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과거 요란 일족과 우(无)가 카니발을 종결시키려 했던 것은 자네도 알겠지.”
[정확히는 내가 카니발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되살리려 했던 것이지만 말이야.]
“그게 그거지. 우(无)가 남은 위상들을 모두 소멸시키려고 한 것에 우리도 동의했잖아.”
쏜은 레오릭의 대답에 입술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으니까. 하지만 카니발이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겠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일족의 목숨을 걸고 우(无)와 함께 싸웠네. 레오릭, 자네의 힘은 대단했고 우(无)는 위상들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위상이었어.”
꽈악―
쏜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리의 이상은 성공할 것이라 생각했었지. 저 빌어먹을 악마 놈이 탐욕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말이야!”
[크흠…….]
카를로스는 자신을 향한 쏜의 손가락에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놈은 더러운 혓바닥으로 우리 드워프를 속여 엘프와 전쟁을 일으키게 만들었지. 그리고 뒤에서 엘프의 보구를 꿀꺽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악마는 마력을 좇는 존재니까. 엘프의 보구만큼 구미가 당기는 것도 없지.]
카를로스는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보며 쏜은 이를 바득 갈았다.
“보구를 잃은 엘프는 급격하게 약화되었고 뒤늦게 놈에게 속았다는 것을 안 우리들은 전쟁을 멈췄지만…….”
[이미 약해진 엘프들은 위상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지.]
“그리고 엘프와의 전쟁으로 우리 역시 피해를 입었기에 위상들과 더 이상 싸우지 못했다. 그런데도 놈을 그냥 둘 수 있겠느냐!”
쏜은 당장에라도 해머로 카를로스를 내려칠 기세로 소리쳤다.
“모든 게 저놈 때문이다. 마력이 탐나서라고? 웃기는 소리지. 악마놈들은 신살전(神殺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사이를 이간질 했어. 그게 무슨 뜻인지 다들 알 텐데? 놈은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할 생각이 없었단 뜻이지!”
남궁은 카를로스를 바라봤다.
[뭐…… 일족의 존속을 위함이니까요. 패배가 보이는 전투에 목숨을 걸 순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애초에 가담하지 말았어야지! 목숨을 걸 의지도 없는 놈이……!!”
[나도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럼? 뒤늦게 생각하니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겁이 났나? 그딴 변명을 지껄이다니! 역시 네놈은 여기서 죽는 게 낫겠다!”
“다들 어떻게 생각해?”
당장에라도 달려들려던 쏜은 남궁의 말에 멈춰 섰다.
[솔직히 말해서 왜 저놈을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군. 이곳에 들어오기 위함이라면 이제 상관없잖아?]
[나도 그의 말에 찬성이야. 악마족들에게 세뇌되었던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이렇다 할 도움도 없었는데 굳이 남겨둘 필요가 있나?]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라테아가 말을 꺼냈다.
예전부터 카를로스에게 적대적이었던 그녀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낄낄, 화장실 갈 때랑 나왔을 때랑 마음이 다르다더니, 탑의 상층에 들어오니 아주 다들 나를 물어뜯으려고 난리로군요.]
카를로스는 그들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쏜. 그 싸움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게 아니라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어. 우(无)가 어째서 위상을 소멸시키려고 했는지…… 너희들도 이제 알 텐데?]
카를로스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진정 그가 선의로 카니발을 종결하고자 위상을 소멸시키려고 한 것인가? 아니잖아. 그는 우리를 미끼로 삼았던 거야. 위상을 위협하여 그들이 란(亂)을 불러내게 하기 위해서.]
“우(无)와 란(亂)은 다르지만 하나다. 하나가 되기 위해 란(亂)을 불러낸 것이군.”
[맞습니다. 처음부터 그는 전쟁의 승패엔 관심 없었던 것이죠. 하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 그는 끊임없이 기다렸을 겁니다. 위상에게 반기를 드는 자를 말입죠.]
그게 자신이라는 것을 안 남궁은 어째서 처음부터 우(无)가 호의를 가지고 사슬을 준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남궁 님도 이번에 대리자 일족이 되셨으니 본능적으로 알 겁니다. 그 둘이 하나로 합쳐지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태초로의 회귀.”
[네, 맞습니다. 그 둘이 갈라지며 균열을 통해 수많은 차원과 종족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둘이 다시 하나가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이 새로이 시작되는 것을 뜻하지요.]
[놈의 술수는 이미 알고 있어. 우리가 호락호락 당할 것 같아?]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지금 남궁 님께서 우(无)와 란(亂)을 하나로 합치려고 하시는데.]
카를로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남궁에게 말했다.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서 인류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콰악―!!!
그가 쏜이 들고 있던 해머를 빼앗았다.
[이봐, 드워프. 잘 생각해. 지금 네가 때려 죽여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저 인간이라고!]
“무, 무슨…….”
[저들에게 속고 있는 거다. 태초의 위상이 온전하게 되면 탑이라고 무사할 것 같아? 너나 나나 모두 끝이야!]
쏜은 쏘아붙이는 그의 말에 난감한 듯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하여간 참 속이기 쉬운 족속이죠. 드워프들이란. 그때도 대충 이런 식으로 속였지요.]
카를로스는 남궁을 향해 웃으며 들고 있던 해머의 손잡이를 쏜에게 기울였다.
