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가치? 웃기는 소리군. 네 녀석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신살(神殺)을 이루겠다고 대단하게 말했지만 봐라. 결국 위상전? 우리의 규율 아래 이뤄지는 일일 뿐이지.]
당장 격돌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이었지만 클립트는 남궁과 조금 거리를 두며 말했다.
[녀석의 힘이 뭔지 살피려는 모양이군.]
[그럴 수밖에. 아직 신명이 아직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위상은 위상. 남궁은 분명 신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솔직히 나도 궁금하군. 과연 그가 어떤 힘을 깨우쳤는지 말이야.]
관객석의 위상들 역시 촉각을 곤두세우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말이야말로 우스운 얘기겠지. 내 목표가 너라면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키에에에에―――!!!!!
그 순간 남궁의 등 뒤로 새하얀 뱀의 형상이 나타났다.
“너는 내게 있어 그저 지나가는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
콰아앙……!!!
거대한 백사(白蛇)가 입을 벌리며 클립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뱀? 인간이 그럼 그렇지. 누가 요르의 계시자 아니랄까 봐 기껏 얻은 힘도 그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구나.]
남궁에게서 소환된 뱀의 모습은 위압적이었지만 클립트는 그것을 본 순간 오히려 하찮다는 듯 비웃었다.
[사각(死角)이 없는 육방위의 힘이여.]
그의 옆에 떠 있던 팔들이 각각의 위치에 멈춰 섰다.
지이이잉……!!
각각의 무구들이 마치 화살표처럼 중심에 있는 클립트를 가리켰다.
[적을 멸하라.]
무구들이 빛나자 그의 주위에 푸른 막이 생성되었다. 방벽이 세워짐과 동시에 그의 팔들이 남궁을 향해 날아갔다.
[……승패가 났군.]
요르의 한마디에 다른 위상들은 반박하지 않았다.
[클립트 녀석, 아무래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야. 육방위의 신이란 말이 아까워.]
[글쎄, 우리들 중 누구라도 저 자리에 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걸. 우리의 입장에선 운이 좋았군. 클립트가 희생양이 되어준 덕분에 남궁의 힘을 확실히 볼 수 있었으니까.]
[이게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저 힘을 보고 난 지금 오히려 저 녀석이 괴물이라는 걸 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위상들은 요르의 말에 굳은 표정으로 남궁을 바라봤다.
[도대체…… 어떻게 저 힘을 얻은 거지?]
콰아아아앙―――!!
그들의 의문을 비웃듯 날카로운 굉음이 터져 나오며 무대 안에 시커면 연기가 피어 올랐다.
[……컥!!!]
자욱한 연기 밖으로 튕겨 나간 건 다름 아닌 클립트였다.
[케에에엑―!!]
날카로운 포효와 함께 쓰러진 클립트의 허벅지를 남궁의 백사가 콱! 물었다.
[크, 크악!! 이거 놔!!]
클립트는 뱀을 뿌리치려 발버둥쳤지만 그럴수록 날카로운 이빨은 더욱더 그의 살점을 파고들었다.
[……말도 안 돼! 이제 막 위상의 힘을 얻은 놈이 어떻게 내 방벽을 뚫을 수가 있는 거지?]
“위상의 힘에도 수준이 있으니까. 팔위상 중에서도 최약체라 불리는 게 육방위의 힘 아닌가?”
[닥쳐……!!]
솨아악―――!!
클립트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남궁은 그가 어디서 나타날지 알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서 검을 왼쪽으로 그었다.
푸욱―! 쿠가가강―!!
내려친 그의 검이 도끼인 양 클립트의 어깨에 박혔다. 박힌 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클립트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어떻게…….]
“아까부터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군. 계속 묻기만 하는걸 보니. 스스로 알아차릴 생각은 안 하나 보지?”
[육방위의 공간술은 예측 불가인데…….]
“공간을 뛰어넘는다니 뭐니 해도 결국 그건 수단에 불과한 거니까. 어디로 날뛰어도 결국 나라는 목적지가 뻔히 정해져 있는데 예측을 못하는 것이 되레 말이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온갖 곳에 갈 수 있는 능력은 있어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야.”
[……뭐?]
“발버둥 쳐봐야 손바닥 안이지.”
남궁은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에 박혀 있던 검을 있는 힘껏 찍어 눌렀다.
크즈즈즈즉……!!!
거대한 검이 천천히 클립트의 몸을 사선으로 갈랐다.
[크아아아악!!!]
신의 비명이 무대 위에 울려 퍼졌고, 클립트의 육신이 갈리는 소리가 위상들의 귀에 선명히 들렸다.
츠으으으으…….
가득 채웠던 연기가 사라지자 무대가 있었던 자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속에 남궁과 반으로 갈린 클립트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클립트가 우리들 중 약체라고는 하지만 저렇게 허무하게 지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힘이로군…….]
솨아아악……!!
남궁이 검을 거두자 그의 뒤에 있던 백사의 형체가 사라졌다.
[도대체 어떤 힘을 얻은 거지? 클립트의 공간술이야 백사의 눈으로 알아차렸다고는 해도 저 괴력은 그것으론 설명할 수 없어.]
[진정 이게 인간이 얻을 수 있는 힘인가…….]
