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하, 할아버지?”
소민은 남기철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미안하구나. 일찌감치 얘기를 했어야 하는데…… 너희들을 볼 낯이 없어서 말이다. 차마 얘기를 못하겠더구나. 클클, 다 늙어서 뭐가 두려운 건지…….”
그는 쓴웃음 지으며 소민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알고 있었어요. 할아버지.”
“……뭐?”
“알고 있었다구요.”
소민의 대답에 남기철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었다고?”
“네. 엄마가 말해줬는걸요.”
그녀의 대답에, 남기철은 아차 싶은 생각에 탄식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그랬지. 수아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잊었구나. 참으로 바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어.”
“저도 죄송해요. 엄마가 할아버지께서 말씀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해서…….”
“수아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냐.”
“네. 아빠도 제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는 몰라요. 아시면 계속해서 엄마를 찾으실 거라고 해서…….”
“그 아이는 여전하구나…… 살아 있을 때나 지금이나 생각이 깊어.”
남기철은 소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래, 그 아이를 닮아서 너도 이렇게 착한 것이겠지.”
[웃기고 있군. 어쭙잖은 신파를 찍고 있는 거냐.]
“할아버지가 손녀를 사랑하는 것이 신파라고 말하다니, 신이란 작자가 그렇게 그릇이 작아서야.”
남기철은 자세를 잡았다.
“하긴 그러니 다른 위상들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데 혼자 뛰쳐나와 이 난리를 피우는 것이겠지.”
[난리? 너희들은 진짜 모르는 건가. 우리 위상들은 너희 인간을 절대 미워하지 않는다. 카니발을 이대로 끝마쳤다면 그 대가로 너희는 평화를 얻고 번영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허공에 떠다니는 위상의 손들이 펼쳐지자 과거의 역사 속 영광을 누렸던 여러 국가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카니발이 힘겨운 고난이라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너희가 비단 처음이라 생각하지 마라. 저들을 보거라.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그들이 어째서 번영을 이룰 수 있었는가를.]
육방 다리의 연결자, 클립트는 손가락으로 남기철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희들도 저리 될 수 있었다. 카니발을 끝내고 영광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을 네 잘난 아들놈이 발로 찬 것이지!]
화르륵……!!!
클립트의 발아래로 붉은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거미줄처럼 남기철의 주위를 둘러쌌다.
[감히…… 신에게 반기를 들어? 원망할 상대를 찾는 것이라면 우리가 아니라 네 잘난 아들을 탓해야 할 것이다!!]
“상관없다. 애초에 그 아이가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 했을 테니까.”
[네 아들은 영웅이 아니라 재앙이다.]
“그래도 나는 그 녀석을 믿는다.”
콰앙―!!
남기철의 양팔에 검은 기류가 나선의 형태로 생성되었다.
“부족한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니까.”
[그 믿음이 놈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닥쳐!!”
폭발적인 도약과 함께 남기철의 모습이 사라졌다.
“흐아압!!!”
그의 양팔에 감긴 기류가 뱀처럼 클립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블랙 루트의 힘을 유형화까지 시킬 수 있게 되었나? 과연…… 카니발의 선택을 받은 자답구나.]
클립트는 남기철을 향해 말했다.
[블랙 루트의 힘은 분명 특별하지. 하지만 그것 역시 결국 위상이 내려준 것임을 잊었느냐. 고작 그걸로 나를 상대하려고?]
퍼억―!!!!
“……컥!”
블랙 루트의 기류가 닿기도 전에 클립트의 주먹들이 공간을 뚫고 남기철의 급소를 노렸다.
남기철의 허리가 꺾이며 그를 감싸고 있던 블랙 루트의 힘이 맥없이 사라졌다.
[나는 공간을 지배하는 자다. 이대로 네 머리만 다른 공간으로 보내 줄까? 죽지도 살지도 않은 채로 영원히 어둠 속을 배회하게 될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머리를 짓밟으며 위상은 비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둬!!!”
그 순간 소민의 지팡이가 뇌전을 뿜어냈다.
일직선으로 날아든 뇌전이 그대로 클립트의 가슴을 때렸다.
콰지지지직……!!!
콰지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새하얀 전격이 클립트를 밀쳐냈다.
[…….]
“할아버지!!”
소민이 황급히 쓰러진 남기철에게 다가섰다.
[빌어먹을…… 누가 우(无)의 계시자 아니랄까 봐 놈의 냄새가 지독하게도 배였구나.]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껏해야 그를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게 한 것이 고작이었다.
쉬이이익―!!
검을 쥐고 있던 팔이 허공을 가르며 소민의 얼굴 앞에 멈춰 섰다.
[당장에라도 널 죽여 버리고 싶지만…… 우(无)가 개입된 이상 쉽게 끝낼 수 없지. 너는 이 축제를 끝까지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저벅― 저벅― 저벅―.
클립트는 소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너는 누구보다 중요한 관객이니 도망쳐서는 안 되겠지. 어떻게 해야 널 잡아둘 수 있을까…… 그래, 팔다리를 모조리 잘라 몸뚱이만 남겨둘까?]
“위상이시여. 그만두세요! 도가 지나치십니다.”
그 순간 둘의 사이에 미카엘이 나타나 클립트를 막아섰다.
[도가 지나쳐? 우스운 소리를 하는구나. 네 녀석이야말로 도대체 뭘 한 거지? 나는 카니발의 우승을 위해 너를 선택했다. 그런데 네 꼴을 봐라.]
“……?!”
클립트의 팔들이 날아들어 미카엘을 움켜잡았다.
