싸우는 대결 같은 게 아냐. 분명 지금도 내가 언제 왕관을 쓰나 호시탐탐 지켜보고 있을걸.”
[그럼 어쩌죠?]
“탑의 상층부는 위상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유일한 비밀스러운 곳이야. 그곳에서 나는 방해받지 않고 위상의 힘을 갈무리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문을 열어야 들어가지 않습니까. 아시다시피 상층부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위상의 힘이 필요한데요. 남궁 님의 위상이 도와줄 리도 없고…… 그렇다고 왕관의 힘을 쓸 수도 없고요.]
“여기 위상이 한 명 더 있잖아.”
[……네?]
남궁은 왕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란(亂).”
화르르륵……!!
그 순간 왕관이 불에 타면서 녹아내렸다.
[……!!]
그것을 지켜본 규류와 카를로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팔각전의 왕관이라…… 이걸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클클, 걱정 마라. 가로챈 것이 아니니까.]
장난스럽게 머리에 왕관을 쓴 채 나타난 란(亂)이 남궁을 향해 말했다.
[봉인되어 있는 상태니 위상의 힘을 쓰려면 연료가 필요하거든. 이 왕관이라면 문을 여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문을 열어줘.”
[그런데 내가 왜 해줘야 하지? 네 녀석이 그냥 왕관을 써 위상들에게 죽는 꼴을 보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은데.]
“넌 내가 죽으면 안 될걸.”
[웃기지도 않은 소리군. 우(无)와 나를 죽이려고 꿍꿍이를 부리는 네놈을 내가 도와야 한다고?]
“물론. 내가 위상이 되어야 너희들도 하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죽으면 지금과 다를 바 없을걸. 너는 여전히 탑에 갇혀 있겠지.”
[재수 없는 놈…….]
남궁은 란을 밀치며 문 앞에 섰다.
“알면 닥치고 문이나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