위상들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놈이 무슨 술수를 부린 게 틀림없어.]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든지. 내 생각엔 대답 대신 검이 날아올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놈은 강하다. 우리들 중 일대일로 붙어서 녀석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자는 손에 꼽힐걸.]
[요르, 너는 지금 이 상황을 즐거워 하는 것 같은데? 지금 우리의 동료가 죽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이건 동료가 죽은 게 아냐. 지금 새로운 동료를 얻게 된 것이지.]
[뭐?]
[솔직히 기뻐해야 할 일 아냐? 그가 강하면 강할수록 정말 란과 우를 멸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잖아.]
[그 강함이 칼날이 되어 우리를 겨누지 않는다면 말이지.]
요르는 마지막 말을 한 위상을 바라봤다.
해와 달의 관망자, 두르가였다.
‘눈치 빠른 녀석.’
흑룡의 배 속에 문을 집어넣었을 때도 다른 위상들과 달리 그는 요르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멍청하긴, 칼을 쓰려면 손잡이를 잡아야지 칼날을 잡으니 그런 일이 벌어지지. 걱정 마라.]
요르는 오히려 두르가에게 핀잔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위상의 탄생을 축하하는 일이니까.]
▶ 육방위의 연결자, 클립트가 소멸되었습니다.
▶ 그의 계시자의 능력이 사라집니다.
▶ 위상전의 승자는 패자의 힘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클립트의 시체가 가루가 되며 사라졌고 남궁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 위상전이 끝났습니다.
▶ 새로운 위상이 탄생하였습니다.
▶ 새로이 탄생한 위상은 앞으로 사용할 신명을 지을 수 있습니다.
짝― 짝― 짝―.
위상의 시체가 몸 안으로 흡수된 뒤 남궁은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백사(白蛇)라…… 일곱 뱀의 계시자다운 힘이야. 아주 보기 좋은 걸? 클립트 녀석 따위야 사실 별것 아닌 위상이지만 말이지.]
부서진 무대 안으로 들어온 것은 요르였다.
[이 정도로 압도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괴물이 되었구나.]
“축하하는 거라면 삼독문의 마지막 문이나 열어주든지. 금(金)의 문에 뭐가 들어 있을지 궁금한데.”
[크큭…… 이제 너의 보고를 만들어야 할 판에 아직도 다른 위상의 물건에 욕심이 가느냐.]
“그런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그래, 그래. 언제 한 번 와서 보도록 하거라. 네 녀석에게 쓸 만 한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중요 한 일?”
[너의 신명을 정하는 일.]
요르는 눈을 반짝이며 남궁에게 말했다.
[신명은 단순히 위상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다. 신명이 뚜렷할수록 위상의 힘도 강해지거든.]
“신명은 지금 바로 지어야 하나?”
[그렇진 않다. 천천히 생각해도 좋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데 시간은 넘칠 만큼 많으니까.]
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한다. 정말로 클립트의 자리를 빼앗을 줄이야.]
[무슨 술수를 쓴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음을 잊지 마라.]
위상들은 경고했지만 그들의 말이 남궁에게 먹힐 리 없었다.
남궁은 오히려 그들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태초의 위상을 상대하려면 사실 이걸론 부족하지. 너희들도 먹어 치워 줄까?”
[뭐? 이 자식이……!!]
“뱀의 똬리 속에 짓이겨지고 싶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라. 나는 도망치지 않으니까.”
도발적인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위상들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 결국 뒤를 돌아설 뿐이었다.
[살살 좀 하지 그래? 네 딸을 구하기 위해 태초의 위상들을 상대하려면 결국 저들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내 힘은 충분히 증명했어. 좋든 싫든 간에 이제 녀석들은 내 도움을 기대할 수밖에 없겠지.”
[하여간 네 녀석을 보면 외줄을 타는 것 같아 불안하단 말이야.]
요르는 남궁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들의 불신도 이해는 간다. 사실 지금껏 팔각전 왕관을 통해 위상의 자리에 오른 자는 없었거든. 모두가 위상전에서 소멸되었으니까. 힘을 얻었다 한들 그 힘에 익숙해지기 전에 다른 위상들에게 죽임을 당한 거지. 하나 넌…….]
그는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너무 강해?”
[……재수 없지만 맞다. 지금 너는 강해도 너무 강해. 위상의 힘을 이제 막 깨우친 것 같지 않게.]
“그래? 그럼 경험이 많은가 보지.”
[별 시답잖은……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경험이 많은 거야 잘 알지. 너는 회귀를 했으니까.]
남궁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제 내가 카니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왕관의 힘을 탑의 상층에서 사용했다고 들었다. 설마 란과 무슨 술수를 부린 건 아니겠지.]
“너도 날 경계하는 거야?”
[경계가 아니라 걱정이다.]
요르는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 마. 그들에게 손을 빌릴 생각은 없으니까.”
[그럼 그 말도 안 되는 힘은 도대체 어떻게 얻은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고!]
“내가 손을 빌린다면…….”
남궁은 걸음을 옮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
요르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도대체 어떤 인간이 저 괴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그의 의문은 생각보다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답을 자신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니발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는 인간.
그건 한 명뿐이었으니까.
[……루(淚).]
태초의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