[당황하는 꼴이라니…… 진짜 고민을 한 건 아니겠지? 유일하게 위상에게 대적할 수 있는 분을 내려 칠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뭐, 뭐라고?!”
쏜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게 내가 그를 살려둔 이유다. 배신도 능력이니까.”
남궁이 보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배신한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나도 놈들에게 당했다고. 함께 탑에 갇혀 지낸 세월은 너도 알잖나. 나도 놈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
“……네놈을 어찌 믿어?”
[믿을 필요 없어. 오히려 그게 더 낫지. 자네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위상도 나를 의심할 테니까. 내가 할 줄 아는 일이 자네 말대로 세 치 혀를 놀리는 것이라면…… 나는 위상도 속일 수 있어.]
카를로스가 입술을 씰룩이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였다.
[그냥 나를 이용해. 그걸로 족하니까.]
일순간 홀 안은 적막이 흘렀다.
“우, 웃기지 마!! 내가 또 속을 것 같으냐!!!”
그의 대답에 남궁은 코웃음을 쳤다.
쿵―
그러고는 【만악검】을 바닥에 꽂으며 말했다.
“좋다. 쏜, 복수는 스스로 해라. 나는 악마족에게 원한이 없다. 내 원한은 위상에게 있으니까.”
“……그럼 이 검으로 저놈의 목을 쳐도 상관없다는 말이로군?”
“마음대로.”
꽈악―
쏜은 기다렸다는 듯 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부웅―!!!
“오냐, 내가 그렇게 말하면 못 할 것 같으냐. 이 순간을 내가 몇백 년 동안 기다렸는데!”
자신보다 몇 배나 큰 거대한 검을 한 손으로 휘두르자 검은 마치 단두대의 날처럼 카를로스의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콰아아아앙!!!
쏜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검을 내리쳤다.
“……뭐 하는 짓입니까?”
그러나 검은 카를로스의 머리 위에서 멈춰 섰다.
자신을 막은 누군가를 원망스러운 듯 노려보며 쏜이 물었다.
[그만하면 됐네. 과거의 일은 과거일 뿐.]
놀랍게도 쏜을 막아선 것은 아카샤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우리는 놈 때문에 패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신까지 됐지요. 그런데도 놈을 용서하겠다는 겁니까?”
[용서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니까.]
아카샤의 음산한 목소리에 쏜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는 영악하지만 우리는 그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는 누구보다 위상을 잘 알고 있으니까.]
“지혜? 술수는 지혜가 아니지요. 바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마십시오.”
[바보 같은 실수를 또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고 싶다.]
크그그그극…….
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복수를.]
그의 한마디에 쏜은 끝내 쥐고 있던 검을 내려놓고 말았다.
[자네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가.]
“빌어먹을…… 내가 또다시 악마 놈들과 손을 잡게 되다니…… 제길! 제길!!!”
쏜은 억울한 듯 발로 바닥을 연신 찍어댔지만, 결국 카를로스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듯 보였다.
“내가 이번엔 네놈을 예의주시하겠다. 카를로스, 허튼짓을 하면 이 해머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짤막한 팔로 내 머리를 때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명심하지.]
“벼락 맞을 놈!!”
쏜이 입술을 삐죽이며 돌아서자 카를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남궁에게 감사를 표했다.
[오랜 세월 묵어 있던 숙제였는데……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나 역시 드워프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너의 혓바닥도.”
[낄낄, 최선을 다해 굴려보죠.]
“이곳에서 왕관의 힘을 갈무리하는 동안 너는 악마족에 다녀와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일족들을 볼 수 있겠군요.]
“가서 그걸 가져와.”
[그거라뇨?]
“엘프의 보구. 아카샤에게 돌려줘라.”
카를로스는 남궁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카샤를 바라봤다.
[눈치채셨습니까?]
“채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악마가 마력을 탐하는 존재라는 건 맞지만 엘프와는 결이 다르잖아. 너희는 룬을 만들고 룬의 마력을 먹는 존재니까.”
그의 말에 카를로스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미운털이 박힌 건 알지만 풀 수 있는 원한까지 그냥 둘 필욘 없으니까.”
[……가져오겠습니다.]
화르륵―!!
카를로스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모습이 연기와 함께 사라지자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카샤가 말했다.
[괜한 짓을 했군. 그가 가져온들 사신이 된 지금 보구를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정 그러면 딸아이에게 주지. 요정족의 계약자니 상성이 좋을 걸.”
[……노린 건가?]
“겸사겸사.”
[자넨 보기와 다르게 능글맞은 구석이 있어.]
“딸에게 조금이라도 덜 혼나고 싶어서?”
남궁은 웃으며 쏜을 바라봤다.
“용광로의 문을 열어줘.”
“조심하게. 그 안의 열기는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목숨을 걸어야 할 걸세.”
“딱 좋은 온도로군.”
“하여간…….”
쏜이 드워프의 용광로를 열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가자 남궁은 입고 있던 코트와 셔츠를 벗어 자리에 두었다.
[그거 알지? 혼날 게 무서우면 애초에 혼날 짓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거. 그러니 혼날 생각부터 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고 돌아와라.]
무명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잃지 마라.]
“당연한 소리. 처음이나 지금이나 난 똑같아.”
쿠그그그…….
남궁은 문을 열었다.
“딸을 만나러 돌아올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