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남궁은 매일 밤 꿈을 꾸었다.
아내와 함께했던 시절의 꿈이었다.
“…….”
그녀는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는 것이 감사할 정도로 너무나 그리운 존재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죽음을 실감하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것이 악몽인지 행복한 꿈인지 스스로도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이제 알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남궁이 손을 뻗자 소민의 등 뒤에 있던 빛무리가 그를 가볍게 감쌌다.
온기를 느끼며 그는 그 빛무리를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아빠…….”
남궁은 소민과 남기철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충분했다.
남기철은 소민의 손을 잡고서 뒤로 물러섰다.
“꽤나 벌여놓았군.”
[네놈…….]
클립트의 팔들이 남궁을 주위를 둘러쌌다.
검을 비롯하여 지팡이, 컵, 수정구, 나뭇가지, 천칭을 들고 있는 그 손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동, 서, 남, 북, 상, 하. 각각의 팔들은 육방(六方)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상하를 의미하는 검과 지팡이.’
남궁은 빠르게 두 개의 팔이 있는 위치를 기억했다.
‘검과 지팡이가 사라지면 녀석의 술법은 기껏해야 앞뒤로 빠르게 움직이는 쥐새끼와 다를 바 없지.’
그리고 검과 지팡이 중에 하나를 부숴야 한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영역에 도달하게 되니 알겠군. 팔위상들 중에서 어째서 네가 최약체인지 말이야.”
[뭐?]
“별것 아닌 신이로군.”
[……죽여 버리겠어!!]
클립트의 여섯 개의 팔이 일제히 남궁을 노렸다.
촤아악……!!!
그 순간 소환된 아스와 거대한 도끼가 그를 노리던 팔들을 쳐냈다.
[명을 내리소서.]
투구 속에서 들려오는 선명한 목소리.
아스의 모습이 변했다.
투박한 갑옷이 아닌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과 그의 무구는 그야말로 신화 속 모습 그대로와 같았다.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콰앙―!!!!
남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스가 검을 쥔 클립트의 손을 노렸다.
동시에 소환된 영혼 병사들이 나머지 손들을 막았다.
[어딜……!!]
쩌적―! 쩌저적――!!
클립트가 영혼 병사들을 향해 무구를 내저으려는 순간 그의 발아래에서 거대한 덩굴이 자라나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의 등 뒤로 영혼 술사의 룬어가 들렸고, 동시에 나트리엘이 그의 몸을 있는 힘껏 들이받았다.
[……큭?!]
생각지 못한 충격에 클립트는 신음 소리를 뱉어냈다.
나트리엘의 강력한 일격에도 불구하고 영혼 술사의 덩굴들은 찢겨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그를 옭아맸다.
[빌어먹을 인간에게……!!]
“너는 아직도 나를 인간으로 생각하는가?”
클립트는 어느새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든 남궁의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퍼억―!!
그의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여섯 개의 팔들 중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궁의 주먹이 그대로 클립트의 뺨에 꽂혔다.
[쿨럭……!!]
클립트의 얼굴이 돌아가며 끝내 그는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고서 주저앉고 말았다.
고개를 들자 영혼 병사들에 의해 제압당한 팔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도 안 돼……! 고작 저런 것들에게 내 육방위들이 힘을 못 쓴다고?]
[안타깝구나. 저들이 아직도 평범한 영혼 병사로 보이는가? 육방위라는 칭호가 우습구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다니…….]
거대한 블랙 드래곤이 클립트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좁은 우물 속에서 하늘을 보는 꼴이니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구나.]
[윌무스…….]
[저들은 이제 고작 영혼 병사가 아니다.]
화아아악―――!!!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브레스가 클립트를 덮쳤다.
[신(神)에게 영혼을 바친 자들이다.]
[크아아악……!!!]
브레스의 화염 속에서 클립트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단순한 속성이 아닌 위상의 힘이 깃든 그의 공격은 이제 신에게조차 닿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위력을 갖추게 되었다.
[진정으로 위상의 힘이라니…… 클클, 좋다, 끝내 네가 인간임을 포기했구나.]
클립트는 전신을 휘감는 브레스 속에서도 오히려 즐겁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 당장 위상전을 펼쳐도 상관없겠지!!]
퍼억―!! 퍼버버벅――!!
붙잡혔던 팔들이 영혼 병사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여섯 개의 팔이 서로 얽히며 육망(六妄)을 만들자 그 아래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 육방 다리의 연결자가 위상전을 시작합니다.
▶ 지목된 상대는 남궁입니다.
▶ 위상전의 승리자에게 새로운 신명(神名)이 주어집니다.
▶ 위상전의 도전을 받은 자는 응하지 않을 시 위상의 자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 위상전의 도전자는 패배 시 2배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 도전에 응하시겠습니까?
“성급하군. 위상전의 도전자는 2배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 텐데?”
[지지 않으면 상관없어. 하나 네놈이 말과 달리 꽁무니를 빼는 게 더 싫은 일이지. 도전을 받은 자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위상전이다.]
남궁은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건 피할 생각이 있어야 고민할 문제지.”
▶ 남궁이 도전을 수락하였습니다.
▶ 위상전이 시작됩니다.
“궁아…….”
머리 위에 떠 있던 마법진이 빛을 뿜어내자 남기철은 불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부디 자신을 잃지 말거라. 나는 네가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넌 것이 아닐지 모르겠구나…….”
