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루(淚)…… 그 녀석이 네가 위상의 힘을 얻는 데 관여했다는 말인가?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너무 믿지 않길 바란다.]
요르는 남궁의 말에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째서?”
[녀석은 나를 미워하고 있으니까. 너를 이용해서 내게 복수를 하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네가 인간을 낙원에서 지상으로 타락시킨 뱀이라서?”
[나는 타락시킨 것이 아니다. 인간을 자유케 한 것뿐이지. 신이 빚어놓은 애완품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살아가도록 의지를 가지게 해준 것이야.]
“하지만 그 일을 넌 후회하고 있지. 그렇지 않다면 태초의 인간의 눈물을 지금껏 가지고 있을 리 없잖아?”
[내 개인적인 일과 이 일을 연관시키지 마라.]
남궁은 요르를 바라봤다.
인류의 역사와 신앙 속에 남겨져 있는 가장 악한 존재가 사실은 가장 인류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존재라니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
“우(无)를 만나야겠지. 인류를 대리자 일족으로 만드는 조건으로 놈에게 변곡의 반지를 주기로 했거든.”
[그걸 주면 그가 봉인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건 너도 잘 알겠지.]
“물론이야. 위상들에게 전해. 괜히 날 막을 생각 하지 말라고.”
[위상전에서 충분히 네 힘을 보았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네가 우를 해방시킨다 한 들 막을 수 없으니 네 계획을 반대하는 자는 란의 봉인을 지키는 쪽을 택하겠지.]
“위상들의 반응은 어때?”
[사실 반반이다. 클립트를 압도한 네 힘이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하나가 된 란과 우를 과연 이길 수 있을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루의 힘이 있다 해도?”
[태초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모두가 위대한 것은 아니지. 인간의 존재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뭔데?”
[살아 있다는 것이다.]
요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생명을 담을 수 있는 육신이다. 인간이 강한 이유는 육신이 있기 때문이지.]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 아냐?”
요르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언제든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 있지. 하나 너희는 다르잖아.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운명. 그것은 생각보다 강한 의미를 지닌다.]
“육신이 있기에 인간이 강하다라…….”
하지만 남궁은 그의 말에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 넌 인간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이군.”
[……뭐?]
“불멸보다 필멸이 빛나는 이유가 생명의 유무라지만 그것은 강함을 결정하는 기준이 아냐.”
남궁은 요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위상의 자리를 내려놓는다면 다음엔 인간으로 환생해 보는 건 어때? 수백 년을 옆에서 본다고 인간을 아는 것이 아니거든.”
[쓸데없는 소리…… 그러는 너는 위상의 힘을 얻으니 우리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거냐.]
“적어도 네가 인간을 아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알게 되었지.”
[흥, 그래, 무엇을 알게 되었는데?]
“너희를 해방시켜 주고 싶다.”
[…….]
남궁의 한마디에 요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참, 별 소리를 다 듣는군. 우리가 무슨 란과 우처럼 봉인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요르는 표정을 고치고서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남궁이 자신들의 이면마저 꿰뚫어 보고 있음을 말이다.
[여튼 조심해라. 지금 당장 인간들은 축제의 위험에서 벗어났겠지만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말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니까.]
“명심하지.”
[란과 우라…… 후우,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군.]
떠나는 남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요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참…… 아무래도 너도 모르는 것 같아서 하나 더 얘기해 주지.”
[……?]
“무곡(武曲)의 밤이 시작될 거다.”
[……!!!]
그 순간 요르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무곡의 밤이라니……! 도대체 누가 그걸 시작한 거야?]
“그거야 한 명뿐이잖아. 우(无)가 계시자를 얻음으로써 위상의 자격에 올랐다. 위상으로서 혜택을 일으키는 행위는 이상한 게 아니잖아?”
[혜택도 혜택 나름이지……!! 소환수의 밤과 같이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내가 이런 말을 하겠느냐! 도대체 그게 뭔지 알기나 하고 수락 한 것이냔 말이야!]
“나도 몰라. 그건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니니까.”
[뭐? 그럼 누가?]
“소민이가 우(无)의 계시자를 수락하면서 대신 내건 조건이었다.”
[그 당돌한 꼬마 녀석은 하는 짓 마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뿐이로군. 도대체 무곡의 밤은 어떻게 알아낸 거지?]
“소민이가 아니라 수아가 우에게 내건 조건인 것 같았다.”
[죽은 네 아내 말이더냐.]
“……맞아.”
남궁은 대답하면서 ‘죽은’이란 단어에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너도 그게 뭔지 제대로 모르는 것 같은데 어째서 수락한 거지?]
“별 이유 없어. 수아가 하고자 했으니까 하는 것뿐.”
[그게 끝이야? 아내가 하자고 해서 한다고? 나참, 매사에 철두철미한 녀석이 또 이런 면에서는 허술하기 짝이 없군. 적어도 일을 벌이기 전에 그게 뭔지는 알아야 하는 것 아냐?]
“설명은 네게 들으면 되지.”
[하아, 인간의 대범함은 가끔 신을 놀라게 만든다니까. 아니, 이걸 대범함이라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요르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무곡의 밤은 다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째서?”
[그날이 란과 우가 탄생한 날이기 때문이지. 태초의 균열이 생겼던 날이자 차원이 만들어진 위대한 밤. 위상들은 그날을 무의 시간이라고도 부른다.]