[계시자들은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네놈은 남궁의 밑에 붙어서 경쟁이란 것을 잊어버렸지.]
“크, 크윽……!!”
[내가 남의 개나 되라고 그 힘을 준 것이 아닐 텐데? 지금 그놈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나 알고 떠드는 것이냔 말이다!]
우드득……!!
그리고 미카엘의 사지를 움켜잡고 있던 팔들이 그대로 그의 양팔과 다리를 비틀었다.
“커헉!”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꺾였다.
서걱―.
그러나 그의 비명을 잘라내듯 섬뜩한 검날의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꽂혔다.
촤아아악―――!!!
미카엘의 어깨에서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그의 오른팔이 위상의 검에 의해 잘려 나간 것이다.
[남궁의 딸이야 그렇다 쳐도 너는 다르지. 쓸모없는 것 같으니…… 본보기로 네 녀석의 목을 걸어놓겠다.]
“큭……!!”
미카엘은 이를 깨물며 클립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치직……! 치지직……!!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하게 변했지만, 이내 곧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멍청한 것…… 감히 내 앞에서 공간 도약을 하려 하다니. 내가 준 힘으로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솨아아악……!!
클립트의 검이 미카엘을 향해 날아들었다.
도망칠 수 없게 된 그는 끝내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카아아앙―――!!
그때였다.
검이 그의 목에 닿기 직전, 얼음 같은 얇은 막이 나타나 클립트의 검을 막았다.
쩌적……! 쩌저적……!!
검은 막을 완벽하게 뚫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미카엘의 목에 닿기 직전 멈춰 섰다.
“헉. 헉…….”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미카엘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멈추십시오. 위상이여. 당신은 지금 카니발의 규율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내 검을 막아?]
클립트는 덴의 마법을 보며 불쾌 한 듯 으르렁거렸다.
[그래, 종언 마법이로군…… 레아 그 멍청한 것 때문에…… 쯧, 덴 하울, 뭐라 했지? 규율? 네가 감히 규율이란 말을 입에 놀려?]
“위상은 카니발의 참가자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습니다. 인간족이 대리자 일족이 되었으나 그 이전에 저희는 카니발의 참가자입니다.”
온몸이 저릿저릿한 압박에도 덴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분명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카니발이 끝나지 않았다고. 저 마물들이 어째서 저희를 공격하는 것이지요? 그건 저희가 대리자 일족이기 이전에 참가자이기 때문일 터.”
쩌적……! 쩌저적……!!
미카엘의 사지를 속박하고 있던 팔들 위로 날카로운 얼음 가시들이 튀어나왔다.
“그를 죽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니면 이 많은 사람들을을 직접 죽이실 겁니까? 위대한 위상께서 스스로 마물이 되는 것이겠군요.”
어느새 미카엘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빌어먹을 놈들이…….]
비장한 눈빛으로 그를 막아선 사람들을 보자 클립트는 이를 바득 갈았다.
[그래, 덴의 말이 맞다. 클립트, 이 이상 쪽팔리는 짓 하지 마라.]
“……!!”
사람들은 순간 들려오는 요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살폈다.
[여기서 인간들을 족쳐 봐야 뭐 얻는 게 있다고…… 쯧쯧. 화풀이를 엉뚱한 곳에서 하는군. 하긴…… 이해는 간다. 지금껏 네가 선택한 계시자들은 모조리 탈락해 왔으니까 다음 카니발에서 제명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야.]
[닥쳐…….]
[그가 팔각전의 왕관을 쓰는 순간을 노리려고 했던 게 실패해서 화가 난 건 알지만, 그래도 여기서 이러는 건 아니지.]
[뭐, 뭐라고?]
[화풀이를 해도 걸맞은 상대와 하라는 말이다.]
클립트는 요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솨아아악―――!!
순간 그가 몸을 틀자 허공에 떠 있던 여섯 개의 팔들이 일제히 뒤를 노렸다.
“아직 위상전은 시작도 안 했는데 내가 없는 동안 요란하게도 해놨군.
[…….]
여섯 개의 팔은 이상함을 감지한 듯 그대로 공중에서 멈춰 서 있었다.
“형님!!”
명훈의 외침에 사람들이 같은 곳을 바라봤다.
“위상의 문제는 위상들끼리 풀어야지. 안 그래?”
남궁은 그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막고 있던 팔들을 치우며 클립트에게 걸어갔다.
“저 사람이 남궁인가?”
“TV에서 보는 것하고는 천지 차이로군.”
“……위압감이 장난 아닌데?”
남궁을 둘러싼 사람들은 전투도 잊은 채 그에 대한 수군거림으로 웅성거렸다.
“아빠?”
사람들은 단순히 그가 풍기는 기세에 놀라고 있었지만 소민은 달랐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단순히 그의 강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놈…… 결국 왕관을 쓴 것이냐.]
클립트는 자신의 앞에 선 남궁을 향해 말했다.
“바라던 것 아니었나?”
[결국 인간이길 포기했군. 그래, 나로서도 환영이지. 드디어 거리낌 없이 네놈을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는 당장에라도 남궁에게 달려 들 듯 으르렁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주마!!]
“조, 조심하세요!!”
미카엘이 남궁을 향해 날아드는 클립트의 검을 보며 소리쳤다.
“……?!”
하지만 놀랍게도 그 순간, 클립트의 검이 언제 튀어나왔는지 모를 검은 손에 가로막혔다.
“보채지 마라. 네 하찮은 목숨보다 몇 배는 중요한 시간이니까.”
남궁은 주저앉아 있는 아버지와 딸을 일으켜 세우고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으로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거든.”
그 백색의 눈동자는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