블랙 루트의 힘을 가진 남기철은 카니발의 마물이 되었을 운명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카니발은 그를 마물화시키려 속삭이고 있었다.
나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과 공포.
누구보다 그 두려움을 알았기에 자신의 아들이 위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아빠는 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런 그와 달리 오히려 어린 소민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올 거예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녀에게 위로받는 것이 우스운 일이었지만 남기철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남기철은 남궁을 집어삼킨 마법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 따위에게 질 리 없지.”
* * *
[위상전의 장소가 이곳이라니…… 하필이면 달갑지 않은 곳에 와버렸군.]
“왜? 아는 곳이야?”
[여긴 과거에 내가 왕좌 쟁탈전을 치렀던 곳이다. 카니발의 생존자들이 모여 다시 한번 권좌를 두고 다퉜던 전쟁터 말이지.]
눈을 떠보니 그곳엔 작은 무대가 놓여 있었다.
무대 주위로 벽이 쳐져 있었지만 벽의 높이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아무래도 단지 영역의 구분을 위한 것이지 무언가를 막거나 보호하기 위함은 아닌 듯 보였다.
퉁― 퉁― 퉁―
어둠 속에서 조명이 켜지듯 무대 주위로 불이 들어왔고 그곳엔 위상들이 서 있었다.
“구경꾼들을 위한 자리였군.”
남궁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위상들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클립트 녀석…… 왕관을 쓰는 순간 죽여 버릴 거라고 그렇게 난리 치더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카니발 참가자들에게 행패만 부리고 있었군.]
[듣자 하니 드워프의 용광로 속에서 왕관의 힘을 갈무리한 모양이야.]
[용광로라…… 확실히 난쟁이들의 원한이 가득한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먹으면 간섭하지 못할 곳도 아닐 텐데?]
[그 문을 열어준 게 란이었다는 게 문제겠지.]
위상들의 대화가 잠시 침묵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금씩이지만 분명 태초의 위상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카니발에 관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원치 않는 미래로군…….]
[글쎄, 어쩌면 진정으로 우리가 만들지 못한 미래를 저 녀석이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지?]
[저 녀석이 내게 그런 말을 하더군. 딸을 살리고 인류를 카니발에서 영원히 자유케 하기 위해 란과 우를 하나로 만들어 소멸시키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군……! 우리가 그들을 갈라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온전한 하나가 되게 한다고?!]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우리는 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저 녀석이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나만 드는 거야?]
[……뭐?]
[녀석에겐 위상에 대한 복수보다 가족이 더 소중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협상의 기회는 있다는 거지.]
순간 무대 뒤가 술렁였다.
[녀석이 위상이 된 이유는 분명 딸을 자유케 하는 것일 터. 그것을 위해 녀석이 란과 우를 사냥한다면…… 우린 반대로 그를 인간으로 되돌려주는 것으로 대가를 치를 수 있겠지.]
위상들은 그를 주시했다.
[란과 우가 사라진다면…… 우리의 시대가 열릴지도 모른다는 거다.]
[꿈같은 얘기로군. 과연 저 괴물에게 협상이란 게 가능할지…….]
[도리어 우리가 당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군.]
위상들은 이제 막 위상이 된 인간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이 씁쓸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태초의 위상을 살해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남궁일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녀석이 괴물인 건 사실이지만 과연 란과 우에게도 통할지는 모르는 일이야. 자칫 잘못하면 변혁이 아니라 멸망의 시대를 열 수도 있다.]
[그러니 한 번 지켜보자고. 그 능력을 보기 위해 위상전을 연 것 아니겠어? 도박의 카드가 클립트란 제물을 먹어치울지…… 아니면 먹힐지. 우린 손해 볼 것 없잖아?]
[손해 볼 것 없다라…… 네가 그러 말을 할 때마다 의심스럽던데.]
[그럼 네가 나서든가. 남궁을 잡든 위상을 잡든 말이야. 하지만 너희들도 언제까지 란과 우를 감시하는 개로 살고 싶진 않잖아?]
남궁은 무대의 주위가 소란스러워 지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요르가 입을 털고 있는 것이겠지.’
남궁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어떤 것일지 예상할 수 있었다.
[승격된 영혼 병사가 네 녀석의 힘의 전부가 아니겠지. 사령술을 익혔다고 해도 그건 너의 힘이 아닌 요르의 것이니까. 위상의 힘은 누구의 힘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태생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무대에 오른 클립트는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남궁에게 말했다.
[네 힘을 보여봐라. 과연 위상에 걸맞은 힘인지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
“적이었던 자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아나?”
[뭐?]
“그건 공공의 적을 만드는 것이지.”
남궁은 【만악검】을 꺼내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공공의 적이 생긴다 한 들 적에게 맞설 용기가 없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거든. 그렇기 위한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 적을 이길 수 있다는 기대를 심어주는 것.”
우우우웅…….
검이 떨리기 시작했다.
“넌 그러기 위한 제물이다.”
[미친놈…….]
“네게 감사한다. 각자의 입장이 있겠지만 먼저 내게 싸움을 걸어와 줬으니.”
순간 남궁의 백색 눈동자가 마치 막이 씌워진 것처럼 흐릿하게 변했다.
[……!!]
“이건 위상전이 아니다.”
그 순간, 처음 느껴보는 폭발적인 힘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내 가치를 증명해 보이는 무대다.”
남궁의 모습이 사라졌다.
여섯 개나 되는 클립트의 팔은 무엇 하나 반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