“아무것도 없는?”
[그래. 아무것도 없기에 모든 것이 평등한, 위상과 피조물의 경계조차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우가 위상을 죽일 수도, 인간이 멸살될 수도 있다 했던 말이 그런 의미였군.”
[네 아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것을 제시했는지 이해는 간다. 정말 무곡의 밤이 시작되면 위상과 인간의 경계가 사라지니까.]
“그렇군.”
남궁은 아내의 뜻을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하긴 일러. 경계가 허물어진다 해서 같은 조건이 된다는 건 아니니까. 란과 우는 여전히 강하고 너는 그들의 앞에 기껏해야 칼을 든 개미와 같다.]
“개미라도 급소를 찌를 순 있다.”
[급소를 알긴 하고?]
“지금부터 알아내야지.”
요르는 쯧― 하고 혀를 차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혹시 우(无)의 요새에 가봤었나?]
“아직. 소민이가 그의 계시자가 되었으니 반지를 주게 되면 요새의 문도 열리겠지.”
[흐음…… 그럼 이걸 받아라.]
요르는 그에게 작은 열쇠 하나를 던졌다.
“이게 뭐지?”
[삼독문 중 금문의 열쇠다. 요새에 가기 전에 필요한 장비들을 가져가라. 딱히 의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빈손으로 가는 것보단 낫겠지.]
“……고맙다.”
[쓸데없는 소린 되었고 죽지나 마라. 뭐, 네 녀석이 죽는 미래는 솔직히 상상이 잘 가지 않지만.]
남궁은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네가 신살(神殺)을 이루는 것도 상상이 가지 않기는 매한가지야. 정말 이런 불안한 경험은 처음이야.]
“재밌지 않아?”
[……뭐? 이게 재밌다고?]
“인간은 항상 내일을 알지 못하며 산다. 매일매일이 그런 불안 속에서 발을 내딛는 거야.”
남궁이 손을 젓자 그의 앞에 차원문이 나타났다.
“그게 인간이 강한 이유다.”
솨아아악―――!!
차원문 속으로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요르는 빈 공간에 입을 다문 채 서 있었다.
* * *
[기다리고 있었다.]
“딱히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그럼 쓰나. 얼마나 기다렸는데. 약속을 이행할 때잖아. 안 그래?]
“여기 있다.”
란의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우(无)에게 남궁이 반지를 건네었다.
[크, 크큭…….]
반지를 받은 우(无)가 그것을 손가락에 끼우자 순식간에 그를 옭아매고 있던 모든 것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그는 미친 듯이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안광이 남궁의 것처럼 새하얗게 변했고 결계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드디어…….]
결계 밖에 선 그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시며 마치 칭찬을 하듯 남궁의 머리를 가볍게 두들겼다.
[자유로다. 이게 모두 네 덕분이구나.]
“손 치워. 건방지게.”
[크큭. 하여간 재밌는 녀석이야. 위상들도 내 앞에선 머리를 조아릴텐데. 시건방진 말을 잘도 할 수 있다니 말이지.]
“그 위상들 중 한 놈을 지금 죽이고 왔거든. 별거 아니던데? 그 정도 수준이면 벌벌 길 만하지.”
콰앙―――!!!
그 순간 남궁의 몸이 날아가 동굴의 벽에 처박혔다.
[너도 별반 다르진 않아.]
“글쎄?”
[…….]
벽에 처박혔다고 생각했던 남궁이 놀랍게도 우의 뒤에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이것 봐라? 클립트의 능력을 벌써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좋아, 좋아. 카니발을 종결시키겠다는 녀석이 이 정도는 해야지.]
“……요새의 열쇠나 내놔.”
충격이 없는 건 아니었던 듯 남궁은 입가에 주르륵 흐르는 핏물을 닦았다.
[크클, 탐욕스러운 인간아. 그래,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가져가도 좋다. 지금 내겐 하찮은 것들이니까.]
“란(亂)을 만나러 갈건가?”
[물론.]
“위상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네 녀석에게도 짓밟히는 것들이 나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들을 얕보지 마라. 요르는 강하다.”
[그래? 알겠다. 선물로 녀석의 머리를 뜯어다 네게 주지.]
남궁은 우(无)가 던진 열쇠를 주우며 그를 바라봤다.
[네 역할을 이제 끝났다. 걱정 마라, 카니발은 내가 없애줄 것이니까. 너희들에게 영원한 자유를 선사해 주마.]
우(无)는 즐거운 듯 말했다.
[죽음이란 자유를.]
화르르륵……!!
검은 불꽃과 함께 우(无)의 모습이 사라졌다.
꽈악―.
남궁은 요새의 열쇠를 움켜쥔 채 낮게 숨을 토해냈다.
“밖은 축제인데 이곳은 전쟁터로구나.”
“……아버지.”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블랙 루트의 힘으로 결계를 뚫을 수 있는 남기철뿐이었기 때문이다.
“요새로 가서 오리진을 가져올 생각입니다.”
“승산은 있느냐. 신의 무기라도 결국 위상의 물건이다. 아무리 강력한 것이라도 그것으로 신을 죽일 순 없어.”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걸로 녀석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껏 그 어떤 무구도 신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그러니 만들어야죠.”
촤르륵―
순간 아무것도 없던 그의 손목에 사슬이 나타났다.
“신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